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을 쌓아 올린 힘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얼마 전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실 비서관이 형기를 다 채우고 출소했다는 소식에 ‘아,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나’ 하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지금 나오지만, 감옥이 저 안인지 밖인지 모르겠다”는 얘기가 제 가슴에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전직 대통령 두 분이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나온 얘기라서 속이 더욱 쓰렸습니다.

작년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희곡 <박정희의 길>을 펴냈습니다. 이어 그 희곡으로 영창극(詠唱劇)을 만들어 공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인심이 바뀌었음을 절감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부친의 명성에 영향을 끼친 것이죠. 자금을 얻기도 힘들었지만, 공연에 필요한 사람들을 구하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관객들도 예상보다 적었습니다.

지난 2월 27일엔 마지막 공연을 했습니다. 공연 전에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가까이서 모신 분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지막 공연이니, 유족에게 알리는 것이 도리인데, 박근혜 대통령께선 처지가 저러시고, 다른 유족들에겐 알릴 길이 없습니다.” 며칠 뒤 그 분이 제게 알려왔습니다, “유족이 공연장에 나오겠다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날 박 대통령에 대한 구형이 있었습니다. 연락을 맡은 분이 제게 말했습니다, “유족이 가슴이 아파 도저히 공연장에 나올 수 없으니, 미안하단 얘기를 전해 달라 했습니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행적을 따라가는 사이, 제 마음 한구석엔 박근혜 대통령의 수의 입은 모습이 자꾸 어른거렸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거듭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다 이 지경이 됐나?”

연전에 새누리당의 정체성을 새로 규정하는 과정에서 ‘보수 정당’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보수’라는 말이 매력적이 아니니, 그 말을 빼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때 박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복 선생님의 <보수는 무엇을 보수하는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날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은 보수 정당’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저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원래 저는 박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저는 이념을 지키는 일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저는 ‘보수의 몰락’이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내세운 “이념을 넘어서 실용으로”라는 구호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해왔습니다. 좌파 정권 10년에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위태로워졌는데, 평생을 ‘이념적 무임승차자’로 살아온 지도자가 나왔다고 진단했습니다.

박 대통령에 대해선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건 것을 비판했습니다. ‘경제민주화’는 원래 19세기에 영국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이룰 사회의 경제적 모습을 표현한 개념이었습니다. 비록 헌법에 들어간 문구고, 이젠 긴 세월이 지나서 내용이 덜 극단적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 개념은 자신의 영원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저는 지적했습니다. 자연히, 박 대통령이 ‘보수 정당’을 천명한 것은 ‘기쁜 놀람’이었습니다.

‘최순실 추문’이 터지자, 문득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철이 든 뒤로 민심이 바뀌는 것을 숱하게 보았지만, 이번처럼 급격하게 바뀐 적은 없었습니다. 뜻밖의 인물이 대통령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인식이 퍼지자, 시민들이 박 대통령을 더는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박 대통령이 도덕적 권위를 잃은 것이었죠. 지도자가 도덕적 권위를 잃으면, 지도자로서 기능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도덕적 권위를 잃은 것이 문제의 본질이니, 옳은 처방은 대통령이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처방을 실제로 적용할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박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가장 큰 이익을 선뜻 버려야, 조금이라도 도덕적 권위를 되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사정이었습니다. 만일 시위가 더 거세지면, 그때는 스스로 물러나는 ‘하야’가 아니라 시위대에 밀려나는 ‘축출’이 될 터였습니다. 그렇게 물러나면, 현 정권이 사태를 통제할 수 없게 될 터였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글로 썼습니다. 박 대통령이 권위를 잃어서 실질적 궐위기(闕位期)가 나왔으니,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논지였죠. 이어 자신이 대통령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서 박 대통령이 하야하면, 그런 자기 희생은 그 분의 도덕적 권위를 상당히 회복시키리라는 점을 얘기했습니다.

