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호넨(法然: 1133년-1212년)

사이초(最澄)의 타종파에 대한 관용적 태도, 엔닌(圓仁)이 10년 가까이 당나라에서 체류하면서 수집해 온 각종 불교 관련 서적들은 히에이 산(比叡山)의 엔랴쿠지(延曆寺)를 일본 불교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호넨이 9살 때 그의 아버지가 토지 관련 분쟁에 휘말려 자객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임종 전에 복수를 하려는 생각을 버리라는 유언을 남긴다. 승려의 길을 택한 호넨은 불교수학의 최고 명소였던 엔랴쿠지로 가서 공부하기 시작했고 1147년 교겐(行玄)을 계사로 하여 엔랴쿠지 소속의 관승(官僧)이 된다.

석가상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던 호넨은 관승으로서의 의무와 책임 등에서 벗어나 개인적 수행이나 민간구제활동 등에 전념하는 둔세승(遁世僧)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나라와 교토의 고승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으려 한다.

1175년 호넨은 관무량수경소(觀無量壽經疏)라는 책에 적혀 있는 “일심으로 오롯이 마타의 명호를 염불한다”는 문장을 읽고 '일반 중생들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부처인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기 위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소리내어 부르기만 하면 된다'는 전수염불(專修念佛)’을 통한 극락왕생의 방법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교토의 히가시야마 요시미즈(東山吉水)로 이주한 호넨이 '누구나 염불을 외우기만 하면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파하기 시작하자 일본 전역에서 열렬한 호응을 받는데 당대의 일본인들은 호넨을 추종하는 불교도들의 모임을 정토종(淨土宗)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1200년 가마쿠라 막부가 전수염불 금지령을 내리고 호넨과 그의 제자들을 유배 보내자 정토종의 교세 확장이 정체되기 시작한다.

6. 에이사이(榮西: 1141년-1215년)

1151년 히에이산의 엔랴쿠지에서 수계 득도한 승려 에이사이는 천태종 및 천태밀교가 귀족들의 세력 다툼의 장이면서 특권계층만을 위한 종파가 되어가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던 중 1167년 송나라에 가서 선불교를 배워 오려 시도하지만 천태종 관련 서적들과 선종에 대한 기초적 이해만 얻은 상태로 6개월 만에 귀국한다.

1187년 다시 송나라 유학길에 오른 에이사이는 중국 절강성 천태산의 만년사(萬年寺) 주지 허암회창(虚庵懐敞)의 문하에서 임제종(臨濟宗)의 선불교를 5년간 배운 후 일본으로 돌아온다.

1194년 에이사이가 교토에서 임제종 보급에 나서자 엔랴쿠지의 천태종에서 포교를 방해하는 등 여러 가지 시련을 겪게 된다. 에이사이는 1198년 《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을 저술하여 그가 보급하려는 임제종의 선(禪)이야말로 히에이산 천태종을 개창했던 사이초(最澄)가 당나라에서 들여온 선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막부의 근거지였던 가마쿠라(鎌倉)로 옮겨간 에이사이는 1202년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정비(正妃)였던 호죠 마사코(北条政子)의 귀의와 후원으로 주후쿠지(壽福寺)를 건립하고 그곳의 주지가 된다.

에이사이의 임제종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무사들에게 명상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잊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기존의 남도육종(南都六宗), 태밀(台密) 및 동밀(東密), 정토종(淨土宗)보다 훨씬 호소력이 있었다.

하지만 에이사이는 사무라이 계층의 전폭적 지원을 받게 된 이후 송나라 유학길에 나설 당시의 초심을 잃고 새로운 권력층인 무사계급과 유착하여 교세를 확대하려 했다는 후대 불교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7. 도겐(道元: 1200년-1253년)

일본에 선불교를 본격적으로 보급했던 에이사이는 사이초의 계보를 잇는다고 생각했던 인물이기에 천태밀교, 진언밀교, 정토교가 강조하던 염불도 좌선 못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도겐이 송나라에서 배워 온 조동종(曹洞宗)을 전파하기 시작한 이래 선종 계열에서는 수행 방법으로 밀교의식이나 염불 등은 불필요하며 좌선만으로 충분하다는 인식이 커져 갔다.

