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산업 지원을 내세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안(IRA)’이 미국 상원을 통과했다. 인플레이션을 무력화하겠다는 표면적인 이유와 달리, 실제로는 ‘중국 견제’가 목적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오바마 정부보다 4배 키운 기후변화 대응 예산, 중국 견제가 목적

지난 7일(현지시간) 미국 상원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기후변화 대응에 3690억달러(약 484조원)를 투자한다는 내용 등이 담긴 '인플레이션 감축법안(IRA)'을 본회의에서 가결 처리했다. 하원의 표결이 남았지만 민주당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이달 내에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 등 모든 절차가 완료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린산업 지원을 내세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안(IRA)’이 미국 상원을 통과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그린산업 지원을 내세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안(IRA)’이 미국 상원을 통과했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이 법안이 최종 통과될 경우 태양광·풍력·수소 등 친환경 에너지와 전기차·배터리 산업에 대해 세액공제·보조금 등이 지원되면서, '그린산업' 시장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9년 오바마 정부가 시행한 '그린뉴딜'의 예산 규모가 900억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4배 이상 규모가 커진 이번 법안의 영향력은 월등할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이 법안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미국이 반도체에 이어 배터리까지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방안이 담겼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2024년부터 중국에서 배터리 소재와 부품을 조달한 전기차를 구매한 소비자는 보조금(대당 최대 7500달러)을 받을 수 없다’는 강력한 조건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중국이 70~80%를 장악한 배터리 공급망에서 벗어나, 독자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보조금 조건 까다로워 배터리 기업도 비상 걸려...미국 전기차도 70%가 보조금 못받을 듯

그런데 세계 완성차 기업들뿐 아니라 배터리·소재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특히 미국 내 완성차 업계는 ‘탈 중국 배터리 소재 조달이 비현실적’이라며 반발이 만만치 않다. ‘미국 전기차 모델 중 70%가 보조금에서 탈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미국 자동차혁신연합 존 보젤라 대표는 “이 기준대로 하면 그 어떤 전기차도 완전한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자동차 업계가 미 중서부·동남부를 중심으로 광물 조달을 위한 많은 투자를 하고 있지만, 하룻밤 사이에 가능한 일은 아니라며 난색을 표한 것이다.

​중국의 배터리 공장. [신화 연합뉴스 자료사진]​
​중국의 배터리 공장. [신화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에서 세액공제 형태로 제공되는 전기차 보조금 7500달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은 3가지이다. 첫째, 7500달러의 절반을 받으려면 배터리의 핵심 자재(리튬·니켈·코발트 등)를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공급받아야 한다. 이 비율은 2024년 40%부터 시작해 2026년에는 80%까지 늘어난다. 두 번째, 나머지 절반의 보조금은 북미에서 제조되는 배터리의 주요 부품(양극재·음극재·전해액·분리막) 비율이 50% 이상이어야 받을 수 있다. 이 비율은 2028년 100%까지 확대된다. 셋째, 내년부터는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조건도 달았다. 미국 자동차 시장을 선점해야 하는 완성차·배터리 업계는 소재·부품 공급망 구조를 전면 재조정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국내 배터리 업체, 핵심자재 95% 중국 수입...현대차는 당장 내년부터 직격탄 맞아

국내 전기차 배터리 업체들에게도 압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견제로, 국내 배터리 업체가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지만, ‘미국이 내건 조건이 까다롭다는 점’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배터리 핵심 자재(니켈·코발트·망간 혼합물)와 양극활물질(전구체에 리튬을 결합한 것)의 95%를 중국에서 수입한다. 중국 화유코발트·GEM 같은 업체들이 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회사들과 합작사를 설립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업계에서는 “한국이 ‘칩4 동맹’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배터리·전기차 분야를 더 압박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현대차에게도 풀어야 할 과제가 놓였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번 법안의 지원 대상은 미국 내에서 생산된 제품이라, 전기차 최종 조립을 북미에서 해야 하는 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 ‘현지 생산기지 구축이 필수’라는 부담을 안게 된 것이다.

미국 테네시주에 있는 폭스바겐 공장의 전기차 생산 현장. 현대차그룹도 당장 ‘미국 내 생산기지 구축’이라는 과제를 안게 됐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 테네시주에 있는 폭스바겐 공장의 전기차 생산 현장. 현대차그룹도 당장 ‘미국 내 생산기지 구축’이라는 과제를 안게 됐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현대차그룹은 연내 GV70 전동화 모델을, 2024년 EV9을 현지 생산할 계획을 갖고 있지만,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아이오닉5와 EV6의 현지 생산 계획은 아직 수립되어 있지 않다. 모두 국내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물량이다. 이대로라면 내년부터는 미국에서 친환경 보조금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현대차, 당분간 미국시장서 보조금 포기해야...11월 미국 중간선거가 변수

특히 국내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모델의 해외 생산을 위해서는 노조와 합의해야 한다는 점도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현대차가 추진 중인 미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 공장은 2025년에나 완공되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현대차는 당분간 미국에서 주요 모델에 대한 보조금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하지만 11월 중간선거 결과에 따라 보조금과 관련한 정책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전기차 보조금 지급은 바이든 정부가 추진 중인 친환경 정책의 일부이다. 만약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 상황이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간 공화당은 바이든 정부의 화석연료 사용 억제 정책이 물가 상승을 부채질했다고 비난해왔다. 공화당이 이기면 미국 내 석유 생산을 장려하고, 바이든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 제동을 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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