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4일부터 시작될 올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이 부적절한 이유로 주요 기업 총수 등을 불러내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150여명의 기업인들이 증인·참고인 명단에 검토되고 있다는 것이다.

각 상임위에서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간사가 증인·참고인 명단에 올려놓고 협상중인 사안 중 논란이 되는 것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칩4)’ 등과 관련된 기업인을 불러내는 문제이다.

민주당 외통위서 ‘칩4’와 ‘인플레 감축법’ 영향과 피해 따지려고 4대 그룹 총수 증인 검토

22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윤재옥 위원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무관함. [사진=연합뉴스]
22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윤재옥 위원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무관함. [사진=연합뉴스]

민주당은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칩4(미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관련 기업의 영향과 피해를 따지겠다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를 증인 신청 명단에 올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기업 총수의 국감 증인 신청 등은 특정 의혹에 대해 주도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한해 이뤄져왔다. 문책성 증인 채택이 일반적인 관행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가 경제를 이끌어가는 기업의 총수를 국회에 불러내는 일을 가급적 자제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증인 신청이 거론되는 기업 총수들은 해당 사안과 관련해 대부분 일종의 ‘피해자’ 위치에 있다. 굳이 증인 신청을 해서 부담을 줄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IRA와 칩4는 한미통상외교 사안, ‘피해자’인 한국 기업 총수 불러봐야 시간 낭비

인플레이션 감축법과 칩4는 정부의 통상외교 사안이다. 이로 인한 한국기업의 피해 규모 등을 파악할 책임과 권한이 있는 곳은 해당 기업 총수가 아니라 정부 관계자들이다. 주미대사나 외교부 장관 혹은 산자부 장관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게 상식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월 16일 서명,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자국내 친환경 에너지 공급망 구축을 위해 480조원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 골자이다. 북미산 전기차의 경우 중고차는 최대 4000달러, 신차는 최대 7500달러의 세액공제 혜택을 부여할 방침이다.

또 전기차 배터리 핵심 광물의 40% 이상을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조달하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SK온, 삼성SDI, LG에너지솔루션 등과 같은 국내 배터리 기업들이 사용하는 양극재와 음극재의 일부 소재는 중국 비중이 90%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기아차와 같은 전기차 기업과 배터리기업들이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인플레이션 감축법 통과로 인해 미국시장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현대기아차가 내년부터 전기차 보조금지급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은 정부의 취약한 통상외교 능력이 빚은 참사이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체결한 한국의 기업이 최혜국 대우가 아니라, 미국과 정치경제적 불화를 겪고 있는 중국과 비슷한 수준의 푸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외교부 장관, 산자부 장관, 주미대사 등을 불러내 책임 추궁하고 대책 따져야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추궁하는 게 국감의 목표라면 ‘피해자’인 정의선 회장 혹은 최태원 회장을 불러낼 일이 아니다. 시간 낭비이다. 산자부 장관, 외교부 장관, 주미대사 등을 필두로 한 정부 부처의 책임자들에게 경위를 추궁하고 향후 대책을 따져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재계의 입장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20일 미국 뉴욕에서 하카인데 히칠레마 잠비아 대통령과 만나 사업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SK그룹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20일 미국 뉴욕에서 하카인데 히칠레마 잠비아 대통령과 만나 사업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SK그룹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더욱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지난 2021년 바이든 대통령이 ‘더 나은 재건 법안’(BBB 법안)이란 명칭으로 추진한 3조5000억달러 규모의 지출 예산이 공화당의 반대로 의회 통과가 어려워지자, 예산규모를 줄여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 시절에 이미 한미통상교섭 채널을 통해 한국기업 혜택문제를 협의해야 했던 사안이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한국 배제를 국감장에서 따지려면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대미 외교통상교섭 라인 책임자들을 불러내는 게 상식적인 수순이다.

구광모 회장이나 최태원 회장을 추궁해봐야 “잘 모르겠다”는 답변 이외에 들을 게 없다. 미국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글로벌 기업으로서는 아는 게 있어도 대답하기 어려운 처지이기 때문이다.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한국, 일본, 대만 등이 안정적인 반도체 생산·공급망을 형성하자는 ‘칩4’대책을 따지기 위해 이재용 부회장이나 최태원 회장을 국회로 불러내자는 발상 역시 어처구니 없다는 지적이다.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자는 ‘칩4’는 국가간 문제이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같은 글로벌 기업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서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이다.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국감 증인은 일반적으로 하루 종일 국감장을 지켜야 한다.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국감에 불출석한 증인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상 3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 같은 형사처벌은 기업 경영에 큰 부담을 주기 마련이다.

다행스럽게도 민주당은 4대 그룹 총수들을 증인신청 명단에서는 제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외통위나 산자위 참고인으로 부를 가능성은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국회가 올해 국감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나 ‘칩4’에 대해 제대로 된 대책을 추궁하려면 권한 없는 기업인을 불러내려고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책임있는 통상외교 당국자들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데 역점을 둬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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