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장관은 지금 우리나라의 많은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교과서라는, ‘믿는 매체’에 얼마나 많은 학생이 발등을 찍히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교육’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독’을 미래 세대에 주입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의도를 가진 교사들에 의해, 그저 생각 없는 ‘직장인’ 교사들에 의해 역사와 사회가 얼마나 많이 왜곡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어린 시절부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적대 의식을 갖도록 하는 선동이 수많은 교실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알고 있는가? 그런 교육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이어서 장래까지 망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2016년에 제작된 ‘아메리카 패스토럴’이라는 영화가 있다. ‘패스토럴(pastoral)’은 ‘목가, 목회’라는 뜻으로, 1960년대의 ‘아메리카 드림’을 완곡하게 비트는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부잣집 아들에 고교 시절부터 스포츠 스타였고 뛰어난 외모와 따뜻한 성품을 가진 남자 주인공. 미스 뉴저지 출신의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메리라는 사랑스러운 외동딸을 얻는다. 이들은 한동안 정말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다니던 딸 메리가 반정부 단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이 가정에 불행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극렬한 반정부주의자가 된 메리는, 정부에 의해 행해지는 전쟁의 참상에는 관심 없고 개인의 행복만 추구하는 부모를 증오하며 자신의 유복한 환경을 저주한다. 급기야 마을에 폭탄 테러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으로 의심받은 메리는 가출한다. 이후 그들의 가정은 급속도로 붕괴되고 만다. 
 주변 사람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딸을 포기할 수 없었고 몇 년이 지난 후 가까스로 딸 메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반정부주의자들 사이에서 강간과 폭력에 시달리던 메리는 그들에게 회의를 느꼈으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치고 어두운 뒷골목에서 자신을 학대하며 지내는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하고 장례식에 메리로 추정되는 여인의 뒷모습이 보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소개나 대부분의 평론에서는 자식 때문에 자랑스럽던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면서도 끝내 자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져버린 아버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나는 딸 메리의 망가진 삶이 더 주목해야 하는 부분으로 보였다. 그릇된 교육과 무책임한 선동이 멀쩡할 수 있는 한 인생을 얼마나 깊은 수렁에 밀어넣을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미 한때 아름다운 삶을 누렸고, 절대 그럴 수 없었지만 딸을 포기하고 잊으면 나름 그럴듯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딸 메리는 사춘기 이후로는 제대로 된 삶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남은 생도 지옥 속에서 불행하게 보내야 한다. 그녀의 삶은 말 그대로 송두리째, 완전히 망가져버린 것이다. 그럼 메리를 그렇게 불행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사람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메리에게 반정부주의, 혁명 사상 등을 불어넣고 메리가 행동하도록 선동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메리의 파멸에 대해 조금도 책임지지 않는다. 

딸이 반정부 단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영화 속 가정에 불행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딸이 반정부 단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영화 속 가정에 불행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학교 교실에서는 ‘메리의 불행’과 같은 일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대한민국이 ‘태어나서는 안될’ 나라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사도 많다. 그들은 이 나라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대통령들을 ‘독립 자금의 횡령을 일삼은 방탕한 노인네’나 ‘수많은 민주 인사를 탄압하고 죽인 독재자’라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대한민국은 그런 ‘악의 뿌리’를 가진 나라로서 아직도 그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그래서 ‘헬조선’이 될 수밖에 없는 나라라고도 가르친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 ‘박정희는 X새끼’라고 노골적으로 외치는 교사도 있다. 감수성 예민한 학생들은 그런 교육을 받고 어린 시절부터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깊은 적대감과 국민으로서의 자괴감을 키우며 자라게 된다. 학생들은 그런 나라 ‘헬조선’에 태어나 살고 있는 자신들이 얼마나 불행하다고 여길 것인가. 

 우리나라는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은 가까운 과거에 식민지에서 간신히 해방되고 엄청난 전쟁을 치러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내로라할 만큼 풍요롭게 사는 나라는 아니었다. 그런데 놀라운 혜안을 가진 지도자들을 만난 덕에, 또 국민이 희생하고 노력한 덕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세계 10위 안팎을 넘나드는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6‧25전쟁 때 참전했던 16개국 중 여러 나라보다 상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런 성장을 지켜본 참전 용사들조차 대한민국을, 자신들의 헌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런 자랑스러움을 학생들에게 심어야 할 학교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가르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선각자가 아니라 전쟁 때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이기적인 노인이고 부정 선거를 저지르다 쫓겨난, 왜곡된 평가의 주인공일 뿐이다. 민주화 투쟁을 제외한 대한민국의 역사는 부끄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선거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한 국민에게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도록 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전쟁이 끝난 후 북한이 우리보다 국력이 뛰어나던 시절에도 저들이 우리 대한민국을 넘보지 못하게 한 것이 누구의 힘이었는지, 그 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 누구의 공로인지에 대해서 학교는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일들의 이면에 있는 어두운 부분만 학생들에게 강조하여 관련자들에 대한 경멸과 증오심만을 키워준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뤄낸 경제 발전은 그 전 정권에서 만든 아이디어를 그냥 실행한 것에 불과하고 가만히 있었어도 우리나라는 지금처럼 잘 살게 되었을 것이라 가르친다. 박정희 대통령은 다만 독재자의 다른 이름으로 학생들의 기억에 각인되고 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학생들은 좌경화되고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적으로 여기게 된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학생들은 좌경화되고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적으로 여기게 된다.

