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과이불개(過而不改)’를 선정했다. 잘못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애국 국민들의 귀에는 문재인 정부의 난정(亂政) 동안 쌓인 적폐들이 산더미 같은데도 윤석열 정부가 이를 척결하는데 속도를 내지 않는다는 지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사실, 안보 분야만 하더라도 전작권 분리 및 연합사 해체·종전선언, 9·19 남북군사합의, 탈원전, 약소(弱小) 지향적 국방개혁 등 북한을 이롭게 하고 한국의 안보와 동맹에는 해가 되는 많은 조치들을 시도되었거나 강행되었다. 국정원의 정치화와 대공(對共)가능 무력화도 안보 분야에서 저질러진 적폐였다.

하지만, 최근 국정원은 전임 정부의 ‘알박이’들이 온존하는 방송, 사법, 국책연구기관 등과는 사뭇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얼마전 최고위직 수십 명을 퇴직시키더니만 최근에는 고위간부 100여 명에게 대기발령을 내렸다고 한다. 국정원 자체의 시도인지 정부의 의중이 실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사람들은 ‘과이불개’가 아닌 ‘정상화’를 위한 변화로 보고 싶어 한다. 특히, 국정원의 역할이 안보·동맹·통일전략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정상화는 빠를수록 좋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인사는 후일 반드시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정보기관이 대북유화의 선봉대인 나라

‘확고한 안보’와 ‘남북화해 노력’은 함께 굴러가야 하는 두 개의 수레바퀴다. 이것이 대북정책의 정론이다. 대북정책의 궁극 목표는 ‘상생’이며 이를 위해 정부는 상황과 필요에 따라 대결(confrontation), 무시(neglect), 접촉유지(engagement), 유화(appeasement) 등 다양한 기조의 정책을 구사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확고한 안보’와 병행해야 한다. 과거 서독도 이 정론을 철저히 지켰고, 이스라엘도 주변 이슬람국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노력하면서도 철저한 안보를 유지하면서 핵보유를 고수해왔다. 유일한 분단국으로서 북한과 제로섬적인 체제대결을 벌이는 한국의 정보기관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야 하는 지고의 정론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의 L 국정원장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 앞서 방북하여 회담 일자를 조정했는데 불법송금 관련 협상을 한 것으로 의심받았다. 이후 김 대통령을 수행하여 방북했고 햇볕정책의 전도사가 되어 북한의 대남 접촉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노무현 정부의 K 국정원장은 2007년 대선을 하루 앞둔 민감한 시점인 12월 18일 방북하여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을 만나고 돌아와서 방북 경위 내용을 설명하는 문건을 언론사에 유출하여 말썽이 빚어지자 사임했다. 문 정부의 P 국정원장은 ‘북한이 가장 신뢰하는 대남접촉 창구’였으며, 국정원장 취임 이전에 2000년 김대중 대통령 수행, 2000년 언론사 사장단 방북, 2014년 김대중 대통령 서거 5주기 조화 수령, 2018년 남북 철도·도로 연결착공식 등 아홉 차례의 방북 경력을 기록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주선을 위해 북측과 접촉하던 시기 국정원 대북실장 S씨가 그를 보좌했는데, S씨는 후일 국정원장, 청와대 안보실장 등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문 정부의 국정원에서 반미 학생조직인 삼민투 위원장이자 미 문화원 점거 사건 주동자였던 운동권 P씨가 기조실장 및 제1차장으로 재임한 것도 특이했다.

이런 식의 국정원 인사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전향적인 대북관이나 남북대화 노력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번지수가 틀렸다. 남북 교류·협력은 현 정부 체제 하에서는 통일부가 주도하는 것이 맞다. 국정원은 남북관계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음지(陰地)에서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곳 세워고 ‘최악 사태’를 경계해야 하며, 안보 위해(危害) 인자들을 색출·제거하는데 전념해야 한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국정원은 ‘번지수가 틀린’ 사람들이 장악하면서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국정원이 대북 유화의 선봉대가 되었고,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과 국내정보 수집권은 박탈당했다. 대공업무에 전념해온 유능한 정보 전문가들은 된서리를 맞았다. 그들의 머리 속에 축적되어온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소중한 정보자산들도 소멸되었다. 이스라엘 모사드(MOSAD)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일들이다.

