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신앙심 없는 바빌론, 지상의 지옥, 악의 수채통, 세계의 하수구, 여기에는 믿음도 자비심도 종교도 신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고 페트라르카는 아비뇽을 비꼬았다. 교황청을 프랑스에 빼앗긴 이탈리아 사람의 심정이리라.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기자 이탈리아는 돈을 거의 보내지 않았고, 독일도 평소의 절반만 보냈다고 한다. 프랑스는 백년전쟁의 비용을 교황청에서 빌렸고, 잉글랜드는 프랑스 편인 교황청에 돈을 보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교황청은 돈이 쪼들렸고, 재원을 마련하는데 온갖 창의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주교나 수도원장으로 새로 임명되면 1년 수입의 1/3을 교황청으로 보냈다.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면 고위성직자들은 1년분의 수입을, 그 이후로는 연 수입의 1/10을 교황청에 납부했다. 추기경, 대주교, 수도원장이 죽으면 개인재산은 교황청에 귀속되었고, 후임이 임명되지 않아 공석인 경우 성직록은 교황이 사용했다. 돈 때문에 임명을 늦춘다는 비난도 받았다. 교황청 법정의 변론허가를 주면서 연회비를 받았다. 교황청 재판의 변론비용이 비싸질 수밖에 없었다(윌듀런트, 문명이야기 5-1). 교황청의 세금부과에 주교 등 성직자들도 대단히 힘들어 했고 신도들에게 기부와 천당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교황들도 클레멘스 6세를 제외하고는 가난 속에 살았다.

  그럼에도 교황청은 적자에 시달렸다. 요한22세는 교황청 재정을 구제하기 위해 개인 재산을 쏟아 부었고, 인노켄티우스 6세는 은 쟁반, 보석, 예술품 등을 팔았다. 우르바누스 5세는 추기경들에게 돈을 빌렸고, 그레고리우스 11세는 죽었을 때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인노켄티우스 6세부터는 이탈리아의 교황령을 돌려받기 위한 전쟁에 많은 돈이 들어갔다. 아비뇽 시대에 134명의 추기경 중 프랑스출신이 113명으로 유럽의 권력을 프랑스의 도구로 전락시킨 혹독한 대가였다. 

  교황들은 점점 로마 귀환을 생각했으나, 그 길은 오디세이의 귀환만큼이나 험난했다. 아비뇽의 세 번째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로마나 볼로냐로 교황청을 옮기려고 시도했으나 추기경들의 반대로 아비뇽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비뇽궁 건설을 지시했다.

  대부분 프랑스 출신인 추기경들은 로마에 가면 이탈리아 출신에게 밀려 권력을 잃게 될 것을 걱정했다. 이탈리아인에 대한 불신도 컸다. 도시화와 상업화가 많이 진전된 이탈리아 사람은 영악하고 신앙심이 약해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단 재판, 십자군 등 현실에 맞지 않는 정책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 프랑스였다. 로마로 귀환해서 멍청한 이탈리아 성직자들에게 양떼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아비뇽을 떠나면 프랑스내의 수입이 줄어들 것이고, 이탈리아에서 수입을 늘려야 했다. 아비뇽 유수기에 이탈리아의 교황령은 거의 독립국가가 되어있었다. 당연히 세금도 교황청에 납부하지 않고 있었다. 로마로 돌아가려면 우선 교황령부터 되찾아야 했다. 

  아비뇽의 5번째 교황 인노켄티우스 6세는 교황령을 찾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교황령의 기강을 잡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물론 추기경들은 수입을 늘리는데 목적이 있었겠지만…. 인노켄티우스 6세는 프랑스 국익에 치우치지 않고 카를 4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치러주었고, 카를은 로마를 교황에게 되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반프랑스 감정이 문제였다. 교황령에서 누군가 반프랑스 감정을 자극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교황령의 귀족들은 교황이 로마를 떠난 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으니 교황의 귀환을 내심으로는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신은 교황의 로마귀환을 원한 것 같다. 교황들은 흑사병이 신의 징벌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 흑사병은 1348년에서 1350년의 3년간 최고조에 달하여, 유럽 인구의 1/3에서 절반에 이르는 사람이 사망했다고 한다. 1361년에 흑사병이 다시 남프랑스에 발생했을 때는 4개월 만에 추기경이 9명이나 사망했고, 100명 이상의 주교와 약 6천 명의 평민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위키백과). 사람들은 흑사병을 신의 심판으로 받아들였다. 당연히 교황의 아비뇽 체류에 대해서도 심판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둘째, 백년전쟁으로 영국군대가 아비뇽 근처까지 오자 여태 프랑스 편을 들어온 교황은 두려움을 느꼈다. 당시 프랑스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밀리고 있어 교황청을 적으로 생각하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신성로마제국과의 관계개선이 절실했다. 마침 신성로마 제국 카를 4세가 아비뇽을 방문했고 로마 방문을 간청했다. 
 셋째, 교황이 로마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뒤늦게 깨달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탄원이 그치지 않았다. 특히 계관시인 페트라르카, 성 카타리나 등이 교황의 로마귀환에 앞장섰다.

