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로마하면 공화정이 연상되고, 고대 유적은 로마공화정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 같다. 로마가 공화정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리라. 로마의 유물들은 황제정 시대에 건축된 것일 수도 있으므로…. 사람들은 폐허 속의 기둥이나 주춧돌에서 거대한 건축물을 상상하고, 고대의 정치와 위대한 인물들을 떠올리게 된다. 공화정은 전제 군주 시대에 일종의 저항이념, 혁명의 논리를 제공한 것 같다. 신분의 귀천이 있던 시대에 하층민이 주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속삭임이었을 것이다. 

  교황청이 1309년 아비뇽으로 옮기면서 로마는 자동차 산업이 몰락한 디트로이트처럼 폐허가 되었다. 전 유럽의 주교구에서 흘러들어오던 재화가 더 이상 로마로 오지 않았고, 외국사절도 보이지 않았다. 교황이 살지 않자, 순례자도 사라졌고, 로마의 일곱 언덕에 양치기들이 양떼를 몰고 와서 풀을 뜯게 했다. 거지가 길거리를 배회하고 노상강도들이 행객들을 노렸다. 

리엔쪼, 난국을 타개할 구세주로 등장

  그런데도 오래된 귀족 가문들은 권력다툼만 하고 있을 뿐, 도시의 재건이나 어려워진 서민 경제를 살리는 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 혼란과 빈곤 속에서 고대유적들은 학자들과 애국자들에게 꿈의 자양분이 되었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시민들은 난국을 타개할 구세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선술집 주인과 세탁부 사이에서 태어난 콜라디 리엔쪼(cola di rienzo)란 법률가가 아비뇽의 클레멘스 6세 교황을 찾았고, 교황이 부재중인 상태에서 로마에 혼란만을 야기하고 있는 귀족들을 견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은 다루기 힘든 귀족들을 제어하는데 소용이 될 거라 생각하고 돈을 지원했다. 로마에 돌아온 리엔쪼는 고대 로마 원로원 의원의 흰색토가를 입고 포룸광장과 공중목욕탕 등 고대유적을 가리키며 로마가 이 언덕에서 세계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공화정을 수립하고 귀족들에 맞설 호민관을 선출하자고 외쳤다. 

  귀족들은 비웃었지만, 혁명은 일어났다. 공화국이 선포되자 민중들은 그를 독재관으로 선출했고, 얼마 후 민중을 보호한다는 호민관 명칭을 부여했다. 리엔쪼는 우선 구호품을 배급해서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통치에 재능이 있었는지, 식료품 가격통제와 비축 등을 효과적으로 처리했고, 예외를 두지 않는 공정한 법 집행으로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귀족들은 이제까지 영지 내에서는 면책이 되었으나 앞으로 그 특권이 사라진다는 현실에 당혹했고, 귀족처벌은 일벌백계 효과를 보여 범죄가 줄어들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법 앞에 평등이 실현된 것이다. 농부들은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안전과 평화 속에서 밭을 갈았고, 로마로 오는 상인과 순례객들은 노상강도가 사라져 버린 데 대해 공화국에 감사했다. 계관시인 페트라르카도 리엔쪼를 위해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바쳤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 5-1). 

  초기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리엔쪼는 이탈리아 전체를 공화정으로 바꾸는 담대한 계획을 세웠다. EU와 같은 연합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각국에 대표단 파견을 요청했다. 로마를 다시 세계의 수도로 만들자고 하면서…. 그러나 너무 급진적이었다. 로마공화국이 망해있던 동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등 다른 대리자에게 주어졌던 온갖 특권을 폐지하는 법률을 통과시킨 것이다. 기증, 포기, 대관식 등으로 형성된 천년의 권리관계를 지워버리는 이 결정은 자치도시나 교황, 신성로마제국 모두에게 위협적이었다. 교황은 리엔쪼가 자신을 파괴 시킬 이상주의자가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만은 몰락으로 가는 지름길

  한편 리엔쪼는 더욱 선전·선동에 중독되어갔다. 이탈리아 연합의회의 첫번째 의제로 자신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토록 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흉내내어 성 요한 라테란 교회의 커다란 대야에서 목욕한 후, 흰옷을 입고 교회의 기둥사이에 설치된 침상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에 자유를 선포하고 이탈리아인에게 로마시민권과 황제선출권을 부여했다. 
 자만은 몰락으로 가는 지름길인가. 백마를 타고 백 명의 경호병으로 자신을 수행토록 했다.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시민군으로 쉽게 진압한 리엔쪼는 더욱 승리에 도취되었다. 혁명가는 독선적이 되어갔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아부꾼과 문고리들이 설치면서, 함께 공화정을 추진한 시민 대표들은 점점 멀어져 갔다. 

