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은 1천년 로마제국의 숨통을 끊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후 발칸반도는 오스만투르크의 영역이 되었고 그리스는 400년의 투르크지배를 받게 되었다. 어쩌면 대서양을 통한 새로운 인도항로 개척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쌓은 사람이 평범할 수는 없다. 메흐메트 2세는 결코 대중의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성, 에너지, 단호함으로 존경을 받았다.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나무위키>. 히브리어 아랍어 등 6개 국어를 말할 수 있었고 특히 페르시아어로 시 쓰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냉정하고 어쩌면 냉혹했던 것 같다. 형제살해를 법제화한 것이다<오가사와라 히데유끼, 오스만제국>. 실제로 그는 즉위할 때 아기에 지나지 않았던 동생 아흐메드를 살해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조는 조카를 죽인 죄로, 광해군은 동생을 죽인 죄로수백년 동안 비난을 받아왔다.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술탄의 주장이었는데, 투르크는 이러한 논리를 수용한 것 같다. 정치의 영역을 왕가에 한정하고 그 안에서는 도덕적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치 자체가 지옥세계에 속하므로….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통해 성장한 국가라서 지휘체계의 일원화가 중요했고, 형제들끼리의 싸움으로 국가가 분열되기도 했다. 또 초기에는 형제들을 죽이고 술탄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 해도 이런 현상을 명문화하는 사람은 냉혹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복이냐 서서히 말릴 것인가?

  그는 알렉산더 대왕을 존경했고 정복에 대한 욕망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 무라드 2세가 비잔틴 제국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펼친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했고, 술탄이 되자 곧이어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재상 할릴파샤와 기득권층이 반대했다. 이 도시가 성벽과 바다로 에워싸여 있어 공략이 힘들며 서방의 십자군이 형성될 경우 오히려 오스만제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비잔틴 내부의 반(反) 로마 교황청 입장을 이용해서 십자군 결성을 막고, 꺼져가는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리자며 시간은 투르크 편이라 주장했다. 실제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부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있었다<마크 마조워, 발칸의 역사>. 또한 콘스탄티노플은 홍콩처럼 자유도시였다. 각국의 상인들이 그들의 교회, 시나고그, 모스크에서 자유롭게 종교행위를 할 수 있었고, 이들로 인해 상업은 번영을 누렸다. 할릴 파샤 등 투르크인들도 많은 이익을 누리고 있었다<시오노나나미, 바다의 도시 이야기 하>.  

  반면에 메흐메트 2세는 즉각적인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주장했고, 기독교 소년에서 징집된 데브시르메 관료집단이 술탄을 지지했다. 콘스탄티노플은 향신료 교역과 맞먹을 만큼 거대한 시장인 흑해무역의 중계기지였다. 우크라이나의 밀과 북방의 목재, 모피 등을 수입할 수 있고, 서유럽의 철, 갑옷, 견직물, 의류 등을 흑해 지역에 팔수 있어<안재성의 금전사>,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었다. 또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면 아시아와 유럽이 실질적으로 통합되고 군대 이동이 훨씬 수월해져서 상비군을 줄여도, 방어와 공격이 가능해진다. 국방 및 행정 부담이 줄어든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은 향후 오스만제국의 경제적 군사적 성장 발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이 꺼져가는 불씨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세력에 의해 언제 다시 큰불로 번질지 모른다. 또 영악한 비잔틴 황궁은 투르크 왕위계승 탈락자의 망명을 받아줌으로써 투르크 측의 내분을 유도하기도 했다. 암세포는 빨리 없애야 한다.
  이렇게 양쪽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전쟁의 구실을 제공했다. 당시 술탄위 계승 과정에서 밀려나 비잔틴 제국에 망명 와 있었던 오스만 왕족 오르한의 숙식제공 등 비용을 메흐메트 2세에게 증액 요구한 것이다. 볼모를 이용한 일종의 협박으로 비쳐 할릴 파샤측이 콘스탄티노플 원정을 반대할 명분이 사라져 버렸다<에드워드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천연의 요새, 우르반 거포와 종교적 위무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군사적, 경제적 요충인 만큼 천연의 요새였다. 북쪽은 수백 년간 보강되어온 돌로 만든 성이고 성벽 앞에는 깊은 해자가 파여 있었다. 또한 뾰족 튀어나온 반도부분은 바다로 둘러싸여있어 외부세력의 접근이 힘들었다. 보통 공성전은 공격 측이 수비 병력의 3배 이상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같은 요새의 경우 10배의 병력으로도 점령하기 힘들었다. 공격포인트도 수비측이 이미 예상한 몇 곳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전우의 시체를 밟고 앞으로 나아가는 단순무식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지루한 공방전에서 막대한 병력손실을 각오해야하고, 보급을 충분히 하고 사기를 계속 유지하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메흐메트 2세는 첫 단계 포석으로 보스포르스 해협의 가장 좁은 지점의 유럽측 연안에 요새를 건설했다. 아시아 쪽은 증조부인 바예지드 1세 때 세워진 아나톨리아 요새가 있어 유럽측 요새의 건설로 보스포러스 해협의 통제가 완벽해졌다. 적 함대가 해협을 봉쇄하여 아시아 측과 분리하지 못하게 사전 조치를 한 것이다. 
  그리고 헝가리 기술자 우르반에게 거대한 대포를 만들게 했다. 이 거포는 하루에 7번 정도 발사할 수 있었는데, 열에 달궈진 포신이 폭발해서 병사들이 다치기도 했지만, 발사 후 포신에 기름을 바르며 폭발위험을 예방하기도 했다<에드워드 기번>. 대포공격으로 성벽이 바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지만 성벽에 손상을 주고 흔들리게 함으로써 심리적 압박을 줬다. 
  땅굴을 파서 성안으로 진입하려 했으나 비잔틴측 기술자들에게 미리 발견되어 저지되었고, 해자를 메우고 쳐들어갔으나 투르크군이 공세를 멈춘 사이 비잔틴군은 해자를 원상복구 시켰다. 
  이런 지루한 공방전이 수십일 동안 진행되었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진 듯 했다. 공격을 하는 투르크 측에서도 진전이 없자 전쟁 회의론이 제기되어, 재상인 찬다를르 할릴 파샤는 공방전 도중에 여러 번 포위를 풀고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나무위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이때 수도사 악셈세틴이 정신적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공성전 중에 예언자 무하마드의 친구로서 7세기의 콘스탄티노플공세 때 순교한 ‘아유브의 묘’를 발견했다고 홍보하고 ‘코란’이 도시의 함락을 예언했다며 오스만 군의 사기를 북돋웠다. 악셈세틴과 수많은 수도승들은 각 부대를 순회하며 순교의욕을 고취시켰다<오가사와라 히데유끼, 오스만제국>. 종교적인 행위가 불확실한 전쟁 상황에서 용기와 미래 확신감을 심어 준 듯하다. 

