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보면 동체가 공연히 거추장스러운 날개를 달고 힘들게 올라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착시일 뿐이다. 실제로는 날개가 양력을 발생시켜 동체를 들어 올린다. 비행기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발아래 풍광을 가로막는 날개가 성가시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게 아니다. 날개가 공연히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날개가 있어서 비행이 가능하다. 동체에는 식사와 영화를 즐길 편안한 공간이 있지만 날개는 양력을 발생시키기 위해 혹한의 찬 공기와 부딪쳐야 한다. 세상에는 동체 안에서 편안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날개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다. ‘동체 인생’들은 따뜻한 객실에서 식사와 수면을 즐기지만, ‘날개 인생’들은 양력을 만들기 위해 부단하게 날개짓을 계속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도 그렇게 날고 있지만, 지금 양력을 잃어가고 있다.

비행기는 날개로 난다

사람이 공기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듯 대부분의 국민은 자유를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힘든 날개짓을 하는 사람들을 잊고 지낸다. 수천년 동안 임금을 섬기고 살면서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려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사는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한 이승만은 선구자적 날개 인생을 산 분이었다. 산업화와 자주국방을 선도했던 박정희도 대단한 날개 인생을 살았던 분이다. 목숨바쳐 나라를 지킨 장병들과 안보 역군들, 과로로 숨져간 수출역군들, 창의력과 의지만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키워 젊은이들에게 무수히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준 기업인들,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또는 열사의 사막에서 땀흘리며 외화를 가득한 노동자들, 박봉에 시달리며 묵묵히 맡은 임무를 수행한 샐러리맨들, 세계를 돌아다니며 국위를 선양한 외교관들, 신기술 개발로 국가경쟁력을 키운 과학자들,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우며 코피를 쏟은 의료인들, 국민을 선도하는 바른 말을 해온 지식인들...이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날개 인생들이다.

동체 내에는 열심히 날개 역할을 한 후에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떳떳한 동체 인생’도 많지만, 부자 부모를 만난 덕에 또는 기회주의 처신이나 한탕으로 호위호식하는 ‘파렴치형’도 많다. 이들 중에 혹한의 찬공기를 맞는 날개가 있어 자신들이 편하게 지내고 있음을 고마워하는 이는 많지 않다. 날개들이 지켜주는 자유민주주의와 안보 그리고 그들이 일구어내는 국위와 국가경쟁력이 오늘의 번영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음을 실감하는 이는 많지 않다. 비행기가 추락하기 시작하면 뒤늦게 혼비백산이 되어 아우성을 치겠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다. 비행기는 양력을 잃고 실속하면 곧바로 수직 추락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이다. 오늘날 대한민국호는 양력을 잃어가고 있다. 우선, 정치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날개들이 사라지고 있다.

날개가 사라지고 있다

우파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고 좌파란 사회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보수란 과거의 전통과 가치를 중시하면서 필요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고 진보란 변화를 추구하지만 필요한 과거 전통과 가치도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양자 모두는 우파이며 애국세력이다. 즉 자유민주주의 틀 내에서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서로 다른 접근법을 가진 보수 우파이거나 진보 우파이며, 자유민주주의를 흔들고 싶어하는 좌파와는 본질이 다르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좌파들이 ‘진보’를 자칭하고 좌파 정당들이 스스로를 ‘진보정당’이라고 부른다.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종북세력도 ‘진보’를 참칭한다. 그래서 오늘날 진보 우파들은 선거 때만 되면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에 빠진다.

미국과 유럽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교대로 집권한다. 좌파 정치세력은 존 재하지만 통치세력이 되지는 못한다. 일본도 그렇다. 중의원 465석 중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공산당·사민당의 의석은 11석 뿐이다. 이렇듯 자유민주주의를 국체로 하는 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 틀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진보 우파와 보수 우파가 경쟁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물며 공산군의 침략을 겪었고 지금도 곳곳에 좌파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한국에서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제도권 정치에서는 좌파와 ‘무니만 우파’가 정권을 다투는 중에 진짜 우파가 실종된지 오래다. 즉 좌파가 주도하는 정치세력이 미사여구로 포장된 친사회주의적 법과 제도들을 양산하고 있지만, 그들을 견제해야 하는 반대편은 체제·안보 위기를 못 본 체하는 처세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정치세력이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이런 정치인들을 걸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천만 받으면 작대기를 꽂아도 당선되는 지역·이념 대결 구도 하에서 좌파 정치인들과 처세주의자들은 당내 세력만 유지하면 몇 번이고 공천을 받아 당선되어 거물이 되고 대선 후보도 될 수 있다. 이런 기현상 속에서 애국 보수와 애국 진보는 국정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다.