  로마귀환의 물꼬를 튼 교황은 이탈리아를 잘 아는 우르바누스 5세였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을 상실한 후 프랑스사람들에 적대적이어서, 전임교황들은 책임감과 의무감이 강한 기욤 그리모아르(우르바누스 5세의 본명)에게 힘든 이탈리아 업무를 많이 맡겼다. 1352년 비스콘티 가문과의 협상에서 그들에게서 불법으로 빼앗긴 볼로냐 시를 돌려받는 외교적 업적도 달성했다. 수도원장시절 고위성직자의 사치스런 향응요구를 거절하다가 폭행까지 당했으나 흔들리지 않았고, 교황이 된 후에도 베네딕도회의 규칙을 따르며 간소하고 검소하게 생활했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니 말에 힘이 실렸을 것이다.

  우르바누스 5세는 추기경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의 알주베타 황후 대관식을 직접 집전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다. 60년 만에 교황이 로마에 발을 내딛은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요청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거의 3년을 머문 것으로 봐서 완전히 이전할 생각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로마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크게 기뻐하며 환영하였고, 키프로스의 피에르 1세와 나폴리의 조반나 1세의 충성 맹세를 받아내는 부차적인 성과도 얻었다.
  그러나 프랑스 추기경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를 조성해야한다는 명분을 붙여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갈 것을 강권했고 우르바누스5세는 그에 따랐다. 교황이 로마를 떠나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성 비르지트의 예언이 있었는데, 아비뇽에 도착한지 3달도 되지 않아 교황은 죽음을 맞이했다. 

  비르지트 수녀의 예언은 그레고리우스 11세 교황이 될 피에르 로제 드 보포르 추기경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전임교황의 죽음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지켜 본 그레고리우스 11세는 로마귀환을 신의 뜻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프랑스 성직자의 유부녀 추행사건이 반 프랑스 감정을 유발하여 피렌체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볼로냐, 페루자, 오르비에토, 비테르보 등 교황령 내 40개가 넘는 도시가 합세 했다. 로마의 소요가 예상되자 교황은 시 대표들에게 로마귀환을 엄숙하게 약속했고, 로마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 결과 교황은 1376년, 피렌체에 성무 금지령을 내리고,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1377년 1월 7일, 그레고리우스 11세 교황이 로마에 무사히 당도했고 이듬해 로마에서 선종했다. 죽기 직전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갈등이 교회를 분열시키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탈리아 출신 후임교황이 로마 교황청을 이어갔고 양국의 갈등은 다음세대가 풀어야했다.

  물길이 한 번 바뀌면 다시 돌리는 데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아비뇽에 교황청을 옮길 때는 그 당시 상황에 따라 깊은 고민 없이 결정했겠지만, 그 후 이 지역을 중심으로 물적·인적 인프라 및 기득권이 형성되어, 아비뇽을 떠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로마귀환은 추기경들의 반대, 교황령의 반란 등 악조건 속에서, 전쟁까지 불사하는 결단으로 달성되었다. 귀환을 추진한 교황들의 노력에 숙연해진다. 로마귀환으로 종교 개혁이 100년은 늦춰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功者難成而易敗, 공은 쉽게 허물어지고 쌓기는 어렵다. 지난 문재인정부는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많이 시행했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건전한 재정문화 등 인프라를 망가뜨렸다. 교황의 로마귀환에서 보듯이 올바른 정책으로 바로 잡는 것은 몇 배로 힘이 든다. 여기에 윤석열 정부의 어려움이 있다. 2023년 정부 예산안을 올해 2차 추경 대비 6% 줄어든 639조원으로 편성한 것은 포퓰리즘에 제동을 건 큰 틀의 방향전환이라 봐 진다. 이러한 기조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란다. 옥에 티라면 병장 월급을 왜 100만원까지 올리는지 모르겠다.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야하는 시점이고 여태 많이 올린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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