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희 칼럼] 그들의 전쟁은 언제나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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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2.07.06 10:31:16
  • 최종수정 2022.07.0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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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국아, 이제 되었다. 이제 집으로 가야지. 부모님과 제수씨가 기다리고 있잖아.”
인양하러 바다에 들어간 동료들이 이렇게 말하니 방향타 위에 엎어져 키를 잡고 있던 한상국 중사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고 한다. 이 ‘영화 같은 상황’은 영화 <연평해전>을 통해서 이미 여러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만일 그가 방향타를 지키지 못했다면 참수리 357정은 조류에 의해 북한 바다로 흘러갔을 것이다. 또 그는 가족에게 돌아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대한민국의 배와 가족과의 의리를 지킨 셈이다(한상국 상사의 계급은 해당 상황이 벌어졌을 당시의 계급으로 적었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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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초 <영웅은 없었다>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저자는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고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 씨이다. 고 한상국 상사는 대한민국의 해상 경계선인 NLL을 지키려고 바다에서 격전을 치르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0년 넘게 공무 중 순직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마땅히 받아야 하는 상사라는 계급도 전사 후 13년이나 지난 2015년에나 찾을 수 있었다.

이들이 전사자로 인정받은 것은 2연평해전 전사자 보상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2017년 연말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법 적용의 뒤처리는 다음 해 8월에야 끝났다. 그 무렵 김한나 씨는 나라를 지키다 목숨 바친 남편을 위해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저절로 이뤄진 것은 거의 없었다. 격렬한 투쟁을 치르고 온갖 수모를 견딘 결과 남편은 비로소 전사자, ‘상사로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래서 김한나 씨는 자신의 책의 부제로 연평해전, 나의 전쟁이라 썼다.

 

지난 629일은 2002년 제2연평해전이 치러진 지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간 많은 인식의 변화가 있었고 덕분에 처음으로 승전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15년 영화 <연평해전>이 만들어져 600만 명의 관객이 드는, 나름의 흥행 성공을 거뒀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제2연평해전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해전이 일어난 후 20년 동안 유족들이 겪어야 했던 기막힌 일들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든 유족이, 부상 장병들이 다 엄청난 사연을 안고 있지만 그중 김한나 씨는 유난히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야 했다. 우선 남편의 시신을 차가운 서해 바다에 둔 채 41일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장례식은 끝났지만 내 남편은 여전히 실종 상태였다. 어떻게 남편만 실종자로 남았을까? 실종 상태라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인데 그럼 남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인가? 배 안에, 바다 어딘가에 조난 상태로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여름이었지만 그런 희망을 품기에 서해의 바다는 너무도 차가웠다. 그리고 41. 남편의 생존을 기대하기에는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 <영웅은 없었다>에서

 

한상국 상사(당시 하사)는 조타장이었으니 조타실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시신은 조타실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찾아오지 못했을까?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알고 시신이 어디 있는지도 아는데 어떻게 그게 실종이란 말인가? 이런 김한나 씨의 의문에 속 시원히 대답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울다가 며칠만에 정신이 든 김한나 씨는 남편을 찾기 위해 스스로 나서기로 했다. 정부는, 해군은 하루 이틀 미루다가 나중엔 포기하고 손을 떼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청와대와 해군본부, 해군 제2함대에 전화하여 시신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통사정했다. 거의 매일 제2함대로 찾아가 내 남편 찾아달라라고 울며 애원했다. 그녀 전화를 받은 어떤 청와대 직원은 당신 남편 찾으러 함정을 대거 투입했다가 북한을 자극하기라도 하면, 그러다 전쟁이라도 나면 당신이 책임질 거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참수리호가 침몰한 지점은 분명 우리 바다였다. 김한나 씨는 41일 동안이나 우리 해군의 시신을 차가운 바닷속에 방치한 당시 정부의 태도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평택 해군 제2함대에 옮겨진 357정 참수리호.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
평택 해군 제2함대에 옮겨진 357정 참수리호.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

 

영해를 지키려다 죽은 병사의 시신을 자기 바다에서 41일 동안이나 건져 올리지 않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 <영웅은 없었다>에서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한상국의 계급은 하사였지만 엄밀히 말하면 71일 중사 진급을 이틀 앞둔 중사()’이었다. 중사 진급이 이미 확정되었고 진급 날짜까지 정해진 상태였다. 그가 중사로 진급하기로 된 71, 그는 법적으로 사망이 아닌 실종상태였다. 찬 바닷속에서 중사로 진급한 것이다.

