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칼럼] 그레고리오 12세의 양보와 교권통합
[김상규 칼럼] 그레고리오 12세의 양보와 교권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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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 전 조달청장
김상규 전 조달청장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의 교황들은 역사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분이 많았다. 그레고리오 1세는 로마 교황을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 동일한 수준으로 격상시켰고, 그레고리오 7세는 카노사성에서 황제의 무릎을 꿇게 했으며, 11세는 바빌론 유수를 청산하고 로마의 귀환을 이루어 냈다. 그레고리오 12세도 교회분열시기에 자신이 먼저 사임함으로써 서구교회 분열을 종식시켰다.
  1406년 11월 인노첸시오 7세가 로마에서 서거하자 아비뇽의 대립교황은 로마측 추기경들에게 교권통합을 위해 새 교황을 뽑지 말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로마측은 베네치아 출신의 안젤로를 그레고리오 12세 교황으로 선출했다. 새 교황을 뽑지 않으면 자연스레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13세가 교황이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단일화는 교황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로마와 아비뇽의 추기경들 세력 간의 대립이자 배후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익과 국민감정 등 복잡한 요인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레고리오 12세 교황은 선출될 당시 80세의 고령이어서 오래 재임하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다. 통합을 위해 고령으로 일찍 죽을 가능성이 높거나, 권력욕이 약해져서 언제든지 사임할 수 있는 사람을 골랐는지 모른다. 
  그레고리오 12세는 대립교황과 면담을 합의 했으나 회동직전에 결렬되었다. 교황끼리 어떻게 합의될지 불확실했으므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로마교황을 지지하던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가 반대했고, 추기경들도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며 심지어 그를 떠나겠다고 위협했다. 
  한편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도 프랑스와 추기경들의 반대에 휘둘리고 있었다. 1398년 프랑스 국왕의 사임요구를 거절하자 23명의 추기경중 18명이 떠나버린 일도 있었고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 아비뇽궁에 감금되기도 했으며, 프로방스로 도피하기도 했다. 베네딕토 13세가 프랑스의 국익에 반하는 결정을 하려했는지 모른다. 
  1408년 5월 4일 그레고리오 12세는 추기경들을 피렌체 근처의 루카에 모이도록 한 다음 자신의 허락 없이는 도시 밖을 나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더 이상 추기경을 뽑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조카 네 명을 추기경에 서임했다. 교황이 친위세력 강화를 통해 기존 추기경들과 맞서려한다고 생각한 추기경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기존 추기경들이 몰래 루카를 빠져나가 대립교황 베네딕토13세의 추기경들과 공의회 소집을 위한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두 교황을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새 교황을 선출하는데 합의했다. 배반한 추기경에는 후에 통합 교황 마르티노 5세가 되는 오도네 콜론나도 있었다. 

  양측 추기경들은 오래전부터 정보를 주고받으며 급변하는 정세에 협력해 왔던 것 같다. 양측 교황에 대한 퇴임 압력은 강해지고 있었다. 추기경들은 왕과 제후들, 신학자들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이 더 이상 교황들이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오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들의 교황을 그대로 따라가다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고, 이 고집 센 교황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통제하기도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가만히 앉아 당하기보다 선수를 쳐야겠다는 쿠데타 구상이 떠올랐고, 직접 자기들이 새 통합 교황을 뽑아서 정국을 주도해야겠다는 대담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양측의 추기경들은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해서 새 배로 옮겨 타기 시작했다.

  양 진영의 추기경들은 호소문 발표와 더불어 유럽의 제후들과 여러 고위성직자들에게 피사 공의회 참석을 요청했다. 두 명의 교황도 초청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파리, 옥스포드, 쾰른 대학교, 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저명한 의사들은 반란을 일으킨 추기경들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승인하고 대표단을 공의회에 보냈다. 1409년 3월 대주교 4명, 24명의 추기경, 80명의 주교, 수도원장과 대학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참석한 공의회에서 그레고리오 12세와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교회 분열, 이단, 위증, 스캔들의 죄목으로 퇴위결정하고, 신임 교황으로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아비뇽과 로마 교황이 공의회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아 3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교회통합이란 명분은 훌륭했지만 반란으로 시작된 공의회에 신은 좋은 결실을 주지 않은 것 같다. 사태가 더 악화된 것이다. 

