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保守主義)는 기본적으로 영국인들의 사상이며 conservatism이라는 영어 단어를 일본인들이 한자를 이용하여 번역한 학술용어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정치적 신념을 대표하는 보수주의라는 용어를 두고 보수주의의 핵심 가치는 무엇이며 누가 진정한 보수주의자인가를 두고 끊임 없는 정통성 논란이 벌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국내 최대 보수정당 국민의힘 대표 이준석은 2022년 8월 13일 기자회견에서 국민의힘 당원들을 아래와 같이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우리 당의 지지층은 이제 크게 둘로 나뉩니다. 태극기를 보면 자동으로 왼쪽 가슴에 손이 올라가는 국가 중심의 고전적 가치를 중시하는 당원과 지지자들이 있다면, 그에 못지않게 자유와 정의, 인권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당원과 지지자도 있습니다"

이준석이 기자회견에서 말한 '국가중심의 고전적 가치에 못지 않게 자유와 정의, 인권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보수'란 그의 정치적 스승인 유승민 전 의원으로 대표되는 합리적 보수(合理的 保守)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준석 대표가 자신의 지지자들을 개혁보수 내지 합리적 보수로 그리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보수주의자들을 태극기 세력으로 통칭해 왔던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출판계의 동향을 보면 영국의 정치학자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 1944년-2020년)의 2014년 저서 "How to be a conservative"가 국내에서는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지식인들의 뇌리에 '합리적 보수'는 '가짜 보수' '사이비 보수'의 반대말로 각인되어 있는 듯 하다.

나아가 "How to be a conservative"의 첫 장 제목인 'Chapter 1. My Journey'를 한글 번역본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에서 '제1장 나는 어떻게 합리적 보수주의자가 되었나'로 옮겨 놓은 것을 보면 외국어 문장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전문 번역가마저 '합리적 보수'라는 용어에 매혹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유승민 전 의원의 2017년 대선 출마를 전후하여 국내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합리적 보수'라는 용어는 영국과 일본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만 통용되는 정치용어이다.

'합리적 보수'를 직역하면 영어로는 Rational Conservatism, 일본어로는 合理的 保守 또는 合理的 保守主義가 되는데 이를 각각 google.com, amazon.com, amazon.co.uk 그리고 yahoo.co.jp, amazon.co.jp의 검색창에 입력해 보자. 우리말의 합리적 보수에 해당하는 Rational Conservatism이나 合理的 保守라는 용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온라인에서 아무리 검색해 보아도 오직 한국인이 쓴 글에서만 발견되는 '합리적 보수'라는 용어는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과 미국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1923년-현재)의 저서, 회복된 세계(The World Restored)에 단 한 차례 언급되어 있다.

"에드먼드 버크로 대표되는 역사적 보수주의는 '혁신주의자들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계약을 경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클레멘스 메테르니히로 대표되는 합리적 보수주의는 '혁신주의자들의 주장은 사회적 생활을 지배하는 보편적 원칙인 이성에 어긋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메테르니히의 합리적 보수주의는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은 합리적인 반면 혁신주의자들의 주장은 비합리적이다'라는 전제 하에 성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라도 국민들의 시각에서 합리적인 경우 받아들인다'는 유승민 등의 합리적 보수주의와 결을 달리 한다.

즉, 나폴레옹 전쟁 이후 1815년부터 1848년까지 유럽의 국제질서를 주도했던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사회 변혁 세력의 이론은 그 기본 전제부터 잘못된 비합리적 주장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인 반면 21세기 대한민국의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은 진보 세력으로 통칭되는 사람들에게 유화적이며 여론의 향방에 따라 진보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할 지 여부를 결정한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합리적 보수'란 그 실체가 없는 가치상대적 개념으로 사전적 의미 그대로 사물을 논리적으로 파악하여 계획적인 행동을 하는 보수주의자라고 규정되어야 할까? 역사적 보수주의자 버크의 사상을 이론적 기반으로 하면서 스스로 합리적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칼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에 영향을 받은 진보주의자의 주장에도 공감한다면 그는 애초에 지켜야 할 가치와 신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의 합리적 보수주의자가 국가 지도자의 지위에 오르는 일은 반드시 저지되어야 한다. 태극기를 보면 자동으로 왼쪽가슴에 손이 올라가는 국가 중심의 고전적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본능적으로 외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길을 선택하지만 자유와 정의, 인권의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은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본 후 승산이 높지 않다면 적에게 투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이 최우선시하는 자유, 정의, 인권의 가치가 본인의 자유, 정의, 인권의 가치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면 국가 중심의 보수주의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본업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본인도 살고 국가도 사는 길이다. 유권자들이 바라는 공직자상은 일반 국민들의 자유, 정의, 인권의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지켜 줄 사람이지 공직자 본인의 자유, 정의, 인권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다.

합리적 보수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19세기 유럽의 합리적 보수주의자 메테르니히와 21세기 대한민국의 합리적 보수주의자 유승민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한가지 더 존재한다.

메테르니히의 경우 그의 업적을 연구하던 후대의 정치학자 키신저에 의하여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명명되었던 반면 유승민의 경우 그 유래와 의미가 불분명한 '합리적 보수'라는 용어를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 성향은 '개혁 보수의 길을 가는 합리적 보수주의'라고 선언했다.

결국 유승민으로 대표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합리적 보수가 과연 무슨 의미였는지는 후대의 정치학자들에 의하여 재정의될 것이다. 다만, 유승민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 하는 이준석의 각종 추문들이 모두 사실로 밝혀진다면 '합리적 보수'가 '가짜 보수' '사이비 보수'의 반의어가 아닌 동의어 내지 유사어로 기록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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