한상국 중사의 시신은 2002810일에야 인양되었다. 그동안 해군은 조타실에 불이 나 한 중사의 시신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한나 씨가 만난 남편의 시신은 살아 있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옷도 살도 그대로였고 얼굴은 그을린 데 하나 없이 깨끗했다. 다른 상처도 많았지만 옆구리로부터 심장 쪽으로 85철갑탄이 관통한 것이 치명적이었고 했다.

그런데 조타장이었던 한상국 중사는 남쪽으로 향한 방향타를 죽어서도 놓지 않았다고 했다.

상국아, 이제 되었다. 이제 집으로 가야지. 부모님과 제수씨가 기다리고 있잖아.”

인양하러 바다에 들어간 동료들이 이렇게 말하니 방향타 위에 엎어져 키를 잡고 있던 한 중사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고 한다. 영화 같은 상황은 영화 <연평해전>을 통해서 이미 여러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만일 그가 방향타를 지키지 못했다면 참수리 357정은 조류에 의해 북한 바다로 흘러갔을 것이다. 또 그는 가족에게 돌아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대한민국의 배와 가족과의 의리를 지킨 셈이다.

평택 해군 제2함대 충무동산 위에 있는 제2연평해전 전승비 참배
평택 해군 제2함대 충무동산 위에 있는 제2연평해전 전승비 참배

먼저 세상을 떠난 네 명의 장례는 이미 치렀고 이후 끝내 사망한 박동혁 병장은 당시에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래서 혼자 장례를 치르게 되었고 계급은 중사로 추서되었다. 71일 이미 바닷속에서 중사로 진급했으니 전사가 확인된 810일의 그의 계급은 중사였다. 그러니 추서 계급은 상사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국방부에서는 629일 해전 후 시신을 확인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바로 사망으로 처리하여 중사 임명장을 발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사인 상태에서 중사로 추서하였다. 법률상 불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만일 중사로 진급하지 못하고 629일에 전사한 것이 확실했다면 시신을 인양했어야 했고 실종자로 남기지 말았어야 했다. 남편의 추서 계급은 상사가 되어야 한다는 김한나 씨의 외침을 귀담아 듣는 정부 당국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전사자 얼굴이 새겨진 부조를 어루만지는 유족들
전사자 얼굴이 새겨진 부조를 어루만지는 유족들

김한나 씨가 대답 없는 외침에 지쳐갈 무렵인 2010년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다. 천안함 사건 때 사망한 장병 중에도 한상국 중사와 비슷한 경우였던 사람이 몇 있었다. 사건은 326일에 일어났는데 시신을 41일 이후에 인양하여 41일 진급 대상자는 모두 일단 한 계급을 올리고 거기서 다시 추서했다. 시신 인양일을 사망일로 인정하여 추서 계급을 알아서조정해준 것이다.

김한나 씨는 다시 해군에 전화를 했다. 천안함의 선례가 있는데도 담당자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한 중사님은 629일에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법 해석에 따른 겁니다.”

국방부에서는 이상한 논리로 거부했다. 김한나 씨 남편의 계급을 올려주려면 625전쟁 전사자부터 다 조정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한동안 이 때문에 너무도 힘이 들었다. 내 남편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왜 그랬어? 전투가 벌어졌을 때 좀 숨어 있지. 그렇게 죽는다고, 그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다고 누가 알아줘. 좀 숨지 그랬어…….’

물론 남편이 멀쩡하게 돌아왔으면 마음의 짐은 컸겠지만 오죽하면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까.” - <영웅은 없었다>에서

 

2015년 영화 <연평해전>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덕분에 제2연평해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그해 7월 다음 아고라에서 한상국 중사의 진급에 대한 청원이 시작되었다. 민간이 만든 추모본부의 도움이 컸다. 많은 사람이 청원에 참여했고 청원이 마감되기도 전인 2015710일 한상국 중사는 드디어 상사로 진급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찾은 계급이지만 아직도 많은 자료에 한상국 상사의 계급은 중사로 표기되어 있다. 승전 2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한 국방부 장관은 영웅들의 이름을 불러본다며 한상국 중사라고 부르는 실수를 했다. 심지어 연금도 아직 중사급으로 지급되고 있다. 2018년으로 끝난 줄 알았던 유족들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제2연평해전 생존 용사들
제2연평해전 생존 용사들

김한나 씨는 자신의 책 <영웅은 없었다>에서 말한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제 남편을 기억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남편이 한 일을 기억해달라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원칙에 따른 제대로 된 예우, 섬세한 업무 처리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 영웅을 위해 그 쉬운일을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전쟁을 언제나 끝내줄 수 있을까?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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