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칼럼] '진보'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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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2.08.08 08:38:16
  • 최종수정 2022.08.0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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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좌파들이 진보의 가치관에 가장 적대적
'소수자 배려'와 '소수자 우선주의', 그 의미는 천양지차
좌우 모두 진보, 단지 방법론의 차이...그렇다면 진보란 무엇인가
진보는 생산력의 발전과 자유의 확대 여부로 평가되는 것
진보라면 현재 소수여도 미래에 다수가 될 수 있는 가치 추구해야
페미니즘 비롯한 PC주의 심판하려면 진보의 개념과 역할부터 재정립하자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진보=좌파, 보수=우파라는 명제가 일종의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우파 인사들 중에서도 좌파들을 가리켜 ‘진보 진영’이라고 불러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좌파가 진보의 가치를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심지어 지금 좌파들의 행보를 보면 진보의 가치관에 가장 적대적이라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한때 좌파가 진보와 동일시되던 것은 진보가 의미하던 것이 비교적 명료하던 시대에 좌파가 가장 비타협적으로 그 가치를 위해 투쟁한다는 의미였다.

지금은 진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분명치 않다. 한때 민주주의, 인권, 법치 등이 진보적 가치로 진영을 초월하는 합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진보라고 자임하는 좌파 진영이 추구하는 가치를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그건 소수자(minority) 우선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소수자 우선주의가 진보의 가치를 담아낼 수 있을까?

소수자를 존중하는 것이 진보의 가치를 위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수자 배려와 소수자 우선주의는 그 의미가 천양지차이다. 이러한 시대적 착오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시대의 진보는 영영 그 방향을 잃고 좌초하게 될지도 모른다.

진보(progress)는 좌와 우,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의 범주를 넘어 인류가 추구할 수밖에 없는 가치이다. 좌와 우의 차이는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법론의 차이일뿐 그들 모두 이 사회와 현실을 좀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가려고 한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실제로 현재 진보적 가치로 인정되는 수많은 변화는 좌파와 우파가 별 차이없이 기여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진보란 것이 진영의 차이를 떠나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이건 소수자 우선주의가 근본적으로 진보일 수 없다는 대전제 아래 이뤄지는 접근법이다. 진영의 차이를 떠나 공유하는 가치란 건 소수자의 가치와는 본질적으로 상호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진보(progress)는 현실주의, 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물질주의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담론 주도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진보라고 자부하는 어설픈 도덕주의자 깨시민들이 들으면 입에 게거품을 물겠지만, 이것은 진보의 결코 변경될 수 없는 특질이다.

진보(progress)란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진보가 역사의 진행 방향, 나아가서는 역사의 궁극적 종착점을 상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역사가 특별한 진행 방향 없이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방황하거나 또는 영겁을 윤회하는 질서라고 여긴다면 진보라는 가치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물질적 환경에 근거한다는 얘기이다. 물질이 아니라면 앞으로 나아가고 말 것도 없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변화나 행동 자체가 측정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질이 아닌 관념은 측정, 즉 계량화가 불가능하다.

측정과 계량화는 다시 말해서 과학의 영역이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진보의 철학은 관념론이 아닌 유물론일 수밖에 없다. 이제 과학은 물질의 영역을 넘어 인간의 관념과 사고방식까지 대상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 다루는 대상을 물질화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접근 방법론은 동일하다.

물질의 법칙은 인간의 의식구조와 인간들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의 운동에도 관철된다. 이를 흔히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이 하부구조는 물질적 가치의 생산과 유통, 분배의 과정 즉 경제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진보한다는 것은 인간사회의 하부구조인 경제적 조건이 변화하고, 이것이 다시 그 상부구조인 정치와 사회를 결정하며 이는 다시 그 상부구조인 문화와 인간의 의식구조를 결정하는 프로세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제적 조건을 흔히 생산력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한다.

진보를 이룩하는 가장 중요한 힘은 생산력의 발전이다. 이 생산력의 발전이 불러일으키는 정치와 사회 분야의 발전이 자유의 확대를 불러온다. 생산력의 발전과 자유의 확대는 사실상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자유의 확대는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동반 현상이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진보의 법칙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진보적 성과라고 말하는 것들의 배경을 따져보면 그건 하나같이 생산력 발전 즉 경제적 조건의 개선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의 확대란 과거에는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했던 직업이나 재능이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을 말한다. 신분상의 제약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자본주의의 요구에 근거한 것이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고용 계약은 과거의 신분제도와 모순 충돌하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노동 계약을 맺을 수도 있고, 파기할 수도 있는 질서야말로 이런 신분상의 제약을 탈피한 자유의 핵심 원리이다.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은 자유의 확대는 결코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하며 모래로 쌓은 성이나 마찬가지다.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자유가 확대되며 그렇게 확대된 자유가 다시 생산력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 진보의 결코 변할 수 없는 프로세스이다.

페미니즘이 진보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가사에만 국한됐던 여성 노동이 남성들과 대등한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가 생산력의 발전(기계 도구의 발전)에 기인했거니와, 그렇게 사회적으로 해방된 여성인력이 대규모로 생산 현장에 투입된 것은 전체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불가역적이다. 하지만 최근 페미니즘은 진보적 성격보다 반동적 성격이 더 두드러지는 느낌이다. 페미니즘이 내세우는 여성 우선주의 논리가 노동현장에서 정당한 평가와 보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논리가 확산될수록 그 폐해는 심각해진다.

