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호의(好意)’로 포장하는 핵실험장 폐기...석연치 못한 구석들 많아
북핵 검증자료들의 보고(寶庫) 폐기되면 사후 검증 영구 불가능해져
핵실험장 건설 과정 인권유린 증거물들도 매몰될 것...
韓美정부, 핵실험장 폐기 과정 치밀하게 점검해야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실무접촉이 이어지면서 양쪽에서 각자의 선물보따리들을 조금씩 풀기도 하고 상대방의 양보를 유도하기 위한 샅바 싸움도 벌인다. 북한은 한미 공군이 실시하고 있는 맥스선더(Max Thunder) 연합훈련을 시비하면서 5월 16일 예정되었던 남북 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훈련이 시작된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회담을 제안했던 북한이 몇 시간도 못가 연기하자고 한 것을 보면 ‘북침연습’ 운운은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리비아식 핵폐기를 요구하더니만 화생(化生)무기 폐기와 인권개선까지 요구하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러다가는 완전히 발가벗기는 것이 아니냐고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5월 22일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대변자가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미국과 북한 모두가 대화의 틀을 깨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워싱턴이 원하는 방식으로 핵을 폐기하면 ‘북한을 정상국가로 대접하고 주민들이 고깃국을 먹도록 해주겠다“는 미국의 덕담에 대해 북한은 억류 중이던 미국 국적의 한국인 세 명을 석방하고 23일에서 25일 사이에 풍계리의 핵실험장을 폐기하겠다고 했고 이어서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에 가입할 의사도 내비쳤다. 북한으로서는 이제 와서 판을 깨기에는 너무 많이 왔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진정성을 가진 핵폐기를 위해서든 또는 또 한번의 시간벌기 기만극을 위해서든 이미 놓여진 대화의 ’판‘ 위에서 무언가를 해보려 할 것 같다.

하지만, 북한이 ‘호의(好意)’로 포장하고 있는 핵실험장 폐기에는 석연치 못한 구석들이 있다. 북한은 통신·방송기자 8명을 포함한 외국 언론인들을 초청하여 폐기 현장을 참관토록 하겠다고 했다. 일단 환영할 일이다. 원산에 프레스센터를 설치하고 전용기로 외국인 기자들을 베이징에서 원산까지 실어 나르겠다고 한 것은 나름 합당한 조치로 보인다. 원산에 여객기가 착륙할 시설이 있다는 점이 공식 이유이겠지만, 제재 해제를 염두에 두고 관광지 조성 사업이 한창인 원산-갈마 지역을 홍보하겠다는 의도도 담겨있을 수 있다. 그래도 무방하다. 더 이상 핵실험장으로 사용하기 어렵다는 물리적 여건이 자진 폐쇄의 이유일 수도 있다. 수폭 실험으로 핵실험장 내부가 붕괴되어 추가적 사용이 어려워졌을 수 있고, 수십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김책, 화대, 화성, 명천 등 도시들이 있어 방사능 오염이 문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중국 국경과 10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점이나 130km 거리에 있는 백두산의 화산 폭발을 유발할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경고가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이 또한 문제가 아니다. 더 이상 핵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텔레비전에 나와서 평양정권이 하는 일마다 칭송을 쏟아내는 일부 전문가들과는 달리, 다른 일단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전문가들을 배제한 채 언론인들만을 초청하여 폐쇄와 동결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서둘러 현장을 폐기하는 것에 대해 일말의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입장은 핵실험장 폐쇄를 환영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핵폐기로 가는 과정이어야 하며 북한이 2008년에 연출했던 5MW 원자로의 냉각탑 폭파와 같은 정치쇼에 그쳐서는 안 됨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풍계리 핵실험장은 수많은 비밀이 묻혀있는 곳이다. 그토록 방대한 지하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어디서 어떤 인력을 동원하여 얼마 동안 공사를 진행했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다. 인근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공사를 진행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당장 확인할 길은 없다. 핵실험장은 어떤 핵물질을 사용하여 어떤 핵무기를 만들었는지를 추적할 수 있는 증거물들이 쌓여 있는 북핵 검증자료들의 보고(寶庫)이며, 인근 지역의 방사능 오염 여부와 피해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시료들도 수두룩할 것이다. 핵폭발이 방출하는 방사능 물질은 세슘, 요드, 제논, 스트론튬 등 수백 가지에 이른다. 이런 물질들이 식수를 통해 몸에 들어오면 폐암, 갑상선암, 백혈병, 골수암, 불임증 등 각종 불치병을 유발하며, 배설이나 목욕으로 배출되지 않기 때문에 극소량이 체내에 축적되더라도 장기간 악영향을 미친다.

현 시점에서 풍계리 핵실험장이 폐기되고 접근이 불가능해지면, 핵실험 현장 사찰을 통해 핵무기 개발과정이나 핵오염에 대한 사후 검증을 실시하는 것은 영구히 불가능해질 것이며, 핵실험장 건설 과정에서 저질러 졌을 지도 모르는 인권유린의 증거물들도 매몰될 것이다. 이런 것이 북한이 대미 핵협상을 앞둔 시점에 전문가들을 배제한 채 서둘러 핵실험장을 폐기하려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에게는 새로운 미북 간 이후에도 여전히 숨기고 싶은 것이 많다는 의미이며, 이는 북한이 ‘완전한 핵폐기’를 약속하더라도 실제로 완전한 핵폐기가 되지 못할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핵실험장 폐기가 축포를 쏘고 박수를 치는 축하행사로 그쳐서는 곤란하다. 한미 정부와 관련자들은 이런 관전 포인트를 가지고 핵실험장 폐기 과정을 치밀하게 점검해야 할 것이며, 북한 역시 국제사회가 가진 이런 정당한 의심들을 불식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前 통일연구원장·前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