권세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8세에 고아가 된 도겐은 1212년 히에이산의 엔랴쿠지에 들어가 천태교학을 본격적으로 배워 보려 했으나 파벌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에 실망하여 1217년 에이사이가 세운 일본 최초의 선원 겐닌지(建仁寺)로 옮긴다.

겐닌지에서 선불교를 배우기 시작한 도겐은 1223년 스승 묘젠(明全)과 함께 송나라 유학을 떠나 에이사이가 임제종을 배워 왔던 중국 절강성 천태산으로 향한다. 하지만 천태산 선불교의 주류는 임제선(臨濟禪)에서 묵조선(默照禪)으로 바뀌어 있었다. 임제선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부처란 무엇인가?" 등 화두(話頭)를 던지고 제자는 이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참선을 하는 반면 - 필요한 경우 몽둥이로 내리치는 방(棒)과 고함을 지르는 할(喝)까지 사용한다 - 묵조선에서는 각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좌선한 채 자신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려고 노력한다.

에이사이는 1225년 천태산 천동사(天童寺)에서 조동종(曹洞宗)의 13대조 여정(如淨)에게 조동종의 선법을 배워서 1227년 겐닌지로 돌아온 이후 송나라에서 익힌 선법의 보급에 나선다. 임제종 승려들은 수행방법이 다르다는 이유로 천태종 승려들은 기존 밀교의식을 경시한다는 이유로 도겐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1233년 교토에 일본 최초의 조동종 사찰인 고쇼지(興聖寺)를 설립하지만 엔랴쿠지 승려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 하고 1243년 에치젠 (현재의 후쿠이현)으로 옮겨 새로운 사찰을 세우는데 이 절이 훗날 일본 조동종의 총본산이 되는 에이헤이지(永平寺)이다.

도겐의 조동종은 깨달음을 위한 수행방법으로 오직 좌선만을 통한 수행이면 충분하다는 지관타자(只管打坐), 좌선을 통하여 나와 주변세계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이 독립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는 신심탈락(身心脫落) 그리고 수행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수행 자체가 곧 깨달음이라는 수증일여(修證一如)의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이므로 좌선이라는 방식을 통한 노력을 통하여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조동종의 자력구제 사상과 '인간은 무력한 존재이므로 염불을 외우면서 아미타불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정토종의 타력본원 사상은 교리상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8. 니치렌(日蓮: 1222년-1282년)

1238년 아와 (현재의 치바현 가모가와시)의 기요미즈 산(清水山)에 위치한 세이초지(清澄寺)에서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된 니치렌은 1242년 천태종의 총본산 엔랴쿠지에 가서 12년간 체류하면서 천태종에서 최고의 경전으로 삼는 법화경(法華經)이야말로 정법(正法)이고 그 이외의 불교종파들은 모두 사법(邪法)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1253년 세이초지로 돌아온 니치렌은 법화경 이외의 다른 종파의 가르침은 모두 부정하는 새로운 불교 종파를 개창하고 이를 법화종이라고 명명한다.

니치렌은 신도들에게 법화경을 믿는다는 의지 표현 또는 신앙 고백의 형식으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는 구절을 외우기만 하면 된다고 가르쳤는데 기존 불교 종파들이 보기에 일련종은 법화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삼는 천태종과 누구나 염불을 외우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토종을 혼합한 새로울 것이 없는 일개 종파였다.

그는 해마다 계속되는 지진, 홍수, 전염병의 원인이 일본이 정토신앙이라는 사법(邪法)에 물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260년 니치렌은 정토신앙을 버리고 법화경에 귀의하여 현실세계를 불국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의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저술하여 가마쿠라 막부의 섭정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에게 제출한다.