제 글은 2016년 11월 4일자 ‘한국경제신문’에 <도덕적 권위의 회복에 이르는 길>이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33매나 되는 글이라서 신문 한 면을 다 차지했는데, 신문사의 배려로 실릴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지방의 독자 한 분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분인데, “선생님 글을 출사표 읽는 심정으로 두 번 읽었습니다”라고 처연하게 말했습니다.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충신이 아니다’라고 한 그 출사표에 비겼으니, 물론 외교적 언사이었겠지만, 큰 칭찬이었습니다. “머뭇거리다 시기를 놓치면, 스스로 물러나는 ‘하야’가 아니라 시위대에게 쫓겨나는 ‘축출’이 된다”는 얘기를 글에 넣을 수 없어서 에둘러 얘기했던 터라, 그 분의 칭찬은 정말로 반가웠습니다.

그 날 박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사과했습니다. 스스로 결단을 내려서 하야할 기회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위기에 몰린 지도자가 사과하면, 으레 더 큰 위기로 몰립니다. 사과는 지도자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려서, 군중으로 하여금 피 냄새를 맡도록 합니다. 실제로, 노동조합 깃발들을 들고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에게 박 대통령의 사과는 ‘애피타이저’였습니다.

위기에 몰린 지도자는 국민들의 예상보다 한 걸음 앞서야 합니다. 바로 우남 이승만과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이 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두 위대한 지도자들이 사과나 변명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는 사실은 곰곰 음미할 일입니다.

우남은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라고 하야의 뜻을 밝힌 다음 국민들이 요구한다고 보고받은 네 가지 사항들을 선선히 수락했습니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 번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할 것이다.”

우남은 ‘나는 상대 후보가 급서해서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실질적으로 당선되었다. 나로선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공정한 선거를 해서 내 당선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 실제로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지도록 하라고 내각을 독려했다’라는 당연한 해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본질이 자신들이 지지한 지도자가 도덕적 권위를 잃은 것이니,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먼저 도덕적 성찰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는 대뜸 선거공학적 처방을 내놓았습니다. 모두 “국회에서 탄핵 과정을 밟아 시간을 벌어서 반기문 국제연합 사무총장이 임기 마치고 돌아와 우파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도록 하자”고 외쳤습니다. 도덕적 차원의 문제를 법적 차원의 문제로 만든 것입니다.

저는 우파 지식인들이 그렇게 행동한 근본 원인은 도덕심의 부족이라 생각합니다. 도덕심이 부족하니, 지식인의 충성심이 궁극적으로 향해야 할 이념을 쉽게 잊은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이념을 굳게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다음 지도자를 뽑으려 하지 않고, 당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 가운데 좌파가 아닌 사람을 고르다 보니 반기문이란 인물이 보인 것이죠.

그렇게 선거공학에 매달려 이념을 잊으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방향 감각을 잃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함께 몰락한 과정은 이 점을 괴롭게 보여줍니다. 그 분들은 서로 다투느라 이념을 달리하는 세력이. 즉 ‘진정한 적’이, 자신들을 에워싸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보수의 근본적 문제는 그처럼 도덕적 성찰이 부족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위기가 나올 때마다, 도덕적 성찰을 생략한 채, 선거공학적 수준의 처방을 찾습니다. 그래서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선거공학적 능력이 월등한 좌파가 파놓은 함정으로 뛰어듭니다.

프랑스 사상가 쥘리앙 방다(Julien Benda)의 말대로, 전체주의자들은 결코 갖출 수 없고 자유주의자들만이 갖출 수 있는 자산이 바로 도덕입니다. 이 큰 자산을 쓰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선동선전과 선거공학에 월등한 좌파에 제대로 맞설 수 있나요?

결국 국회는 탄핵 소추를 단숨에 의결했습니다. 허망하게도, 새누리당 의원들의 상당수가 소추에 찬성했습니다. 반기문 총장이 ‘환상 속의 인물’이었음이 드러나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바람에 우파는 선거 운동을 할 시간만 잃었습니다. 반 총장의 약점을 알고서 함정을 파놓은 좌파 전략가들에게 걸려든 셈이죠.