퓰리처 정신으로 무장한 ‘날개 언론’이나 ‘날개 방송’이 있어 나라를 지키는 것도 아니다. 좌성향 언론과 ‘무늬만 우파’ 언론으로 양분되어 있음은 정치지형과 흡사하다. ‘무늬만 우파’ 언론들은 우파적 가치보다는 자사(自社) 이기주의를 우선시한다. 아무리 좋은 담론이든 또는 아무리 큰 일이 벌어지든 사익(社益)과 상충한다고 판단되면 한 줄 보도도 거부하며, 키우고 싶은 정치인을 위해서는 기꺼이 ‘여론 만들기’에 나선다. 정치화된 검사들과 이념화된 법관들이 요로에 남아 있는 검찰과 법원이 체제를 지키는 보루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렵다. 교육이 날개들을 키워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과(過)를 압도하는 공(功)’을 배울 기회가 없다. 이들에게 있어 이승만과 박정희는 ‘부정선거 원흉’이거나 ‘독재자’일 뿐이다.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바른 여론을 확산시키는 여론주도층이 확고하게 구축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우파 시민단체들이나 지식인들이 좌파 정치를 견제하고 국민을 계도하는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다. 좌파 단체들은 돈과 힘을 가지고 좌파 언론의 집요한 지원까지 받지만 우파는 지리멸렬이다. 진보 우파들은 존재감을 잃고 있거나 피아 혼란 속에 좌파들을 편들고 있고 보수 우파들은 이 거리 저 구석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 중이지만 이들을 하나로 모을 깃발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호가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우려한다.

부자들이 잘 죽는 나라가 되어야

자본주의는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간의 차별성이 너무 크다는 근본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격차는 정부 정책만으로는 메울 수 없기 때문에 늘 ‘정치적 뇌관’이 된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는 예외없이 모두가 가난해지고 사회주의 체제를 감독하는 특권층이 생겨나면서 더욱 심한 불평등이 야기된다. 그래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책으로 사회주의를 읽은 사람은 얼치기 사회주의자가 되지만 몸으로 사회주의를 겪은 사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빈부 격차 해소,’ ‘정의,’ ‘젠더 평등,’ ‘군 인권,’ ‘분권’ 등 사회주의자들이 외치는 ‘약자 담론’들이 쉽게 사람들의 폐부를 파고 든다. 하나 하나의 제목 자체는 너무나 당연하고 문제없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모두를 합쳐서 깊이 들여다 보면 가족의 유대를 파괴하고 대한민국을 쪼개는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좌파는 고단수다. 좌파를 해야 멋있는 것으로 여기는 ‘얼치기’들은 이에 환호하며, 그것들이 어디를 향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신경하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자신들도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은 빈부 격차, 인종 차별, 마약 등 다양한 문제들을 가진 나라이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부자들이 잘 죽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즉, 기업은 상속하되 부(富)는 사회에 환원하는 부자들이 많다. 1960년대 헐리우드 영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배우 커크 더글라스는 2020년 죽음을 앞두고 6천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과 의료기관 지원금으로 쾌척하면서 자식에게는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아름다운 눈매와 순결한 이미지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은 1989년 은퇴 후 유니세프(UNICEF) 대사로 아프리카 오지의 아이들을 돌보는데 여생을 바쳤다. 철강왕 카네기는 66세가 되던 1901년 사업에서 손을 떼고 벌었던 돈을 전부 사회에 환원했다. 2천5백 개가 넘는 공공도서관, 카네기멜론 공대, 카네기 연구소, 카네기평화재단, 카네기홀, 카네기 박물관 등은 그가 남긴 족적은 엄청나다. 해리티지 재단도 맥주회사에 의해 설립되었고, 무수히 많은 대학들이 독지가들의 기부금으로 설립되었다.

워싱턴에는 정책을 연구·건의하는 연구기관들이 200여 개나 있다. 대부분이 부자들이 사회에 환원한 돈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특정 분야 전문가나 풍부한 국정경험을 가진 은퇴 공직자들이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쉴새없이 견해를 쏟아낸다. 언론은 이들의 견해를 전파하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여론이 미국을 이끈다. 그래서 어떤 대통령이 하에서도 자유민주주의라는 큰 틀은 흔들리지 않는다. 미국은 ‘잘 죽는 부자들’이 만들어내는 날개들 덕택에 사회주의 사상의 발아점인 자본주의의 맹점들을 메워왔고 국민도 좌파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날개 정치도 날개 언론도 그리고 날개 여론주도층도 없는 한국에서는 좌파 대통령이 등장하면 자유민주주의 근간은 속절없이 흔들린다. 지난 5년이 그런 세월이었다.