 학교에서 사용되는 검인정교과서가 좌편향되어 있다는 얘기는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진 얘기다. 역사는 물론이고 사회 교과서 심지어는 국어나 문학 교과서까지 좌편향의 요소가 곳곳에 박혀 있다. 교과서에 인용된 문학 작품 속에서는 6‧25전쟁 중 붉은 별을 군모 한가운데 달고있는 인민군이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한민국 아이들과 친구가 된다. 그는 인민군이 아니라 ‘어린 우리의 친구였고 한패였다’라고 표현되기도 하다. 그런 글을 쓴 작가가 문제가 아니다. 그 작가가 쓴, 수많은 인간미 넘치는 경험담 가운데 교과서 편자는 왜 하필이면 인민군과 친구가 되는 글을 골라 실었을까? 그 의도를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교과서뿐만 아니다. 영화 속에서 잘 생기고 인기 있는 남자 배우는 북한 군인이나 공작원으로, 투박하고 거친 외모를 가진 배우는 남한 요원으로 등장하는 것도 오래된 일이다. 학교에서는 그런 영화를 수업 시간에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겉으로는 남과 북의 화해와 휴머니즘을 강조하고 있지만 학생들은 ‘매력적인’ 북한 사람에 호감을 갖고 우리의 주적에 대해 경계심을 풀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면 공산주의자들을 잡아내는 대한민국의 군인, 대한민국의 경찰이 오히려 ‘우리의 적’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경로를 통해 노골적으로 혹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학생들은 좌경화되고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적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자부심과 자존감을 잃고 불행해진다. 숱한 ‘메리의 탄생’이 이뤄지는 것이다. 공교육에도 이런 요소가 다분하니 비교적 교‧강사의 발언과 주장이 자유로운 사교육 현장에서는 얼마나 많은 불행한 메리를 만들어낼까?

 실제로 나는 불행한 삶에 발을 들여놓는 ‘메리’를 여럿 목격했다. 학생들에게 “지금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환경 문제라든가 불우한 이웃돕기, 남북 통일 등이 모범답안인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전교 1‧2등을 다툰다는, 영민하게 생긴 중1 학생이 “정권 교체요”라고 똑똑히 대답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박근혜 정부 초기의 일이다. 또 명문 대학교 재학 중이라는 대학생이 토론회에서 “박정희는 약간의 공로라도 있지만 이승만은 공(功)은 하나도 없고 과(過)만 있다”라고 말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정말 불행해 보였다. 장기 집권하는 불의의 정권 아래 살기 때문에, ‘잘못 투성이인 대통령’을 역사에 두고 있기 때문에….  

 교육부 장관은 지금 우리나라의 많은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교과서라는, ‘믿는 매체’에 얼마나 많은 학생이 발등을 찍히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교육’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독’을 미래 세대에 주입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의도를 가진 교사들에 의해, 그저 생각 없는 ‘직장인’ 교사들에 의해 역사와 사회가 얼마나 많이 왜곡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어린 시절부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적대 의식을 갖도록 하는 선동이 수많은 교실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알고 있는가? 그런 교육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이어서 장래까지 망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만일 위 질문 중 한 가지에라도 ‘예스’라고 답할 수 있다면 지금 초등학교 입학 연령 낮추는 문제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님도 알 것이다. 형식이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이 사안은 앞선 정권들에서 이미 여러 차례 부적절하다고 폐기된 적 있다. 일하는 척만 하는 장관은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 교육에 있어서는 특히 더 그렇다. 문제의 내부로 과감히 파고들지 못한다면 그 직을 내려놓는 것이 양심적인 태도가 될 것이다.

이 사안은 이미 여러 차례 부적절하다고 폐기된 적 있다(출처 : 동아일보 2022년 8월 1일자)
이 사안은 이미 여러 차례 부적절하다고 폐기된 적 있다(출처 : 동아일보 2022년 8월 1일자)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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