반기문 총장은 훌륭한 인물이지만, 한 개인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거는 것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부도덕합니다. 보수 정권이 도덕적 권위를 잃었으면, 먼저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아무리 더디더라도, 그렇게 해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 노력 없이 구세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도덕적 타락입니다. 지금 분열되어 방향을 잃고 헤매는 보수 정당들이 그 점을 괴롭게 일깨워줍니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헌재의 심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저는 여섯 가지 사유를 들어 헌재의 심리가 무효 심리(mistrial)를 구성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헌재가 무효 심리를 선언해서 정치권이 정치적 해결을 할 기회를 제공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무효 심리를 구성한 사유들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은 헌재 주심 재판관의 ‘탄핵 심판은 형사 재판이 아니다’라는 발언이었습니다. ‘탄핵’의 사전적 뜻은 “입법부가 공무원에 대해 제기하는 형사 소송(a criminal proceeding instituted against a public official by a legislative body)”입니다.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 탄핵한다는 우리 헌법 규정에서 탄핵이 형사 소송임이 분명해집니다. 미국의 경우, 헌법은 탄핵의 대상을 공무원들의 “반역죄, 수뢰죄, 또는 다른 중죄들이나 경죄들(Treason, Bribery, or other High Crimes and Misdemeanors)”이라고 죄목들을 열거했습니다. 14세기부터 탄핵 제도를 시행해온 영국에선 모든 사람들의 모든 범죄들을 다룹니다.

물론 탄핵 심판은 일반 형사 재판과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탄핵 심판이 형사 재판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일반 형사 재판과는 다른 특수한 형사 재판입니다.

이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견해를 밝힌 주심 재판관은 “탄핵 심판은 일반 형사 재판과 다르므로, 형사소송 절차를 엄격히 따르지 않고 민사소송 절차도 준용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런 결정은 사리에 어긋납니다. 탄핵은 형사소송이므로, 탄핵 심판은 형사소송 절차를 엄격히 따라야 합니다. 헌법재판소법도 헌재의 재판은 민사소송 법령을 준용하되, “탄핵 심판의 경우에는 형사소송에 관한 법령을 준용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탄핵 심판은 일반 형사소송 절차를 따라 진행됩니다.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형사소송에선 국가가 자신의 절대적 권력으로 피고인의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하려 시도합니다. 이런 힘의 비대칭에서 나오는 인권의 침해를 막기 위해서, 형사소송의 피고인에겐 민사소송의 피고보다 훨씬 너른 권리들이 허용됩니다.

여기서 탄핵 심판의 성격에 관해서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을 편 주심재판관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그는 형사소송 절차에 따라 박 대통령에게 허여될 법적 특권들을 주지 않으려고 헌법재판소법의 명시적 규정을 어기면서 민사소송 절차를 선택적으로 따랐고, 그런 조치를 정당화하려고 탄핵 심판이 형사재판이 아니라고 사전에 강조한 것입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당연히 누려야 할 형사소송법상의 특권들을 박탈당했습니다.

제 글은 2017년 1월 26일자 ‘조선일보’에 <소추안 오류 인정한 국회가 대통령 탄핵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제가 30년 동안 쓴 논설들 가운데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헌재의 판결은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청와대를 떠나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쉽게도, 헌재가 탄핵을 인용한 날 박 대통령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을 보였습니다. 탄핵을 당했으면, 한시라도 빨리 청와대를 나와야 하는데, 거기서 밤을 지냈습니다.

작은 반전이라도 기대했던 마지막 기회가 사라지자, 뜻밖에도 큰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반전에 성공한 박 대통령의 모습을 그린 짧은 대체 역사 (alternate history)를 썼습니다. 대체 역사는 어떤 사건의 결말이 실재와 달리 나서, 새로운 세계가 나오는 모습을 그린 소설입니다. 철학자들은 반사실(counterfactual)이라 부릅니다.

제가 쓴 대체 역사에선, 탄핵이 결정되자, 박 대통령이 곧바로 핸드백 하나 들고 청와대를 걸어나옵니다. 그리고 청와대 앞 구멍가게에 들러서 주인에게 ‘시위 때문에 장사를 망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인사한 다음 라면과 같은 일용품들을 삽니다. 청와대를 떠난 차는 예상과 달리 강남의 자택이 아니라 경부고속도로로 향합니다. 급히 따라 나선 방송 기자들은 ‘구미로 가는가 보다’ 했지만, 차는 옥천으로 향합니다. 박 대통령은 ‘구미로 가면, 정치적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꼽으면서, 옥천은 자기를 키워준 외할머니의 고향이라고 기자들에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옥천 시내 허름한 여관에 자리잡고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런 박 대통령의 모습에 국민들도 호의적이 되고 보수 정당들은 한데 합쳐 선거에 임합니다.