여기에 더하여 니치렌은 염불무간선천마(念佛無間禪天魔) 진언망국율국적(眞言亡國律國賊) - 정토종은 무간지옥에 빠지고 선종은 악마의 가르침이며 진언종은 나라를 망치고 율종은 국가의 적이다 - 라고 하면서 다른 종파들을 맹비난했기에 평생 동안 유배를 다니면서 다른 종파 신도들의 습격까지 받는 시련을 겪게 된다.

현재, 니치렌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는 단체는 불교종단으로 일련종(日蓮宗), 신도들의 모임인 창가학회(創價學會), 정당으로는 공명당(公明黨)이 있다.

9. 잇펜(一篇: 1239년-1289년)

호넨이 유배를 가게 되자 정토종의 교세는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지만 호넨의 제자들 중 한 명인 신란(親鸞: 1173년-1262년)이 훗날 정토진종으로 발전하는 정토종 신도의 모임을 조직하는 등 여러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그 명맥은 계속 유지되었다.

정토종을 공부하던 지방 호족 출신의 승려 잇펜은 1274년 나라 남쪽의 구마노혼구(熊野本宮)에서 참배하던 중 극락왕생은 단지 나무아미타불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계시를 받은 후 16년간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나무아미타불 결정왕생육십만인(南無阿彌陀佛 決定往生六十萬人)'이라고 쓴 패를 나누어 주며 불교를 포교하기 시작한다.

잇펜의 무리들은 이동하는 지역마다 시장에 들러서 북과 꽹과리를 치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며 춤을 추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염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다. 잇펜이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이르러 잇펜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며 불법을 전파하고 염불을 보급시키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 모여 시종(時宗)이라는 종파를 결성한다.

염불만을 중시하는 호넨, 신란, 잇펜으로 이어지는 정토종은 선종이나 일련종에 비하여 이론적 토대가 취약했지만 부처님이 보내주신 가미가제(神風)의 도움으로 몽골 침략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던 가마쿠라 시대의 일본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0.렌뇨(蓮如: 1415년-1499년)

정토종의 창시자 호넨의 제자, 신란에서 시작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은 4개의 파로 나뉘었는데 그 중 신란의 자손들이 직접 운영해 왔지만 자금난에 시달리다가 히에이산 엔랴쿠지의 말사였던 쇼렌인(靑蓮院)의 부속 사찰로 전락해 버린 교토의 혼간지(本願寺) 계열이 가장 존재감이 없었다.

1457년 혼간지의 제8대 주지에 취임한 렌뇨가 교토 부근 촌락의 수장들에게 정토진종을 전파하면서 마을들 전체를 혼간지파로 전향시키기 시작하자 엔랴쿠지의 천태종 무리들이 혼간지를 파괴하고 신도들을 습격한다.

거처를 잃어버린 렌뇨와 정토진종 신도들은 1471년 에치젠 (현재의 후쿠이현)에 모여 요시자키 사원마을(吉崎御坊)을 건립하고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에 나섰다.

엔랴쿠지 천태종 폭도들의 공격에 맞서 무장을 시작한 정토진종 혼간지파 신도들은 이웃 지역의 각종 무력 분쟁에 개입하게 되는데 1488년에는 가가 (현재의 이시카와현)에서 영주를 몰아내고 이후 100년 가까이 정토진종 신도들로 이루어진 자치정부를 만들어 운영하기에 이른다.

정토진종 신도들의 무력 행사에 강력하게 반대하던 렌뇨는 요시자키를 떠나 1478년 교토의 동남부에 야마시나 혼간지(山科 本願寺)라는 새로운 사찰마을을 건설하고 1489년 혼간지 주지의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신도들의 교육과 포교에 전념했다.

1497년 렌뇨는 교토를 떠나 인근 나니와(難波)에 신도들과 함께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를 건설하는데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 자리에 자신의 성을 건설하면서 일본 제2의 대도시 오사카로 성장하게 된다.

렌뇨의 사상은 신란의 가르침을 재해석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의 평생에 걸친 헌신 덕분에 정토진종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고 오늘날까지 정토교 계열이 일본 최대의 불교 종파로 남아있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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