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드러난 문제들보다 더 심각한 것은, 스스로 바른 말, 고운 말을 써서 교양 있고 품격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진 것 같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철학도, 품위도, 교양도 없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다. 어법에 맞는 바른 말을 제대로 배워 때와 장소에 맞게, 군더더기 없이, 품위 있게 쓰려는 데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입에서 나오려는 말이 무슨 뜻을 가졌는지 생각하고 시의적절하게 적용하려 노력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품위나 교양이라는 말 자체가 아직 살아 있기나 한 걸까?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개척 시대, 미국 지역 사회의 질서 유지와 발전의 중심에는 가정과 학교, 교회가 있었다.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와 그를 돕는 어머니, 학교의 교사, 교회의 성직자가 주요한 역할을 하여 그 사회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가정과 학교,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한 지역 공동체의 힘이 오늘날 미국 번영의 기틀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의 그런 모습은 오래된 TV 드라마 초원의 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로 육체 노동으로 이뤄진 하루 일과를 마친 가족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식탁에 둘러앉는다. 하루를 무사히 보내게 해주고 귀중한 양식을 내려준 신에게 감사 기도를 바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하루를 성찰한다. 모르는 문제가 생기면 학교로 달려가 마을에 단 한 명밖에 없는 교사에게 질문하여 답을 얻는다. 또 부모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사춘기 자녀도 하나밖에 없는 교회에서 성직자로부터 위안을 얻고 바른 길로 인도를 받을 수 있다. 그 사회에서 부모, 교사, 성직자는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였던 것이다.

 

사회지도층 인사’.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까지 이런 용어가 매스컴에 오르내렸다. 주로 위정자, 교육자, 성직자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예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을 때 한 자라도 더 배운 사람들, 앞장서서 뭔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큰 무리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위정자, 교육자, 성직자 등 중에 존경받지 못할 짓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나 자신부터 사회지도층이라는 용어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뉴스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대체 저런 인간들이 사회를 어떻게 지도하며 누가 저들의 지도를 받는다는 말인가라며 개탄하고 분노했다.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지 언제부터인가 이 사회지도층이라는 말이 매스컴에서 사라졌다.

 

만일 이 용어가 아직 쓰이고 있다면 나는 사회지도층의 가장 기본적 요건으로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언행을 꼽겠다. 바른 말 고운 말을 사용하고 말만큼이나 바른 행동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교육 정도에 상관없이 사회지도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번쩍거리는 스펙을 지녔다 할지라도 말이 험하고 행동 또한 바르지 못하다면 사회지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예전 우등생에게 주던 상장 대부분에 성적이 우수하고라는 말 외에 품행이 방정(方正)하고라는 글귀가 함께 실렸던 것도 이런 나의 생각과 관련 있다고 본다. 우등생은 공부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다. 품행이 방정(바르고 점잖음)’해야 우등생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 용어가 아직 쓰이고 있다면 나는 ‘사회지도층’의 가장 기본적 요건으로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언행을 꼽겠다.
이 용어가 아직 쓰이고 있다면 나는 ‘사회지도층’의 가장 기본적 요건으로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언행을 꼽겠다.

요즘 틀린 말을 당당하게사용하는 사람들 얘기로 화제가 되고 있다. 싸움에서 이기기 기원한다는 뜻의 무운(武運)을 빈다라는 말에 왜 운이 없으라고 저주하느냐라고 비난했다는 사람, 사흘을 ‘4로 알아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심심(深甚)을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뜻의 순우리말 심심하다로 받아들여 왜 사과를 제대로 하지 않느냐라고 핀잔 주는 사람, ‘이 모(李 某)’이모(姨母)’로 잘못 이해하고 큰소리치는 사람, ‘일사불란일사분란이라고 잘못 적고 경우에 맞지 않는 엉뚱한 고사성어를 가져다 쓰는 사람, 자신의 의지나 뜻을 확고히 밝힌다는 천명이라는 말을 왕이나 쓰는 말이라고 받아들인 사람. 예전 같으면 이른바 사회지도층인사로 분류되었을 국회의원이나 정치가들도 이런 무지함을 드러내곤 한다.