  그레고리오 12세도 공의회를 소집하여 대립교황들인 베네딕토 13세와 알렉산데르 5세를 이교도와 위증자, 교회 파괴주의자로 선언했으나 무시되었다. 맞불을 놓기에는 참석자 등 호응이 너무 작았다. 상황은 급변해서 공의회 교황 알렉산데르 5세가 1년도 재임하지 못하고 다음 해에 사망했고, 그의 후임자로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선출되었다.
  3명의 교황이 대립하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황제 지기스문트의 요청으로 1414년 11월 5일 독일 콘스탄츠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가 교황을 폐위시키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참여자들이 세상을 움직여 간다는 느낌을 준 것 같다. 요한23세 대립교황을 비롯하여 22명의 추기경과 150명의 주교, 100명의 수도원장, 신학박사 300명, 대학대표14명, 왕자26명, 귀족140명, 사제 4000명이 참석하는 등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큰 공의회가 되었다. 주민 6천명의 콘스탄츠 고을은 5천명의 공의회 참가자와 하인, 비서들의 숙식을 제공했으며, 1,500명의 창녀들도 함께했다고 한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 5-2>. 
 회의 초기에 요한 23세 교황은 공의회를 주재하며 그레고리오12세와 베네디토 13세의 퇴위를 요구하였으나, 성직매매와 교황선출 이전의 스캔들로 이단자, 분열획책자 등 자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퇴위 선언을 하고 도주하였다. 그는 원래 선원이자 군인이었는데 교회분열과 개혁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교황사전, 카톨릭대학교 출판부>. 
  혼란에 빠진 공의회를 그레고리오 12세가 구원했다. 그레고리오 12세가 자신의 권위로 공의회를 다시 소집하고 1415년 7월 4일 본인의 사임을 선언한 것이다. 공의회가 그레고리오 12세의 임명 유효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서임한 모든 추기경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시키기로 동의하자 주변사람들도 찬성한 것 같다. 90의 고령이니 더 이상 권좌에 미련을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같은 고령인데도 대립교황 베네딕토13세는 끝까지 사임을 거부했으니 나이가 많아도 권력을 내려놓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의 권력 본능은 정말로 질기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교황의 사임이 90에 이른 노인의 결정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이른 것이다. 그레고리오 12세는 물러남으로써 서구교회 통합의 명예를 얻었고, 자신이 추기경으로 서임한 조카가 나중에 교황(에우제니오 4세)이 되는 길도 열었다. 남은 2년의 여생을 행복하게 보냈음은 물론이다. 
  공의회는 곧 이어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의 폐위도 선언하였다. 대립교황측 추기경들도 그를 떠나 공의회에 협조했다. 이로써 39년간의 기나긴 서구 교회분열은 종식되었다. 아비뇽 유수기간을 합치면 거의 110년의 혼란이었다. 
  사필귀정인데 왜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쳤는지 모르겠다. 팽팽한 진영대결과 철저한 손익계산, 족벌주의 그리고 내부반란으로 점철된 교회수치의 세월이었다. 이러한 적폐를 새로운 개혁정신으로 정리하며 통합하지 못하고, 모두가 지쳐서 마지못해 받아들인 통합이란 느낌이 든다. 신의 입장에서도 썩 마음에 들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린 게 아닐까. 
  대통령이 혼잣말처럼 한 발언이 정쟁과 진영대결로 비화하고 있다. 더 이상 정쟁이 확대되지 않았으면 한다. 외교적 문제로 증폭되지 않을까 고민했는지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진실과 양보가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오 12세의 예를 보더라도 조그만 희생에도 신은 응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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