소설이라 분량이 꽤 많았는데, ‘동아일보’는 삽화까지 넣어서 실어주었습니다. 2017년 3월 17일자에 <그날, 갑자기 경부고속도로 방향을 튼 대통령>이란 제목을 달고 나왔죠. “이렇게만 했어도…” 하는 독자들의 탄식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박 대통령은 형사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 재판 과정은 논설의 대상이 아니어서, 저는 더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박정희 대통령 100주년 기념 공연에 힘을 쏟았습니다. 어두운 시대상을 반영하듯, 박정희 대통령을 기념하는 행사들은 모조리 취소되거나 좌절되었지만, 4회에 걸친 제 공연은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자금이 넉넉지 못해서 많이 생략된 공연을 따라가면서 아쉬워지는 마음을 그런 자부심이 달래주었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스크린에 자막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대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위대함을 이루고

어떤 사람들은

위대함을 떠안는다.”

나라가 갈 길을 개척함으로써

가난한 집안의 아들

박정희는

스스로 위대함을 이루었다.

앞 절은 셰익스피어의 얘기입니다. 다음 절은 저의 얘기입니다. “나라가 갈 길을 개척함으로써”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우리를 본받아 경제 발전의 길로 들어서서 잘살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은 한반도를 넘어 온 세계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그것이 그 분에 대한 궁극적 평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며칠 전 펜앤드마이크에서 주최한 ‘청춘콘서트’가 열렸습니다. 50세 미만으로 제한해서, 저는 참가 자격이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면서, 퍽이나 흐뭇했습니다. 삶은 미래로 향합니다.]

인공 사회 (artificial society)의 진화에서 얻는 교훈

인공 지능(AI)이 발전하면서, 사회의 모든 부면들에서 근본적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런 변화들이 보편적이고 지속적이므로, 실은 가속되므로, 우리는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기 어렵다. 그래서 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AI를 인식하게 된다. 특히 AI가 생산에 참여하면서 나오는 영향들에, 특히 실업 문제에, 마음을 쓰게 된다.

상대적으로 우리 눈에 덜 뜨이는 AI의 활약들 가운데 하나는 컴퓨터 프로그램들을 이용한 연구인 컴퓨터 시뮬레이션(computer simulation)이다. 이 방법은 수학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사회 현상들을 연구하는 데 특히 적합하다.

수학은 서로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을 다루기 어렵다. 이른바 ‘다수 문제(n-body problem)’다. 그래서 서로 영향을 미치는 다수가 움직이는 모습을 설명하는 수학 모형들은, 예컨대 한 국가의 경제 모형은, 그런 상호 작용들이 없다고 가정해서 이 문제를 우회한다. 그런 모형은 쓸모가 많고 보통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영향이 큰 경우엔 그런 수학 모형은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이런 한계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현실적 상황을 만들어서 관찰할 수 있다. 경제의 수학 모형에선 공황과 같은 파국이 좀처럼 나오지 않지만,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선 주기적으로 그런 파국이 나온다. 사회적 동물들은 ‘무리 본능(herd instinct)’을 지녀서 한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경제 공황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무리 본능에서 나온 현상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교훈적인 것은 1970년대 말엽에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가 ‘죄수의 양난(Prisoner’s Dilemma)’이라는 널리 알려진 ‘2인 비영합경기(two-person non-zero-sum game)’를 이용해서 한 실험이다. ‘죄수의 양난’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 상대와 협력할까 배신할까 결정해야 하는 경기다. 문제는 상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배신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이다.

배신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철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좌절했다. 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이 전체주의적 처방을 내렸다. 개인들이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하면, 이 세상은 배신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된다는 얘기였다.

