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하지 않지만 승복'하는 미덕 필요한 시점
'재경선' 한다고 해도 공정한 룰 정하기 어려워
성과만 남기고 4년 후 기약해야 반전 있을 것

이슬기 PenN 정치사회부 기자
이슬기 PenN 기자

“비록 판결에 동의하진 않지만 국가의 단합을 위해 승복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선거전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엘 고어는 공화당 후보 조지 부시에게 패한 뒤 이렇게 말했다.

치열했던 투표에 연방대법원까지 개입하게 된 건 플로리다주의 개표 결과 때문이었다. 부시 당시 후보는 한밤중까지 개표 결과가 확실치 않았던 플로리다주에서 0.1퍼센트라는 간발의 차로 고어를 이겼지만, 플로리다주 법률은 격차가 0.5퍼센트 이하일 경우 재검표를 의무화하고 있었다. 재검표 결과 두 후보의 득표 격차가 오히려 더 좁아지며 상황이 복잡해졌다. 고어는 결국 수검표(手檢票)를 요청하기에 이르렀으나, 연방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부시의 승리가 그대로 확정됐다. 엘 고어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였다.

서울교육감 선거 얘기를 꺼내기 위해 미국의 대통령 선거전까지 끌어오는 게 너무 거창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우파 진영의 서울교육감 단일 후보를 정하는 일은 그만큼 치열했고, 각 후보 지지자들의 열정은 그보다 더 뜨거웠다. 그러니 이를 대통령 선거에 비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패배한 후보의 입장에서 억울한 면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우파 진영의 서울교육감 단일화 기구로 나섰던 좋은교육감후보추대본부(교추본, 득표율 49.71%)와 우리교육감추대시민연합(우리감, 69.7%), 이런교육감선출본부(이선본, 54.5%)는 만장일치로 박선영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분열로 망한다’던 보수도 드디어 단일화에 성공하는 듯싶었으나, 후보들의 불인정 시비로 살얼음판을 걷게 됐다.

그럼에도 분명한 성과는 있었다. 원로들의 돌발 추천으로 ‘경선’의 의미가 약간 퇴색하긴 했지만 ▲모든 후보들이 경선에 기꺼이 참여했거나, 최소한 참여할 의향을 보였다는 점과 ▲경선을 치르기 전 2회 이상 토론회에 나와 정책 대결을 펼쳤다는 점이다. 그렇다. 과거 보수 진영은 제대로 경선조차 치르지 않은 인물을 후보로 추대했었다.

이 단일화 경선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는 점도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다. 우선 ▲투표 참여자는 발표하기 부끄러울 만큼 소수였다. 세 기구의 경선에 참여해 표를 행사한 시민 고작 3천여 명에 불과했다. ▲경선 과정도 완벽하지 않았다. 아니, 완벽을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잡음이 많았다. 결정적으로는 경선 기구가 경선 일정 등을 임의로 미루는 등 원칙을 어겨 후보자들의 신뢰를 잃었다.

하지만 또 하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파 진영은 그 누가 후보로 나서더라도 조희연 현 서울시교육감에 비해 절대적 열세이며, 현재 한국의 교육 상황은 ‘전시(戰時)’에 비길 만큼 위중하다는 점이다. 다수의 시민들은 경선 기구와 그 과정의 문제점보다 우리 교육 그 자체의 문제점을 훨씬 더 긴급하게 인식하고 있다.

재경선, 또는 재단일화를 하게 될 경우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 개의 단일화 기구가 각각 승자라고 발표한 박선영 후보의 득표가 비록 수백 표라고는 하지만, ‘한 표’를 행사한 유권자의 뜻을 함부로 폐기할 수 있는 것인지, 모바일 100% 투표로 이뤄진 이번 경선룰을 폐기하고 완벽하게 공정한 경선룰이라는 것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인지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재경선 또는 재단일화를 6.13 지방선거 일정에 무리하게 맞추려 하다보면 그 과정이 불공정한 정치판으로 변질될 것이 분명하다. 단일화 과정에서의 수많은 잡음 등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재경선 또는 재단일화가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의 공정성과 객관성, 타당성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이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감히 이런 말씀을 올린다. 대의를 위해 ‘비록 동의하진 않더라도 승복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이다. 이번 선거는 이미 이렇게 불완전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4년 뒤의 선거에선 더 공정한 경선을 거쳐, 더 적합한 후보가 탄생하길 우리는 바랄 수밖에 없다. 첫 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이다.

잠시 조지 부시와 엘 고어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부시는 임기 중 최악의 테러였던 9.11테러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으나 결과가 부진했던 데다, 임기 말 터진 2008 금융 위기 등에 휩쓸려 미국 역사상 가장 초라한 지지율을 기록한 채 퇴임했다. 반면 엘 고어는 환경 다큐멘터리 영화 ‘불편한 진실’ 등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데 이어 2007년에는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며 승승장구했다. (엘 고어가 주장하는 ‘인간에 의한 지구 온난화(man-maid global warming)'가 사실인지 여부는 이 글에선 따지지 않겠다.) 승자와 패자가 이렇게 변신했다는 것, 그게 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 아쉽게 승자가 되지 못한 후보들께도 이런 ‘반전’을 기대한다. 교육에 대한 전문성과, 대한민국 교육을 살리겠다는 그 진정성으로 교육감보다 더 멋진 일들을 해주시길. 그래서 훗날 학부모들이 ‘교육감 선거에 안 나가길 참 잘했다!’고 말하게 되길 말이다. 그러기 위한 첫 스텝은 '동의하진 않지만 단합을 위해 승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슬기 기자 s.l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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