  술탄의 혁신: 지상으로 함대 이동

  술탄의 혁신도 투르크군의 사기 진작에 한 몫을 했다. 이 도시의 항구가 있는 ‘골든혼 만’에 투르크 함대가 나타난 것이다. 골든혼은 보스포르스 해협과 통하는 입구가 쇠사슬로 봉쇄되어 투르크 함대가 진입할 수 없었다. 제네바 함대가 왔을 때도 보스포르스 해협에서 투르크 함대가 저지하려 했으나 순식간에 골든 혼 게이트를 열고 제네바함대를 들이고 나서 이 게이트를 쇠사슬로 봉쇄했다. 투르크 함대는 닭 쫒던 개처럼 골든 혼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메흐메트 술탄은 보스포르스 해협에서 골든 혼까지 2km의 언덕과 들판을 가로질러 77척의 투르크 함대를 이동 시킨 것이다. 밤새 이루어진 일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경악을 했고, 투르크 군에게는 한걸음씩 도시의 정복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방어측의 사기는 떨어졌고 안 그래도 열세인 병력이 골든혼 만과 성벽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술탄은 화끈한 인센티브 정책을 제시했다. “저 도시와 건물들은 짐의 것이지만, 포로와 전리품, 금은보화와 미인은 그대들의 것이며, 콘스탄티누스 성벽을 가장 먼저 오른 병사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비옥한 지역의 통치권을 주겠다<에드워드 기번>.”고 약속했다. 투르크 군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개기월식과 도시의 함락

  5월 24일의 개기월식은 도시가 패망할 흉조로 여겨져 주민들을 불안하게 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첫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은 이름의 황제가 다스릴 때 멸망한다는 전설도 퍼졌는데, 당시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11세였다. 비잔틴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메흐메트2세는 미신이 먹히던 시대였던 만큼 점성술을 이용해서 5월29일을 D-day로 잡았다. 날이 밝자 투르크군은 바다와 육지에서 일제히 도시를 공격했다. 제노바의 용병대장 줄리아니 주스티니아니 장군이 부상을 당해 후송되자 제노바 용병들의 전열이 무너져버렸다.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예니체리들이 물밀듯이 외성벽을 치고 들어와 성벽 탑에 오스만 제국의 깃발을 꽂는 데 성공했다. 

  국제정치는 냉정, 이기는 쪽에 줄을 선다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11세의 용맹과 솔선수범이 빛을 발하기도 했다. 황제 자신이 전투 중에 죽었고 비잔틴의 수비군도 거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웠다. 다만 7천명 대 15만 명이라는 힘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기독교 세계의 도움은 거의 없었다. 교황 니콜라오 5세는 동서교회 통합에 반대하는 비잔틴의 완고함에 분노하고 있었고<에드워드기번>,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패한 이후 십자군 결성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는 헝가리군도 대패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100년 전쟁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고, 스페인은 무슬림과의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있었으며 이탈리아와 독일의 군주들도 내부 분란으로 지원할 여유가 없었다. 투르크와 경제적 이해관계가 많았던 베네치아는 눈치를 보며 군사원조를 하지 않았다. 헝가리의 사절은 투르크 진영에서 술탄의 근심을 없애주고 작전에 대한 조언까지 했다고 한다<에드워드 기번>.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보며 20세기 초 조선의 몰락을 생각하게 된다. 외세의 도움으로 독립을 유지하려 했지만 자신의 힘이 없으면 아무도 돕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국제정치는 냉정하다.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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