  한편 교황청의 추기경들은 리엔쪼가 이탈리아 통일에 성공하면 교황청은 통일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클레멘스 6세에게 조언했다. 교황의 압력에 리엔쪼는 황제 및 교황의 특권을 되살리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교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리엔쪼가 범죄자이며 이교도이므로 로마에서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50년마다 열리는 희년기념행사를 취소하겠다고 협박하면서….
  희년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프랑스의 필립4세와의 싸움에서 세과시를 위해 1300년에 최초로 선포했다. 희년에 로마로 오는 순례자들에게 교황이 대사면을 함에 따라 유럽 각지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늘어나서 교황청과 로마의 경제가 좋아졌다. 

  사람들은 자유의 책임보다 희년행사가 가져다 줄 이익을 더 좋아했고, 민심의 변화를 감지한 귀족들은 다시 군대를 동원했다. 교황의 도움으로 시작된 리엔쪼의 혁명은 교황이 돌아서자 쉽게 무너져 버렸다. 리엔쪼는 시민군을 소집해서 저항하려 했으나 독선적 행동으로 인심을 잃어버린 그에게 사람들은 협조하지 않았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알프스를 넘어 교황을 비방하며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황제의 보호 하에 유배되었으나 독일에서의 생활이 무료했던지, 1년 후 본인의 요청으로 아비뇽으로 송환되어 감금되었다. 

  마침 로마에는 다시 귀족들을 쫓아내고 교황에 반대하는 공화정이 들어섰다. 이에 후임교황 인노켄티우스 6세는 로마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리엔쪼를 사면해서 로마로 보냈다. 당시 리엔쪼의 대중적 인기는 대단했던 것 같다. 오랜 유배와 감금생활이 그에 대한 동정과 향수로 이어졌는지 모른다. 주민들은 개선문을 세우고 길거리로 몰려나와 그를 맞았다. 반 교황파는 저절로 무너졌다. 

  교황의 도움으로 다시 권력을 잡다보니 교황의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서민들은 그가 교황 편인 것을 알아채고 배신자로 판단했다. 그는 더 이상 혁명가가 아니었고 조심스런 보수주의자로 보였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아직도 그를 미워하며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맞서는 그의 군대는 보수를 안준다며 난동을 부렸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부과에 중산층도 등을 돌렸다. 권력에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다시 혁명이 일어났다. 리엔쪼는 사면초가에 빠져 도망치다가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권력은 얻기도 힘들지만 수성이 더 어려워 

  한 혁명가의 최후를 보면서 권력은 얻기도 힘들지만 수성이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화정과 민주주의가 정말 어려운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는 생각도 떠오른다. 리엔쪼의 탁월한 웅변술과 선전선동 기법은 히틀러와 괴벨스를 연상시킨다. 

  반면에 혁명에 임하면서 공화정에 대한 확고한 신념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교황에게는 귀족들의 문제를, 황제에게는 교황의 문제점을 이야기 했을 뿐이다. 종교개혁을 밀어붙인 ‘마르틴 루터의 신념’ 과 대비가 된다. 공화주의에 대한 신념이나 사상은 뿌리내리지 않았는지 모른다. 마키아벨리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신이 통치하는 시대였으므로…. 로마가 공화정을 통해 위대해졌으니 우리도 공화정만 이룩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혁명을 추진 한 것 같다. 권력을 독점하려는 행위로 함께 혁명을 추진해온 지지 세력을 잃어버렸다.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협상과 타협으로 이끌어가는 공화정은 권력을 잡기 위한 단순한 구호일 뿐이었다. 그래서 신념을 쉽게 굽히고 교황의 대리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변덕스런 대중에 영합하는 단순한 선동가에 지나지 않았고, 한 번의 해프닝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주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를 위해 바그너는 오페라를 썼고, 성모마리아 성당 계단 밑자락의 오른편에 있는 리엔쪼의 청동상이 그 시대를 회상하게 한다. 

권력은 나누면 안되나

  권력을 함께 나누어 가지고 대화와 협상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는데 공화정의 묘미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어려운 것이다. 모든 정권의 몰락은 특정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려다 생긴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때도 친박을 넘어 진박논란 까지 있었고 최근에는 윤핵관과 이준석 전 대표간의 다툼이 국민의힘을 흔들고 있다.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성숙된 모습이 아쉽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