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날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현지시간 10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뉴욕주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혐의는 가족 기업을 통해 자산 가치를 허위 조작했는가의 여부다. [사진=뉴욕타임즈]
도날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현지시간 10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뉴욕주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혐의는 가족 기업을 통해 자산 가치를 허위 조작했는가의 여부다. [사진=뉴욕타임즈]

도날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하 트럼프)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을 비롯해 각종 자산가치를 조작했단 혐의와 관련해 뉴욕주 검찰에 출두해 4시간에 걸친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는 미국 수정헌법 5조를 거론하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트럼프는 현지시간 10일 오전 9시쯤 뉴욕주 검찰에 도착해 검찰 조사에 임했으며 오후 3시가 넘어 돌아갔다. 조사시간은 4시간이지만 총 걸린 시간은 6시간이 넘었던 셈이다. 그동안 트럼프측은 검찰조사를 거부해왔지만, 올 봄 여러 판사들이 출두하라 명령하면서 반강제로 조사에 임하게 됐다.

검찰조사에서 트럼프는 레티샤 제임스(Letitia James) 뉴욕주 검찰총장(이하 제임스) 측과 마주 앉은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는 미리 준비해온 성명문을 읽으면서 제임스를 "변절 검사(renegade prosecutor)"라 불렀으며 조사 내내 검찰측 질문에 "같은 대답(same answer)"이라고만 대답했다. 트럼프가 유일하게 구체적으로 언급했던 것은 제임스와 그녀가 주도한 검찰 조사를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마녀사냥"이라 공격한 발언이었다.

현지시간 10일 오전 9시경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탄 SUV차량이 뉴욕 검찰청 앞으로 들어가는 모습 [사진=뉴욕타임즈]
현지시간 10일 오전 9시경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탄 SUV차량이 뉴욕 검찰청 앞으로 들어가는 모습 [사진=뉴욕타임즈]

트럼프가 이렇게 말한 데엔 제임스가 민주당 출신이며 뉴욕주에서 트럼프의 주요 정적으로 거론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임스는 2019년 3월 뉴욕주 검찰총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트럼프 가족 기업인 '트럼프 협회(Trump Organization)'가 체계적으로 트럼프 소유 자산의 가치를 허위 공시했는지에 대한 민사 수사를 시작해 3년간 조사해왔다. 트럼프로서는 제임스가 '눈엣가시'인 셈이다.
  
트럼프가 조사를 받으면서 사실상 묵비권을 행사한 것은 미국의 수정헌법 5조에 기반해서였다. 수정헌법 5조는 '불리한 진술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right against self-incrimination)을 보장한다. 정확한 표현은 "그 누구도 형사 사건에서 자기 자신에 반하는 증언을 강요받지 않는다(no person shall be compelled in any criminal case to be a witness against himself)"다. 다만 묵비권 행사가 트럼프 자신의 뜻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뉴욕타임즈는 '스스로를 변론하길 좋아하는 트럼프가 자신의 법률자문팀의 조언을 받아 묵비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레티샤 제임스 뉴욕 검찰총장. 민주당 출신인 제임스 총장은 2019년 3월 취임하면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이 소유한 자산 가치를 허위로 조작했는지 조사에 바로 착수하기 시작했다. 조사는 3년 이상 이어졌다. [사진=뉴욕타임즈]
레티샤 제임스 뉴욕 검찰총장. 민주당 출신인 제임스 총장은 2019년 3월 취임하면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이 소유한 자산 가치를 허위로 조작했는지 조사에 바로 착수하기 시작했다. 조사는 3년 이상 이어졌다. [사진=뉴욕타임즈]

트럼프가 묵비권을 행사한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으로 분석되지만 여러 혐의에 시달리고 있어 말실수가 또다른 문제를 꼬리에 꼬리를 물듯 야기할 수 있단 우려가 가장 크단 평가다. 트럼프가 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검찰에 도움이 될 만한 발언을 '의도치 않게' 할 수 있단 것이다.

