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고(扮) 가리는(飾) 분식이 정치에 횡행
정권 차원의 정책일수록 분식의 정도가 심해
가장 위험한 것은 역사‧문화에 대한 분식정치

조전혁 前의원
조전혁 前의원

기업이 저지르는 중(重)범죄 중 하나가 분식회계다. 분식은 ‘꾸미고(扮),’ ‘가리는(飾)’ 것이다. 회계장부에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가려서 이해당사자를 속이는 행위다. 적자가 흑자로 둔갑하고, 쪽박 회사가 대박 회사로 변신한다. 경영층의 임기 연장, 주가조작, 채무연장, 탈세, ... 모두 범죄 목적이다.  

곧 지방선거다. 선거를 앞두고 ‘분식정치’가 횡행(橫行)한다. 분식정치에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선거에서 후보는 자신의 스토리나 배경이 돋보이려 경쟁한다. 어떤 후보는 학창시절 은상 받은 것을 금상으로 포장했다가 선관위 경고를 받았다. ○○학교 수료를 졸업으로 표시했다가 당선무효가 된 후보도 있다. 분식의 유형으로 따지면, ‘후보분식’이라고나 할까?

분식공약도 있다. 공약에는 편익과 비용이 공존한다. 자신의 공약의 편익은 과장하고 비용은 축소한다. 거꾸로 상대방 공약에 대해서는 편익은 무시하고 비용을 과장한다. 빌 공(空)자 공약이요. 영악한 네거티브다. “정치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이 이래서 나온다. 

정부 정책의 분식도 문제다. 진영논리를 업은 정권 차원의 정책은 분식의 정도가 특히 심하다. 정책 형성과 시행까지 모든 과정이 비정상적이다. 전문가보다 정치적 힘이 센 비전문가의 영향력에 좌우된다. 속된 말로, “까라면 까” 식의 추진이 다반사다. 무리한 추진으로 큰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가 많다. 혈세만 낭비된다. 

탈원전 정책이 좋은 예다. 우리 원전의 안전성과 효율성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선진국인 영국조차 한국형 원전 건설을 고려할 정도인데 이 정권은 원전의 위험성만 강조하고 경제성은 무시한다. 정권 주변에서는 ‘핵(核)발전’이라는 용어까지 써 가며 대중의 공포심을 유발한다. 지난 10여년간 90% 넘던 원전가동률이 새 정부 출범 1년도 안 돼 58%로 뚝 떨어졌다. 원가가 3배 가까운 LNG발전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지난 5년간 수조원의 흑자를 기록했던 한전이 단숨에 적자로 돌아섰다. 이대로라면 전기료를 인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역사‧문화에 대한 정치분식이다. 정치집단이 국민에게 근거 없는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심거나, 특정사안에 대해 맹목적 호감이나 적대감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분식의 유형이다. 이를 통해서 대량학살, 고문, 노역과 강제이주와 같은 비인도적‧패륜적 행위를 정당화한다. 나찌의 유태인 학살(Holocaust), 아프리카 흑인노예, 크메르 루지의 킬링필드, 문화혁명 등이 그 예다. 

역사‧문화 분식은 민주주의가 성숙했다는 유럽에서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진행형이다. 좌파의 상용수법인 역사‧문화 분식은 작은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을 재구성해 성역화(聖域化)함으로써 시작된다. 비판자에게 혹독한 보복을 가한다. 사회 전체가 해당 문제에 대해 두려워서 침묵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헤게모니를 쥔다. 

유럽의 이슬람 회피(islamophobia) 사례를 보자. 유럽 좌파는 “기독교는 억압자의 종교, 이슬람은 피억압자의 종교다.” “이슬람과 무슬림을 비판하는 것은 종교차별이자 인종차별이다,” “약자는 강자를 공격하고 비판해도 되지만 강자에게는 그것이 허용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급기야 이슬람에 대한 언급 자체가 도덕적 죄악이 된다. 분위기 모르고 한 마디 하면 경을 친다. 무슬림 테러가 일어나도 언론이나 방송에서 비판보도가 일절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5‧18, 4‧3 등은 이제 성역화된 느낌이다. 비판은커녕 합리적 의심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비판자에게 무차별 공격과 욕설이 난사된다. ‘인간말종(?)’으로까지 폄하된다. 표현의 자유는 먼 나라 이야기다. 우파 성향의 인사가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 “넌 얘기할 자격 없어”라는 공세가 쏟아진다. 한국 좌파는 김씨 일가에 대해서도 북한 내부 논리로 이해해야(내재적 접근) 한다고 한다. 그게 ‘똘레랑스(관용)’란다. 그러나 우파에게는 단 1의 똘레랑스도 허용치 않는다.

영어에 “Too good to be true(믿기에는 지나치게 좋다)”라는 표현이 있다. 진실판별 도구로 꽤 적중률이 높다. “Too evil to be true(믿기에는 지나치게 악(惡)하다)”도 동전의 양면같은 표현이다. 곧 선거다. 후보자 본인에 관해 ‘지나치게 좋거나’ 경쟁후보에 대해 ‘지나치게 악한’ 스토리나 비판은 정치분식을 의심하라.

조전혁 전 인천대‧명지대 교수(제18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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