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제안한 ‘러시아산 천연가스 가격상한제’가 지난 9일(현지시간) 개최된 EU 에너지장관 회의에서 논의됐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난방 수요가 많은 겨울을 앞두고 EU가 사분오열 양상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가스 절약을 호소하는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가스 절약을 호소하는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지난 7일 브뤼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에 끔찍한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는 러시아의 수익을 끊어야 한다"고 밝히며,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천연가스 가격상한제’ 도입을 제안하겠다고 했다.

푸틴, “러시아산 석유 가격상한제 참여국에는 에너지 수출 않겠다” 공언

이러한 EU의 입장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산 석유 가격상한제 도입에 동참하는 국가에는 에너지를 수출하지 않겠다”며 보복 조치를 공언한 가운데 나왔다. 앞서 푸틴 대통령은 이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7차 동방경제포럼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러시아산 원유 가격상한제 도입에 동참하는 국가를 가리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며 참여국들에는 석유·천연가스 등 에너지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경고를 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의 이 같은 경고에,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맞불을 놓기 위해 전격적으로 ‘러시아산 가스 가격상한제’를 제시한 셈이다. 카드리 심슨 EU 에너지 정책 담당 집행위원은 “러시아는 가스 가격을 조정하거나 공급을 제한해 방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며 가스 가격상한제 도입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EU 회원국 에너지부처 장관들은 지난 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에너지 문제를 논의했다. 일정 가격을 넘는 러시아산 가스를 EU 회원국들이 사들이지 않기로 하는 것이 러시아산 가스 가격 상한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겨울을 앞두고 EU 각국은 사분오열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지금까지도 러시아로부터 많은 가스를 수입하는 헝가리,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는 가스 가격상한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페테르 시야르토 헝가리 외무장관은 "러시아산 가스에만 가격 제한이 가해진다면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즉각 중단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네덜란드도 "광범위한 가스 가격상한제를 지지하지 않는다"며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반면 EU 집행위원회가 내놓은 러시아산 가스 가격상한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국가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로 구성된 발트 3국이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정치적 의지를 다져야 한다"는 게 발트 3국의 입장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산 석유 가격상한제 도입에 동참하는 국가에는 에너지를 수출하지 않겠다”며 보복 조치를 공언했다. [사진=연합뉴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산 석유 가격상한제 도입에 동참하는 국가에는 에너지를 수출하지 않겠다”며 보복 조치를 공언했다. [사진=연합뉴스]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등도 액화천연가스를 포함한 모든 가스 수입 물량에 상한액을 정하자며 제안에 찬성했다.

하지만 가스 수요가 많은 겨울을 앞두고 있어, 회원국 간 이견을 좁히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에너지 정책을 연구하는 아가타 로스코트 스트라초타는 "EU 회원국은 가스 가격을 내리고 공급량을 늘리는 데 관심이 있지만, 집행위원회는 러시아의 수입을 제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에너지 문제가 해결하기 어려운 쟁점이라고 AP통신에 말했다.

러시아 가즈프롬 3일간 공급 중단에 가스가격 30% 폭등...재가동 시점 불투명

유럽 각국은 이달 초 이미 러시아 측의 가스공급 중단 피해를 경험한 바 있다. 러시아 국영가스회사 ‘가즈프롬’이 ‘노르드스트림(Nord Strem)1’ 정비를 이유로 지난달 31일부터 가스 공급을 3일간 중단하기로 한 뒤 가스 가격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노르드스트림1 송유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러시아 해안에서 독일 북동부까지 발트해 해저 1200㎞에 걸쳐 있는 가스관으로, 2011년 운영을 시작해 러시아에서 독일로 하루 최대 170㎥의 가스를 보낼 수 있다. 노르드스트림AG가 소유하고 운영하며, 가즈프롬이 대주주이다.

가즈프롬은 2일(현지시간) 노드스트림1이 예정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며, 핵심 터빈 엔진이 고장났다고 밝혔다. 정비 작업을 이유로 운행 재개를 미룬 가즈프롬이 재가동 시점을 정확히 밝히지 않아, 그 배경에 의구심에 제기됐다.

가즈프롬의 재가동 불가 발표가 G7(주요 7개국)이 러시아산 원유 가격에 상한선을 두자고 동의한 지 몇 시간 만에 나왔다는 점이 배경으로 지목됐다. G7은 지난 2일 러시아산 원유와 석유제품에 대한 도매 가격에 일정의 상한선을 두는 '석유 가격상한제'를 합의했다. G7의 이같은 결정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흘러들어가는 자금을 억제하기 위해 내려졌다.

지난달 31일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즈프롬은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인 '노르드스트림-1'의 가압시설을 정비하기 위해 사흘간 가스공급을 멈춘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지난달 31일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즈프롬은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인 '노르드스트림-1'의 가압시설을 정비하기 위해 사흘간 가스공급을 멈춘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영상 캡처]

이에 가즈프롬은 노르트스트림1 가스관을 통한 가스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따라서 유럽에 가스 공급을 줄이려는 러시아 측의 보복조치로 풀이됐다. 러시아는 "서방 제재가 풀릴 때까지 가동 중단이 계속될 것"이라고 위협하며, 경제적 고통으로 유럽 국가들의 결의가 무너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

단 3일간의 가스공급 중단으로, 유럽 가스 가격은 30%나 급등했다. 가즈프롬이 가스관을 잠근 이후 지난 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유럽 천연가스 가격 벤치마크인 네덜란드 TTF 선물 가격은 이날 시장 개장 직후 30% 급등한 ㎿h당 272유로를 기록했다.

하지만 상당한 유럽 지도자들은 "이미 예상했던 수순"이라며 러시아가 원하는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줄곧 러시아의 보복에 대비해왔기 때문이다. 유럽의 에너지 장관과 외교관들은 전세계를 돌며 러시아산을 대체하기 위해 거래를 협상해왔다.

특히 러시아산 에너지에 가장 많이 의존하는 이탈리아, 독일에서 분주하게 대책 마련에 나섰으며 알제리에서 카타르, 콩고,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협상이 진행됐다.

이에 따라 독일은 러시아 가스에 의존하는 비중을 기존의 절반 수준에서 8월 10% 미만으로 줄였다. 이탈리아 역시 러시아산 소비가 40%에서 23%로 떨어졌다.

유럽 각국, 동절기 가스가격 폭등 우려 속 에너지 절감 대책 추진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가 주요 재정 수입원인 에너지 고객을 잃고 있다며, 러시아산 가스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러시아는 더이상 신뢰할 수 있는 에너지 공급국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5일 숄츠 독일 총리와의 화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열고, “프랑스는 독일에 가스를 공급하고, 그 대가로 프랑스 내 원자력 발전소 가동 중단에 따른 전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독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올겨울 배급과 감축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 에너지 사용량을 10% 줄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만약 자발적인 노력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강제적인 절약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NYT는 다가오는 겨울철 유럽이 겪는 에너지 위기 심각성이 변수라고 진단했다. 유럽 싱크탱크 브뤼겔은 러시아 가스 공급의 전면 중단시 유럽 전역이 가스 소비를 15% 줄여야 한다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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