액설로드는 장기간에 걸쳐 프로그램들이 만나서 작용하는 반복적 경기를 만들었다. 이것은 현실에 맞는 조건이었다.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들은 개체들 사이의 관계가 지속적이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반복적 경기 상황에서 가장 성공한 프로그램은 ‘되갚기(TIT-FOR-TAT)’라는 간단한 프로그램이다. 그것의 전략도 아주 간명해서, ‘일단 협력하고, 다음엔 상대가 하는 대로 한다’다. 즉 먼저 배신하지 않고 협력하되, 배신한 상대는 철저하게 응징한다는 것이다.

‘되갚기’는 도덕적 프로그램이다. 남을 해치지도 않고 남에게 거듭 속지도 않는다. 그래서 협력적인 프로그램들과 꾸준히 협력해서 이익을 얻는다. 반면에, 배신하는 프로그램은 당장엔 상당한 이익을 보지만, 장기적으로는 다른 프로그램들이 외면해서 큰 손해를 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컴퓨터 속의 사회에선 ‘되갚기’와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많아졌다. 사회가 진화해서 도덕적 개체들이 많아진 것이다.

이처럼 경기 이론(game theory)을 이용해서 생태계의 진화를 연구하는 학문은 진화적 경기 이론(evolutionary game theory)이라 불린다. 흥미로운 것은 경기의 조건들을 현실적으로 만들수록 도덕적인 프로그램들이 번창한다는 사실이다. 이것보다 더 자유주의자들을 고무시키는 ‘증거’도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주의 프로그램이 제대로 실행된 적이 없었다’는 미제스의 지적을 떠올리게 된다. 개인들이 자유롭게 교류하게 되면, 더 도덕적인 사회가 나오고, 당연히, 구성원들이 더 잘 살게 된다. 사회적 문제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시장에 너무 많이 맡겨서가 아니라 덜 맡겨서 나온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하므로, 모든 생명체들은 자기 이익을 찾는다. 그러나 자기 이익을 키우려면,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야 한다. 즉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컴퓨터 속의 인공 사회에서 사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되갚기’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비록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없고 물론 감정도 없지만, 그 행동 양식은 사람의 행동 양식과 아주 비슷하다. 그것은 협력적 태도가 자연 선택을 통해서 사회에 퍼지고 사회를 발전시킨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기주의에 바탕을 둔 이타적 행위들은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라 불린다. 그것이 바로 인류 문명을 쌓아 올린 힘이다.

오랫동안 그렇게 상호적 이타주의를 실행하면서, 사람은 도덕적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낯선 사람들끼리도 자연스럽게 믿고 협력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천성이 된 도덕적 감정에, 우리가 양심이라 불리는 것에, 시달린다.

이처럼 도덕은 당사자에게 이롭고 사회 전체에 이롭다. 도덕적으로 사는 길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남에게 하라 (Do to others as you would be done by)”는 가르침은 흔히 ‘황금률(golden rule)’이라 불린다. 물론 이 가르침은 성경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의 한 구절인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Therefore all things whatsoever ye would that men should do to you, do ye even so to them)”가 속화된 것이다. 이 가르침이 황금률이라 불려온 것은 그것이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잘 드러냈기 때문일 터이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모든 처세술의 기법들이 그 속에 녹아 있다

어짐(仁)에 관해서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 (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한 공자의 말씀도 뜻이 같다. 황금률은 원칙의 보편적 형태를 드러냈고, 공자 말씀은 원칙의 실천적 지침을 제시했다. 무엇을 하기보다는 하지 않는 것이 훨씬 쉬우므로, 황금률보다는 공자 말씀이 따르기가 쉽다.

<협력의 진화(The Evolution of Cooperation)>에서 액설로드는 자신의 개척적 실험에서 얻은 통찰들을 개인들을 위한 조언들로 바꾸었다.

시기하지 마라. (Don’t be envious.)

협력 관계에서 먼저 탈퇴하지 마라. (Don’t be the first to defect.)

협력과 탈퇴 모두 그대로 해주어라. (Reciprocate both cooperation and defection.)

너무 약게 행동하지 마라. (Don’t be too clever.)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작가,평론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