몇 년 전부터 남아일언중천금마마잃은 중천공으로 쓰고 일치얼짱(일취월장), 덮집회의(더치페이), 수박 겁탈기(수박 겉핥기), 시럽계(실업계), 발여자(반려자) 등으로 표기한다는 요즘 젊은 애들얘기가 유머처럼, 개탄처럼 퍼졌다. 한자 실력도 없고 생각도 없는 그때 그 주인공들이 벌써 국회의원이 되고 정치권에 진입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요즘 국회의원 등 정치인을 사회지도층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자신들이 중책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존감까지 스스로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자존감을 지키고 싶다면 그렇게 뱉어내는 데 급급하여 아무 말 대잔치를 펼치고도 그게 뭐 어쨌냐는 식의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품격은 말과 행동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사회지도층’ 인사로 분류되었을 위정자들도 언어 사용의 무지함을 흔히 드러내곤 한다.
예전 같으면 ‘사회지도층’ 인사로 분류되었을 위정자들도 언어 사용의 무지함을 흔히 드러내곤 한다.

이 세상 모든 말의 뜻을 다 알 수는 없다. 말하다 보면 실수로 잘못된 말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잘 몰라서 틀린 말을 사용할 수도 있다. 문제는 실수한 다음의 언행이다. 실수했으면 그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 다음에는 틀리지 않으려고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이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거의 같은 실수를 계속하는 것을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아예 바른 말을 쓰려는 의지 자체도 없어 보인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틀린 어법이나 문장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면 거의 두 가지 반응 중 하나가 돌아온다. “그게 뭐 중요해? 말만 통하면 되는 거 아냐혹은 그래, 너 잘났다라는 식이다. “, 그래? 다음부터 조심해서 써야겠다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니 틀린말이 개선될 수가 없다.

 

이렇게 틀린 말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교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한자어는 오히려 늘어가는데 한자 교육을 안 하니 뜻 모르고 쓰는 말이 점점 더 늘 수밖에 없다. 매스컴의 폐해도 크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정제된 말을 사용하지 않으니 그 여파는 홍수처럼 사회로 퍼지게 된다. 텔레비전 자막은 물론 프로그램에서 쓰이는 말과 글들이 엉망진창이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정확한 보도와 전달이 생명인 기자 중에 스스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 안 되는 기사를 생산하는 사람도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생각없이 말을 내뱉는 풍조도 문제다. 자기가 하려는 말의 뜻을 조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존댓말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한 번만 더 생각하면 내가 아시는 분이라는 말이 상대가 아닌 나 스스로를 존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햄버거 나오셨습니다” “통장 여기 계시고요등의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릇된 지식을 가지고 섣불리 남을 가르치고 비난하고 우기는 사람이 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무지의 상황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이런 겉으로 드러난 문제들보다 더 심각한 것은 스스로 바른 말, 고운 말을 써서 교양 있고 품격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진 것 같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철학도, 품위도, 교양도 없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다. 어법에 맞는 바른 말을 제대로 배워 때와 장소에 맞게, 군더더기 없이, 품위 있게 쓰려는 데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입에서 나오려는 말이 무슨 뜻을 가졌는지 생각하고 시의적절하게 적용하려 노력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품위나 교양이라는 말 자체가 아직 살아 있기나 한 걸까?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여전히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한다. 바른 말 고운 말을 쓰지 않는 사람은 심성도 바르거나 곱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인격의 높고 낮음이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고 해서 말이 인격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어려운 용어를 사용한다 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말을 잘 하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우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분명히 파악하고 그것이 장소와 시간에 맞는 말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듣거나 읽는 사람을 배려하여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이 평범한 지침을 지켜야 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사족 : 1988년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공표한 표준어 규정에서는 표준어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규정했다. 이 짧은 문장에 표준어의 조건이 세 가지나 포함되어 있다. 그중 나는 교양 있는이라는 조건에 주목한다. 학교나 가정에서, 사회에서 표준어를 가르치려면 이 교양 있는 삶도 함께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가정이든 학교든 사회든 그 모든 교육 현장에서, 표준어 규정에 왜 교양 있는이라는 조건이 들어 있는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세종대왕도 한글이 ‘교양 있는’ 말을 구현하는 데 쓰이길 원했을 것이다.
세종대왕도 한글이 ‘교양 있는’ 말을 구현하는 데 쓰이길 원했을 것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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