한국에는 날개들을 키워내는 부자들이 많지 않다. 따뜻한 동체 내에서 자자손손 호강을 누리고자 절치부심하는 졸부들이 더 많다. 이들에게 있어 고급 룸살롱을 돌면서 황제놀음 하기, 태국에 원정가서 곰발바닥 벗겨 먹기, 홍콩 백화점에서 싹쓸이 쇼핑하기, 해외 원정 도박으로 수백만 달러 탕진하기 등은 그저 ‘내 돈 내 맘대로 하기’일 뿐이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생명을 되찾아 가리라”라는 성경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날개의 존재를 의식할 알 리가 없다. 부릅뜬 눈으로 북녘을 주시하는 초병들이 자신들의 부를 지켜주고 있음을 알 턱이 없다. 한국이 어떻게 열악한 안보환경을 극복하고 10대 경제강국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졸부 기업들은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달라지면 크게 당황하여 ‘4류 정치’를 탓하지만 자신들을 흠집을 폭로할 수 있는 좌파 단체들에게는 ‘입막음 돈’을 희사하여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 준다. 그러면서도 애국 보수 및 애국 진보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기여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당장 돈이 되는 것과 관련한 경제관련 연구소들은 설립하지만 체제와 안보를 수호하는 석학들을 기르는 데에는 무관심하다. 물론, 한국에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에 거금의 사비를 털어놓는 K 회장 같은 분들도 계신다. 하지만, 한국에 K 회장과 같은 부자가 몇이나 있나?

‘보수와 진보’라는 두 날개로 날아야 한다

비행기는 두 날개로 난다. ‘대한민국호’도 두 날개로 날아야 한다. ‘좌와 우’라는 두 날개가 아니라 애국 보수와 애국 진보라고 하는 두 개의 우파 날개로 날아야 한다. 그것이 헌법이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명시하고 있는 이유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대한민국호의 비행을 계속하게 해준 날개들이 있었다. 왜군을 막아낸 이순신 제독은 조선을 구한 날개였고, 다부동 전투의 영웅 백선엽 장군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적화통일을 막아낸 날개 군인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역임한 후 세계 오지를 돌면서 ‘한국인 슈바이처’로 살았던 이종욱 박사, 남수단 오지에서 평생 의료봉사를 하다가 숨진 이태석 신부 등도 숭고한 날개 인생을 살았던 분들이다. 대한민국의 날개로 살았던 외국인도 많다. 6·25 전쟁에서 산화한 3만7천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은 대한민국을 지도상에 살아남게 한 날개들이었다. 1951년 지평리에서 중공군을 맞아 분전했던 프랑스의 몽클라르(Ralph Monclar) 장군,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의 도끼에 숨진 보니파스(Arthur Bonifas) 대위와 배럿(Mark Barrett) 중위 등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1960년대 꽃다운 나이에 소록도에 들어와 40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돌본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안느(Marianne Stoeger) 수녀와 마가렛(Margareth Pissarek) 수녀도 그런 날개들이었다. 양화진에 영면하고 있는 130 명의 선교사들도 ‘한국에서 죽기 위해’ 이 땅에 와서 사랑을 전파하며 살다 간 고마운 외국인 날개들이었다.

지금도 애국 열정으로 정직하게 소임을 다하는 군인, 기업인, 과학자, 공직자, 노동자, 전문가, 지식인, 교육자, 언론인, 경찰, 법조인 등이 있어 대한민국호는 비행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양력을 잃어가고 있다. 정치판에서 애국자들이 자취를 감추는 중에 국가보안법 폐지, 한미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선전선동을 앞세우고 정치와 사회 그리고 길거리를 장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반대편에 있는 정치세력의 관심사는 언제나 ‘정치적 생존’이며 그들에게 있어 체제 위기를 논하는 사람들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하는 극우’일 뿐이다. 지역대결과 이념대결이 만들어주는 다선(多選) 거물들이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중에 애국심과 소신 그리고 능력을 겸비한 거물들이 성장할 공간은 협소하며, 국민이 가질 수 있는 선택지는 극히 제한된다. 결국, 선거 때가 되면 보수 우파는 처세주의 세력에 표를 주고 진보 우파는 ‘진보’를 참칭하는 좌파에 표를 주지만 선거가 끝나면 ‘버려진 집토끼’가 되고 만다. 이런 현상은 사회의 각 분야에 확산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동체를 점거한 비행기는 오래 날지 못한다. ‘동체 인생’이 ‘날개 인생’의 고마움을 모르는 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번성하기 어렵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동체도 부서지고 날개도 부서진다. 일등석 승객도 죽고 이코노미석 승객도 죽는다. 기업들이 돈을 잘 쓰고 부자들이 잘 죽는 나라를 만들지 못하면 대한민국호는 언제 실속·추락할지 모른다. “사람이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이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다.” 1919년 카네기가 숨을 거두면서 남긴 말이다. 한국에 카네기와 같은 부자가 몇이나 있나?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전 통일연구원장, 전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