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도 위선적 반성문에 불과
고속도로 반대에서 소득주도성장론까지 반성문이 없다
미국 인플레 등은 좌익이론의 필연적 결과
변형윤 경제학-->가짜 경제학 양산의 역사

정규재 펜앤드마이크 주필

폴 크루그먼이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는 '세계적인 경제학자'라는 수식어가 늘 붙는다. 노벨상을 수상했던 것도 명성에 힘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2류 경제 평론가이거나 3류 정치평론가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공부보다는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알린다. 그리고 이 저명한 좌익언론사에서 아무렇게나 좌익적 글을 써댄다. 이 크루그먼이 근래 뉴욕타임즈(NYT)에 '인플레이션에 대해 나는 틀렸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고 해서 화제다. 

"내가 틀렸다(I was wrong)"는 제목의 글을 뉴옥타임즈는 한 번 씩 쓴다. 뉴욕타임즈 필자들의 기고문 중에서 시간이 지나 반성문을 쓸 때 내가 틀렸다는 이 제목을 시리즈 제목으로 붙여 게재한다. 지난 2000년에는 "나는 확신했지만 틀렸었다"라는 반성의 글을 제니퍼 톰슨이 썼다. 반성문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2019년에는 "나는 엘리자베스 워런에 대해 틀렸다"는 글을 니콜라스 크리스토프가 썼다. 이번에는 한꺼번에 여러 명이 "나는 틀렸다"를 인쇄본은 7월24일자, 인터넷은 21일자로 올려놓고 있다. "페이스북에 대해 나는 틀렸다"는 파하드 만주가 썼고 "트럼프 투표자에 대해 나는 틀렸다. 그들은 화를 낼 이유가 있다"는 브렛 스티븐이 쓰고 있다. 같은 날자에 폴 크루그만이 "나는 인플레에 대해 틀렸다"를 올려 놓고 있다. 

폴 크루그먼은 이번 칼럼에서 의외로 솔직하게 "인플레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는 글을 올렸다. 바이든이 작년 1조9000억 달러(약 2498조 원)의 경기 부양책을 내놨을 때 "인플레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던 일을 반성한다는 것이다. 당시 소비보다는 저축이 늘어날 것, 지방 지원금은 점진적으로 흘러나간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가계 소비패턴이 변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체인이 붕괴된 점, 이민자 감소와 조기퇴직 등으로 노동공급이 줄어들면서 인플레가 왔다고도 평가했다. 그는 인플레를 걱정하는 래리 서머스에게 "바보" "정치꾼"같은 모욕적인 언어를 동원해 빈정대기도 했다. 세계화 과정에서의 저인플레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는 일관되게 화폐량을 무제한적으로 늘려도 좋다는 식의 주장을 폈다.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재정 팽창, 가계소비, 석유전쟁 등의 특별한 요인 모두를 일관되게 부인해왔던 것이 크루그먼의 주장이었다. 이런 저런 인플레의 원인을 거론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이지 이번에는 인플레가 없고 이럴 경우에는 인플레가 터지고 따위의 논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인플레를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좌익 경제학의 최대 약점이 바로 인플레였기 때문에 인플레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면 완전한 경제 체제가 가능해지는 것을 크루그먼은 잘 알았기 떼문일 것이다.

폴 크루그먼이 이번에 노동감소를 인플레의 한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한 것은 그나마 진일보다. 임금이 올라가면 인플레가 터진다는 것은 필립스 곡선의 기본이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그리고 화폐 공급이 상품의 공급보다 빨라지면 무조건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그런 논리적 과정이 현실에서 일어날 뿐이지만 애써 부정했던 것이다.

크루그먼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실은 정치 분야다. 그는 무조건적 민주당 주장자다. 바이든이 만들어낸 구체적, 현실적 인플레를 애써 숨기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 내 셰일 가스의 공급 애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그것에 따른 농업 인플레이션, 중국 봉쇄에 의한 프렌드쇼어링, 좌익환경론에 경도되어 문명적 방법론을 적대화하는 등이 바로 그런 요인들이다.

좌익 인플레라고 부를 만한 이런 상황은 불행히도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좌익 인플레>다. 그것은 폴 그루그먼의 눈 앞에 그리고 우리들의 눈 앞에 처음 나타난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좌익 인플레라고 불러 마땅한 그런 상황들은 지난 70년대에도 세계를 흔들면서 맹위를 떨쳤다. 