여성 할당제는 생산력이 발전할 수 있는 근본 메커니즘을 무너뜨리는 접근이다.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능력이나 생산 기여도와 무관하게 대우받을 경우 이는 그 자체로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생산 현장의 실사구시와 신상필벌 등 노동규율을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리게 된다.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편견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이른바 ‘유리 천장’에 부딪히기 때문에 여성 할당제 같은 여성우대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악으로 악을 덮는 접근이다. 공정한 능력주의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고 봐야 한다.

페미니즘의 확산에 따른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 향상이 저출산 현상 심화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다. 저출산은 생산력 유지와 발전의 핵심 요소인 노동력의 공급이 축소재생산된다는 의미이다. 이 단계에 오면 페미니즘은 진보적 운동으로서의 가치는 상실하고 그저 종교적인 신념체계에 불과하게 된다.

자유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봐도 페미니즘은 진보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페미니즘이 일부 재능이 탁월한 여성이나 사회참여 성향이 강한 여성들에게 기회 즉 자유의 확대를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자유의 확대가 그렇지 못한 대다수 평범한 여성들의 희생 즉 자유의 축소를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만한 정황이 늘어나고 있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적대시하고 전통적인 가정의 기능 즉 어머니와 아내의 여성상을 적대시한다. 하지만 대다수 평범한 여성들에게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박탈하는 것이 과연 그 여성들의 자유의 확대로 이어질까? 이건 그 여성들에 대한 학대이자 자유의 박탈 내지 축소라고 봐야 한다.

진보는 일종의 축적이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시계열로 봤을 때는 미래 즉 어떤 역사적 귀착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경험과 지적자산의 축적 위에서 새로운 전망을 획득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이 전통적인 가정의 기능을 적대시한다는 것은 자신이 딛고 선 토대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는 페미니즘이 스스로 진보의 성격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전통적인 여성상에 대한 적대가 자유의 확대가 아닌 축소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좌파들이 페미니즘을 비롯한 PC주의를 합리화하는 가장 큰 전제가 이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어떤 행동이건 정당하다.'

성 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금지를 주장하는 논거가 이것이다.

그런데 좌파들이 간과하는 중대한 과학적 사실이 있다. 인간 그리고 그들로 구성된 사회적 현실은 가치중립적인 실험실 속에 가두어서 변수를 통제해 실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성 소수자나 기타 전통적 가치관에서 벗어난, 사회적으로 마이너한 흐름들이 사회에 실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판단할 과학적 근거는 매우 부족하다. 인위적으로 변수를 통제해 실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동성 부부에게 자녀 입양 또는 실험관 아기 출산을 허용했을 때 그렇게 동성 부부에 의해 양육된 아이가 어떻게 자라나게 될지 검증된 데이터가 있나? 아직까지는 충분한 데이터가 축적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좌파들은 어떻게 ‘동성 부부가 다른 사람의 삶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들의 주장이야말로 과학적 근거를 상실한 억지 아닐까?

굳이 입양아의 경우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동성 부부는 그 자체로 공동체의 자산에 마이너스 효과를 불러오는 존재이다. 미래 세대의 재생산 즉 인구 증가에는 전혀 기여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생산해낸 자원의 분배에는 다른 이성 부부들과 똑같이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정해야 할 것이 인류사의 과정과 경험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역사적 실험실이라는 사실이다. 일부러 변수를 통제해서 실험하지 않아도 인류사라는 공간 자체가 수많은 사회적 변수들과 시도들에 대한 실험실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전통적 가치관이라며 무시하고 배척하기 쉬운 고정관념들이 실은 인류가 긴 역사를 통해 수많은 실제 사례를 통해 배우고 검증해온 교훈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동성애를 배척해온 사회적 고정관념이 있다면 그 고정관념을 무조건 배척하기 전에, 그런 교훈을 도출해온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인류사적 경험이 쌓여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그런 고정관념을 낳은 방대한 인류사적 경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면서생들이 책상머리에서 조합해 만든 이론으로 전통적인 가치관을 무작정 배척하는 어리석음은 이제 극복할 때가 됐다. 지금 페미니즘을 비롯한 PC주의는 반문명적인 성향을 강화해가고 있다. 인류가 역사를 통해 쌓아온 문명의 성과를 부정하는 방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소수자 배려는 진보일 수 있지만 소수자 우선주의는 진보의 가치관에 적대적이다. 진보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이는 현재는 소수여도 미래에는 다수가 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노동자 계급을 혁명의 주역으로 상정한 것도 이들이 미래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 때문이었다. 생산 현장에서 획득하게 되는 지적 도덕적 능력, 사회를 발전시키는 중추적 역할이 그것이다. 즉 사회를 발전시키는 다수(majority)가 될 가능성 때문에 소수자 배려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하지만, 성 소수자나 페미니스트들이 그런 역할을 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우리 시대는 진보의 개념과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미래의 모색에서 진보는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소수자 우선주의에 대한 재평가 그리고 생산력과 자유의 개념에 대한 인식 정립이 시급하다고 본다.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국민의힘 광주광역시 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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