거기에 트럼프는 이미 많은 혐의에 시달리고 있단 점도 부담으로 작용한단 분석이다. 2020년 대선 부정선거론, 2020년 1월 6일 일부 과격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사태, 조지아주 선거 개입 혐의가 그것이다. 이와 더불어 가장 최근엔 FBI가 트럼프측이 국가 기밀 자료를 부실하게 보관하고 있다며  플로리다주에 있는 트럼프 소유의 마르-아-라고(Mar-a-Lago) 자택을 수색하기도 했다. 

위증의 위험성도 존재한다. 제임스가 수사하고 있는 건은 민사이기 때문에 트럼프에 대해서 형사 기소를 할 순 없지만, 맨하탄 검찰이 동일한 건으로 형사 수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을 하거나 증거와 불일치되는 대답을 하게 되면 위증죄가 추가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이유로 트럼프가 묵비권을 행사하란 법률팀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트럼프측이 방어 논거로 든 수정헌법 5조는 형사 소송에만 적용된단 점에서, 제임스가 수사중인 민사사건에 대응하기엔 적절치 않단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여기에 미국 배심원들은 민사 사건에 있어 피고인이 수정헌법 5조의 특권을 언급할 경우 '부정적 추론'을 하는 경향이 강하단 문제도 있다. 형사사건에서 수정헌법 5조는 피고인이 자신을 변호할 논거로 작용돼 배심원이 정상참작을 할 수 있지만, 민사사건에선 오히려 피고인이 뭔가를 숨기고 은폐한단 인상을 배심원들에게 줄 수 있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가 민사에서 수정헌법 5조를 자기 변호의 근거로 든 것은 자칫 '자충수'로 작용할 수도 있단 분석이다.
 
재밌는 사실은 트럼프가 정치를 시작하고 난 후 정치인들이 수정헌법 5조를 들어 자기 방어를 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그랬던 그가 이번에 자신이 비판했던 행동을 그대로 했단 것이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중 아이오와주 유세에서 "누군가가 수정헌법 5조를 거론한다면 이는 사실상 그가 범법행위를 했음을 시인하는 것"이라며 "만일 결백하다면, 왜 수정헌법 5조를 들먹이겠느냐"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던 트럼프지만 정치 입문 전엔 자기 변호를 위해 정치인들이 수정헌법 5조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트럼프는 1998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탄핵 소추를 받아 조사가 이뤄질 때 클린턴 대통령은 수정헌법 5조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대통령이 수정헌법 5조를 거론해야 한다는 게 끔찍한 일이다"라면서도 "그는 그랬어야만 한다, 내 생각에 클린턴이 현 상황보다 더 일을 악화시킬 뭔가를 할 수 있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또한 트럼프는 실제로도 수정헌법 5조를 들어 자기 변호를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첫번째 부인 이바나 트럼프와의 이혼하는 과정에서, 이혼 법정에서 답변을 거부하며 수정헌법을 거론했었다.

트럼프가 조사받기 전 그의 자녀인 이방카 트럼프와 트럼프 주니어도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이들은 수정헌법 5조를 언급하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즈는 이 사건에 있어 관건은 제임스 총장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실제 고소할지, 아니면 상당한 수준의 벌금을 부과하는 선에서 합의할지의 여부라고 예측했다. 만약의 경우 제임스가 트럼프를 고소해 민사 재판에서 이긴다면, 트럼프에겐 매우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고 뉴욕에서 사업 활동이 제한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91년 당시의 도날드 트럼프. 일각에선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법적 소송을 '자신을 불공정하게 비난하려는 노력'으로 오랫동안 묘사해왔으며 이는 '역사'라 해도 될 정도로 그의 인생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 보기도 한다. [사진=뉴욕타임즈]
1991년 당시의 도날드 트럼프. 일각에선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법적 소송을 '자신을 불공정하게 비난하려는 노력'으로 오랫동안 묘사해왔으며 이는 '역사'라 해도 될 정도로 그의 인생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 보기도 한다. [사진=뉴욕타임즈]

박준규 기자 pjk7000@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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