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미국은 새 정부가 들어서면 ‘핵태세검토서(NPR: Nuclear Posture Review)’를 발표하여 핵정책과 핵전략의 근간을 내외에 선포한다. 이를 통해 대내적으로 정책결정자들과 군에게 새 정부의 핵 기조를 주지시킴으로써 전략수립의 효율성을 높이고, 대외적으로는 적대국이나 파트너국들이 최강국의 핵태세를 제대로 인지하라는 메세지를 전한다. 북한이 이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2013년 ‘북한판 NPR’에 해당하는 ‘자위적 핵보유법’을 제정하더니만, 금년 9월 8일에는 ‘제2차 NPR’이라 할 수 있는 ‘핵무력정책법’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핵전략을 당당하게 내외에 공표하는 ‘핵강국 코스프레’를 하고 있으며, 당연히 이는 그동안 이룩한 핵무력의 양적·질적 고도화를 바탕으로 한다.

지금도 북한의 ‘핵 기차’는 질주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의 유훈으로 달리기 시작한 이 기차는 북한이 식량문제나 경제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나 비핵화 대화를 하는 중에도 멈추지 않았고, 북한이 평화공세를 펼치던 시기에도 중단없이 달려왔다. 그러는 동안 북한은 핵무력 증강을 지속해왔고, 이제는 강대국형 핵전략을 내외에 선포하면서 ‘대남 선제 핵사용 불사’까지 외치고 있다. 그럼에도 북핵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1989년 이래 한국은 스스로 벌거벗은 채 줄곳 북한에게 핵포기를 설득해왔다. 그 결과, 핵무장 북한과 비핵 한국 간의 비대칭 위협은 가중되었고, 한국은 더욱 깊은 핵인질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이 ‘잃어버린 30년’이다. 한국이 진정 ‘핵없는 한반도’를 원한다면, 대화나 외교로 핵포기를 설득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미국도 이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잃어버린 30년’과 북한 핵전략의 진화

북한은 여섯 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하고 수십 기의 핵탄을 보유한 핵보유국이며, 이를 뒷받침할 투발수단 개발에 정열을 쏟아왔다. 미사일 시험발사는 김일성·김정일 시대 동안 31회에 그쳤으나, 2012년 이래 김정은 정권은 156회나 발사했고 2022년에만 19회에 걸쳐 41발의 미사일을 쏘았다. 특히, 전문가들은 최근들어 북한판 아스칸데르 KN-23과 북한판 에이태킴스(ATACMS) KN-24, 초대형 방사포 KN-25 등 신형 중단거리 미사일들을 연거푸 쏘는 것을 임박한 전술핵 배치의 징후로 보고 있다.

북한의 핵전략도 진화를 거듭했다. 2005년 2월 북한은 외무성 담화를 통해 ‘핵보유’를 선언하여 핵실험 강행을 예고했으며, 2006년 10월 첫 핵실험 직후 ‘억제·방어용’으로만 핵을 보유한다면서 ‘겸손 코스프레’를 했고 2012년에는 개정헌법의 전문에 ‘핵보유국’을 명시했다: “김정일 동지께서는…우리 조국을 불패의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시키시었으며...” 2013년에 제정한 '자위적 핵보유법'을 통해서는 미국과 한국을 향한 투 트랙(2-track) 전략을 발표했다. 즉, 제1,2,4조를 통해 침공시 섬멸적 보복을 가하는 핵태세로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대처한다는 ‘대미(對美) 억제’를 표방했고, 제5는 통해서는 “한국이 미국과 야합하여 우리에게 대적하면 비핵국인 한국에게 핵을 사용할 것”이라는 취지를 담아냈다. 당연히 이는 ‘대남 핵사용’ 의지를 표방한 것이었다. 2016년 제7차 당대회에서는 상대가 핵을 사용하지 않는 한 먼저 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선제 핵사용 포기(NFU)’ 독트린을 선언했다.

북한의 핵전략은 이후에도 진화했다. 2022년 4월 인민군 창건 90주년 행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의 기본 사명은 억제이지만 필요하면 ‘억제 이외의 사명’을 수행할 것이라면서 ‘핵사용’ 전략을 재차 강조했고, 며칠 후 김여정 당 부위원장은 담화를 통해 “핵무력의 사명은 전쟁초기 상대의 전쟁의지를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6년전의 NFU 선언을 뒤집고 ‘대남 핵 선제사용’을 선언한 것이었다. 6월에 열린 중앙군사위원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전선부대들에게 새로운 작전 임무를 추가했다고 했다. 실제 사용이 용이한 저위력 전술핵을 실전 배치하여 ‘핵사용’ 전략의 신뢰성을 담보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북한의 핵전략은 제1단계 ‘핵억제(nuclear deterrence)’ 전략에서 제2단계 ‘핵전투(nuclear warfighting)’ 전략을 거쳐 ‘선제 핵사용’과 ‘대남 선제핵사용’으로 진화하고 있다.