뒤죽박죽 동맹정책과 통일전략

동맹이란 기본적으로 ‘공동의 적’을 가진 나라들의 군사협력체인데, 국정원의 변질은 동맹을 혼란에 빠뜨렸다. 안보여건을 종합할 때 지금은 한국이 대륙쪽에서 가해지는 안보위협에 대처해야 하는 신냉전 시대이며, 북핵 위협을 극복하는 것은 당면 안보과제다. 그래서 한미동맹의 유지·강화가 절박한 과제다. 최근에는 북핵 위협이 가중되면서 ‘전술핵 재반입을 통한 핵균형’을 요구하는 소리가 분출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교체가 ‘좌우’를 오가면서 이루어지는 나라, 좌성향 정부가 집권하면 동맹보다 ‘공동의 적’과 더 친해지고 정보기관이 ‘적이 신뢰하는 접촉창구’가 되어버리는 나라와 미국이 민감한 정보를 공유하려 하겠는가? 그런 나라와 중요한 전략자산인 핵무기를 쉽사리 공유하겠는가? 그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려주려 하겠는가?

통일전략도 그렇다. ‘통일부’로 불리는 부처가 남북 교류협력 업무를 담당하는 것 자체부터가 혼란스럽다. 헌법 제4조가 명령하는 ‘자유민주 평화통일’은 북 체제가 소멸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며 그러기 위해서 한국은 체제대결과 안보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 물론, 또 하나의 목표인 ‘평화’를 위해서는 북 체제와 평양정권의 실체를 인정하고 교류협력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하지만, 평양 정권이 자신들의 체제와 정당성을 잠식할 수 있는 방식의 남북교류를 거부하는 현 상황에서의 대북 경협이나 원조는 북 정권의 권위를 높이고 정당성을 강화해준다. 즉, 교류협력은 ‘평화’에는 기여하지만 ‘자유민주 통일’에는 반하는 측면이 더 많다. 그런데도 교류협력 업무를 수행하는 부처를 ‘통일부’로 부른다면 국민은 ‘교류협력=통일’이라는 등식을 믿게 되고, 자유민주 통일을 위해 안보·체제 경쟁의 승리를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은 졸지에 ‘교류협력을 어렵게 하여 통일을 저해하는 반통일 세력’으로 매도된다. 그래서 통일부는 ‘남북협력부’로 개칭되어야 한다.

결국, ‘평화적 상생’도 필요하고 ‘자유민주 통일’도 포기할 수 없는 한국에게 있어 대북정책은 ‘남북협력부’가 공개적으로 펼쳐나가도록 하되 통일문제는 ‘전략’ 차원에서 깊숙한 곳에서 연구·논의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들의 중심적 역할이 필요하다. ‘통일부’라는 이름으로 교류협력 업무를 수행하는데다 국정원까지 본래의 임무를 제쳐놓고 교류협력의 창구로 전락한다면 동맹정책이든 통일전략이든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대한민국이 무섭도록 일관된 통일전략을 구축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국정원만이라도 ‘과이불개’ 소리를 듣지 않기를

국정원 정상화를 위해서는 당장 가능한 조치도 있도 시일이 걸리는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정상화는 시급하다. 국정원의 주인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한 보루’라는 사명감이 충만한 사람들이어야 하며, 정치색과 지역색이 전무한 전문가 집단이 되어야 한다. 국정원은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나 평화공세를 펼칠 때나 한결같이 ‘최악’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 눈을 번뜩이는 ‘안보의 보루’가 되어야 하며, 일관성과 신뢰성을 바탕으로 동맹 및 우방국들과의 긴밀한 정보협력을 유지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북 체제 소멸’ 이외는 ‘자유민주 평화통일’의 길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정원 내부에는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체제·안보 경쟁에서 승리하는 전략을 연마하는 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어야 한다. 정부가 바뀌면 이런 사람들이 졸지에 ‘반평화·반통일’로 매도되어 쫒겨나는 일은 두번 다시 없어야 한다. 이런 국정원이 일년에 1조 2천억 원이 넘는 혈세를 쓰면서 국정원을 존속시킬 필요가 없다. 국정원만이라도 ‘과이불개’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조직이 되었으면 한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전 통일연구원장/전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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