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현대차 GV80을 구매하려던 소비자 H씨는 ‘30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판매 사원의 말에 장기렌트카로 눈길을 돌려 테슬라를 선택했다. 신차 출고가 1년 이상 밀리는 데다, 자동차 가격이 급등하면서 장기렌트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 들어 온라인으로 차량을 장기 대여할 수 있는 서비스까지 등장해 선택의 폭이 넓다는 점도 H씨가 장기렌트카로 눈길을 돌린 이유로 꼽히고 있다. 이런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신차 출고 지연 없이 원하는 차량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자들의 호응이 높아가고 있다.

현대차 백오더 물량이 100만대를 넘어서면서 인기 차종의 경우 30개월씩 기다려야 해, 소비자의 이탈이 늘고 있다. 사진은 인기 차종의 하나인 팰리세이드. [사진=현대자동차 공식 페이스북 캡처]
현대차 백오더 물량이 100만대를 넘어서면서 인기 차종의 경우 30개월씩 기다려야 해, 소비자의 이탈이 늘고 있다. 사진은 인기 차종의 하나인 팰리세이드. [사진=현대자동차 공식 페이스북 캡처]

'백오더(주문대기)' 100만대는 현대차 연간 판매량의 25.7%에 해당

이처럼 현대자동차가 고객들에게 주문을 받았지만 제때 생산하지 못한 '백오더(주문대기)' 차량이 100만대가 넘어서면서, 현대차 고객들의 이탈이 가속화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의 백오더 정체 현상은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현대차의 이 같은 백오더 물량은 지난해 현대차 연간 판매량(389만대)의 25.7%에 해당돼, 현대차 실적의 발목을 잡는 본질적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백오더 차량은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에 따른 미국 내 전기차 판매량 감소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파괴력이 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현대차가 백오더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진단이 제기된다. 하지만 3년째 계속되고 있는 백오더 문제에 별다른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차에 따르면, 백오더 물량은 내수가 67만 1000대, 수출 33만 2000대로 총 100만3000대에 달한다. 이 같은 대규모 백오더 물량이 발생한 이유는 글로벌 부품 공급망 불안 때문이라는 것이 현대차 측의 설명이다. 차량용 반도체와 연료탱크 부족, 코로나 중국 봉쇄 등이 백오더 물량이 쌓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현대차의 부품 수급난은 2020년부터 시작돼 3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2020년에는 와이어링 하네스를 제대로 조달하지 못해 심각한 생산차질을 빚은 바 있다. 전선 다발을 뜻하는 ‘와이어링 하네스’는 차 내부의 각종 전기장치에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혈관 역할을 맡는 부품이다. 원래 중국 내 2~3개 협력사로부터 와이어링 하네스를 공급 받았는데, 코로나19 확산으로 협력사들이 공장을 가동하지 못하자 현대차 생산라인이 조업을 멈춘 것이다.

차량용 반도체, 차량용 연료탱크 및 원재료 등 수급난이 백오더의 원인

2021년에는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으로 또 다시 백오더가 쌓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차량용 반도체 대신 컴퓨터나 휴대폰 반도체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현대차그룹의 차량용 반도체 조달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이 올해에도 지속되는 가운데, 기아차의 경우 차량 연료탱크 수급에도 문제가 생겨 전반적인 완성차 생산이 늦어지는 상황이다. 차량용 연료탱크를 공급하는 1차 협력업체가 납품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화물연대 파업으로 원재료까지 제때 공급받지 못했고, 악재가 더 겹쳤다는 진단이다.

이렇듯 부품 수급난이 이어지자, 역대 최악의 차량 출고 장기화가 지속되고 있다. 일부 인기 차종은 차량 출고 기간이 18개월 이상으로 길어져, 현대차그룹 고객 이탈 현상까지 빚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부품 공급난에 대해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의선 회장은 IRA 해결에 주력?...백오더 물량 증가는 현대차의 오래된 고객 이탈 초래

현대차 내부에서는 백오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로, ‘IRA 도입에 따른 미국내 전기차 판매 감소 현안에 더 치중하는 탓’이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현대차 정의선 회장은 지난 8월23일과 지난달 21일에 연이어 2차례 미국 출장길에 나섰다. 정 회장 출장에 대해 ‘IRA 대응이 주 목적’이라는 관측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IRA보다 백오더 문제 해결에 더 치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실정이다. IRA는 미국 정부와 연계된 사안이기 때문에, 민간 기업인 현대차 차원의 해법은 당장 나오기가 어렵다는 현실적인 계산에서다.

지난 8월 정의선 회장은 미국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관련 논의를 하기 위해 미국 출장길에 오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지난 8월 정의선 회장은 미국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관련 논의를 하기 위해 미국 출장길에 오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게다가 당장 백오더 물량이 증가하면서, 현대차 그룹의 오래된 고객이 이탈하고 있다는 점은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라는 점도 부각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현대차그룹이 미국에서 판매한 전기차 규모는 총 4만6300대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당장의 백오더 물량 100만3000대와 비교하면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IRA는 판매에 직접 타격을 준다는 점에서, 생산 차질로 인한 백오더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백오더 문제가 일부나마 해결된다면, IRA로 인한 손실분을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는 실정이다.

따라서 전문가들 가운데에는 IRA 문제 못지않게 백오더 물량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박철완 서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IRA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유예기간 등으로 당장 해법이 보이는 문제인 반면, 부품 수급난은 차량 생산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대체 부품을 찾거나 수급의 해법을 찾는 등 다각도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측은 ‘노조 특근’을 해결방안으로 제안, 노조는 ‘공급망 문제’라고 반박

하지만 100만대에 달하는 백오더 문제의 해결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는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공급망 대책으로 차량별 반도체 최적 배분과 대체 소자 개발 등에 나서겠다고 밝혔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공급망이 개선된 조짐은 없어 보인다. 이에 앞서 올 초에는 공급망 관리 전담 조직 신설과 협의체 신설 등도 내세웠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는 백오더 해결을 위한 임시 방편으로 ‘노조 특근’을 요청해 주목된다. 현대차 울산공장 노사기획팀은 최근 배포한 유인물에서 "당장 수급이 어려운 부품에 대해서는 결품 통과 후 후장착(리워크) 등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며 "확보된 부품으로 최대 생산 추진을 위해 라인별 단독 특근 등 탄력적 라인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조를 상대로 백오더를 줄이기 위해 유연근무가 답이라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차 노조는 사측의 유연근무 강화가 본질적인 해법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현대차 노조 관계자는 "이미 조합원들이 차량 생산을 늘리기 위해 특근도 하면서 적극 나서고 있다"며 "생산 차질의 원인을 노조의 근무시간으로 돌리고 있는데 진짜 문제는 차량용 반도체 같은 부품의 원활한 수급이다"고 지적했다. 사측이 부품 공급망 문제를 3년 동안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는데, 마치 노조가 생산에 적극 나서지 않아 대규모 백오더가 생긴 것처럼 주장한다고 본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3년째 반복되고 있는 공급망 문제가 전혀 개선되고 있지 않다”면서 “국내에서 제대로 조달이 안된다면 동남아 등지로 부품 공급처를 다변화해야 하는데, 현대차그룹이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해 고객들의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현대차 대신 수입차를 구입하는 고객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수입차를 구입한 한 소비자는 "현대차의 인기 차종은 18개월에서 24개월씩, 인기 차종은 30개월 이상 기다려야 하는데, 이 기간이면 새 모델이 나올 수도 있다"며 "1년 넘게 기다려야 살 수 있다면, 고객이 이탈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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