핵사용 의지를 더욱 노골화한 제2차 ‘북한판 핵태세검토서’

여기에 더하여 북한은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를 통해 ‘공화국 핵무력 정책에 대하여’라는 법령을 채택했다. ‘자위적 핵보유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핵태세검토서였다. 이 법은 제1조에서 핵무력을 ‘국가방위력의 중추’로 정의했다. 핵무력 지휘통제권이 김정은 위원장에게만 있음을 명시한 제3,4조와 한국이 미국과 동맹하여 북한에 대적하면 한국에게 핵을 사용한다는 취지의 제5조는 ‘자위적 핵보유법’을 반복한 것이었다. 제6조는 핵 포함 대량살상무기 공격이 실행 또는 임박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지도부에 대한 재래 또는 핵공격이 행해졌거나 임박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국가 전략자산들에 대한 치명적 공격이 행해졌거나 임박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전쟁시 확전을 막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 기타 국가존립을 위해 핵대응이 불가피한 경우 등 다섯 가지를 핵사용 조건으로 명시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미국과 한국에 대한 2-track 핵전략 기조를 유지했으며, 제3,4,5,6조가 매우 위험한 내용들이다. 김 위원장에게 핵사용 결정권을 준 3,4조는 수령독재 체제를 수호해야 하는 정치적 이유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러 명이 각자의 암호를 입력해야만 핵을 발사할 수 있도록 한 강대국들의 체제와는 달리 한 사람이 마음대로 발사할 수 있게 한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제5조는 한미동맹에 대한 견제와 대남 핵사용 경고를 재강조한 것이다. ‘제6조 2항에서 ’지도부에 대한 공격’을 핵사용 조건으로 명시한 것은 한미군이 거론해온 참수작전에 대한 대응인 것으로 보이며, 제4조 3항에서 “핵 지휘통제 체제가 위험에 처하면 사전에 결정해둔 작전방안에 따라 적대세력을 괴멸시키기 위한 핵타격이 자동적으로 단행된다”고 명시한 것은 일종의 ‘경보 즉시 발사(launch-on warning)’ 시스템으로 지도자의 유고 또는 불능상태시에도 반드시 핵보복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 것인데, 이 또한 참수작전에 대한 민감성을 드러낸 것이다. 제6조를 종합하면, 상대가 핵을 먼저 사용했던 안 했든 또는 실제로 위협이 있었든 없었든 김 위원장이 판단하면 언제든 누구에게든 핵을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황당함을 금할 수 없다.

핵균형은 ‘핵없는 한반도’를 위한 사전단계

북한의 이런 법령 제정을 보고 유엔 사무총장과 유럽연합(EU)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깊은 우려를 표명한 것은 당연했지만, 피해당사국인 한국은 너무나 무덤덤하다. 이제라도 한국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핵강국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북한을 설득하여 핵포기를 얻어낼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호수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헛된 노력은 이제 중단해야 한다. 북한에게 있어 김일성 주석의 유훈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고, 수령독재 체제는 그 어떤 희생을 치러더라도 지켜내야 하는 것이며, 주체통일이라는 종국적 목표를 위해 최대 장애물인 한미동맹을 한반도로부터 이탈시켜야 한다. 게다가 중국과 러시아는 안보리의 대북 제재에 비토권을 행사하면서까지 북핵을 비호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은 ‘핵보검’을 움켜 쥔 손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1994년 제네바핵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 2007년 2·13 합의 등 핵외교가 생산한 모든 핵합의들을 헌신짝 버리듯 폐기했다.

‘불패의 핵강국으로 전변된’ 것으로 주장하는 북한을 진짜 비핵화 대화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핵무기를 목표달성을 위한 일방적인 수단이 아니라 ‘경제·정치·군사적 계륵’으로 느끼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남북 간 핵균형’이 필요한 것이며, 현 단계에서는 미 전술핵 재배치, 동맹조약 강화 등 동맹역량 활용을 통해 ‘의지의 균형(balance of resolution)’ 또는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핵없는 한반도’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사전단계일 것이다. 북핵 대응에 있어서의 핵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북핵은 더욱 거대한 괴물로 성장한다는 사실, 때문에 한미 양국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외교란 힘과 동행할 때에만 비로소 가치를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전 통일연구원장, 전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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