공급망의 문제, 적자재정에 의한 통화팽창, 좌익환경론(자원고갈론)의 득세라는 3박자가 맞아 떨어지면 거대한 인플레가 쓰나미처럼 덮쳤던 것은 70년대다. 70년대는 연평균 7%가 넘는 거대한 인플레가 세계적 경기후퇴까지 몰고 온 것으로 규정되는 시기다. 지금과 다를 것이 없다. 올해는 독일이 14기의 원전 중 모두 폐기되고 아직 남아있던 3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모두 폐기하기로 예고되었던 시기다. 그러나 지금 독일인들은 땔감을 구하기 위해 장작과 목재 펠릿을 대거 구매한다고 할 정도이고 정치인들은 하릴 없이 온 지구촌을 다니면서 러시아 가스 대체물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역시 원인은 같다. 독일은 히틀러를 반성하는 것과 별개로 전체주의적 통제에 친숙하다. 좌익환경론은 자본주의적 문명화 과정을 부정하면서 경제와 문화, 종교에 대한 전체주의적 통제를 가하고자 하는 온갖 움직임들의 결집체다. 그것은 2차 대전 이후 오랜 평화에 도취해 있던 서구인들의 가슴 속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70년대식 환상, 그리고 유물론의 시대에 만들어진 거대한 유사종교로서의 환경론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환경론에서 샘솟는 운동의 원천을 발견한 것은 결코 간단히 바라볼 문제가 아니다. 68 문화혁명을 통해서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낸 환경론은 71년 로마클럽 보고서를 계기로 자원고갈의 거대한 석유 인플레를 만들면서 인류에게 인사를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자원고갈? 아니다. 그 때도 역시 문제는 화폐의 문제였고 통화팽창의 문제였다. 지금과 다른 것은 당시는 달러의 폭락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모든 화폐 가치의 폭락이다. 화폐의 타락도 전염되었다. 환경론은 갈수록 기승을 부리면서 지금은 자본주의 전부를 무너뜨릴 정도에 이르렀다고 할 지경으로 광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 결과가 오늘날 미국의 좌익운동이요 바이든은 그 충실한 추종자일 뿐이다. 실제로 바이든은 셰일가스 개발에 필요한 국유지 임차를 거부했고 키스톤 파이프 라인 증설을 영구히 중단시키는 명령을 발동한 상태다. 이산화탄소와 화석연료에 대한 증오, 다시 말해 서구 문명에 대한 증오가 만들어 낸 인플레이션 운동인 것이다.

바이든은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서는 강력한 봉쇄 작전을 펴면서 프렌드쇼어링이라는 희한한 언어를 만들어 냈다. 시장은 저절로 확장되기를 원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교역과 시장의 확장을 싫어한다. 무역을 저주하고 거래를 착취의 과정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시장을 잘라 부수어 장기적으로는 촌락주의적 폐쇄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당시와 다른 유일한 점이 있다면 중국 문제다. 닉슨은 중국과 화해했고 키신저가 그 메신저였다. 지금 바이든은 중국을 거부하고 있고 키신저는 다시 중국과 화해하기를 권하고 있는 정도다. 그렇다고 화해가 쉬울 것 같지는 않다. 중국 사회발전의 지연 또는 지체는 세계적인 두통거리다. 경제가 일정 수준으로 성장하고 다양화되면, 그리고 번영의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사회체제가 자유민주주의로 전환할 것이라는 상상은 칸트 이후의 오랜 염원이며 법칙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만 달러'가 되면서도 중국은 오히려 거대한 권위주의 민족주의 독재 체제를 더 강화하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시장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반중 노선은 절대로 포기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 시장의 시장성이 회복되면 중국 국민은 그때 비로소 자유를 알게 된다. 

폴 크루그먼의 소위 반성문에는 되풀이되는 좌익적 환경론, 혹은 환경 탈레반적 규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지금 세계의 산업정책은 좌익환경론 다시 말해 자원 고갈, 지구 종말, 생물 멸종,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로 요약되는 환경 철학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런 반문명적 환경론이 경제와 산업을 규정하는 새로운 종교로 떠오른 것이다. "너의 삶과 자연에 대한 태도를 회개하라"는 실천론에 이르면 우리는 명확하게 환경론이라는 것이 내면에 전제하여 깔고 있는 종교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플레는 상품보다 화폐가 많아지면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자기가 생산한 것보다 많이 소비할 수는 없다. 사람에게 어떤 형태건 노동을 요구하지 하지 않는 성장이나 번영, 혹은 국부론은 모두 거짓이다. '돈 풀어 복지'라는 공식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의 과다 공급이다. 폴 크루그먼은 좌익적 환경론이 인플레이션의 기본 원인이라는 것을 아직도 시인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마침 같은 24일자엔 데이비드 브룩스도 "내가 틀렸다"는 고백의 칼럼을 올렸다. 보보스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내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책을 써 유명세를 탔던 그가 자기의 칼럼에 붙인 이름은 "나는 자본주의에 대해 틀렸다"이다. 한국의 장하성, 조국, 홍장표, 김상조, 그 누구도 자신들의 소득주도성장론이나 재벌개혁론, 빈부격차론, 노동시장 이론 등 엉터리 경제학에 대해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고속도로 거부, 수출산업 거부, 포스코 설립 거부, 삼성전자 설립 거부, 한미 FTA 거부 등으로 일관하면서도 단 한번 평생의 오류와 거짓말에 반성문조차 한 장 없던 변형윤 전 서울대 교수의 학문적 정신적 제자들이다. 에잇, 거짓을 퍼나르는 자들아! 

정규재 펜앤드마이크 주필 jeongkyuja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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