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시대(593년-710년)에 이르러 쇼토쿠(聖德) 태자에 의해 일본에 불교(佛敎)가 본격적으로 수용된 이래 각 시대별 일본 불교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나라 시대(710년-794년)의 불교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불교의 성격이었고 승려들도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불교의 교리에 대한 학술적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당시 불교계의 주류는 법상종(法相宗), 삼론종(三論宗), 구사종(俱舍宗), 성실종(成實宗), 화엄종(華嚴宗), 율종(律宗)의 여섯가지 종파였는데 이를 남도육종(南都六宗)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승려인 교키(行基)는 민중을 대상으로 한 불교 포교에 전념하면서도 조정의 도다이지(東大寺) - 향후 일본 화엄종의 본산이 될 나라 지방의 대규모 사찰 - 건설에 적극 협력하였다.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에는 기존의 교리 연구 위주의 불교에서 벗어나 중생을 구제하는 실천적 불교로 넘어가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일본 불교는 귀족 중심의 종교였다. 당나라 유학생 출신의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는 각각 천태종(天台宗)과 진언종(眞言宗)을 개창하였는데 양자 모두 밀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진언종이 천태종보다 우세하였으나 후대의 불교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천태종이다. 사이초의 제자 엔닌(圓仁)은 견당사(遣唐使)의 일원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각종 밀교 관련 자료를 가지고 돌아와 천태밀교(天台密敎)의 토대를 구축하였고 정토종(淨土宗)을 처음으로 일본에 들여왔다.

가마쿠라 시대(1185년-1336년)는 일본 불교의 최전성기로 기존의 남도육종, 천태종, 진언종 등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종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크게 정토계(淨土界), 선종계(禪宗界), 일련계(日蓮界)의 세가지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정토종을 대표하는 승려는 호넨(法然)과 잇펜(一篇), 선종을 대표하는 승려는 에이사이(榮西)와 도겐(道元), 일련종을 대표하는 승려는 니치렌(日蓮)이다. 교리가 단순하고 실천적 성격이 강한 신흥 종파들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불교는 일본 열도의 민중들까지 포함한 모든 이들을 위한 사상으로 발전해 나아간다.

무로마치 시대(1336년-1573년)에는 귀족층과 그들과 연계된 상층 무사들이 몰락하고 농민 출신 하급 무사들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정토종, 선종, 일련종이 남도육종, 천태종, 진언종을 밀어내고 일본 불교의 새로운 주류 세력이 된다. 초기에는 일련종 계열이 크게 교세를 확장하였으나 중기 이후 정토종 계열이 일본 불교의 최대 종파가 된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승려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의 8대 주지 렌뇨(蓮如)이다.

전국 시대(1573년-1603년)는 일본 역사상 유례 없는 대혼란의 시대로 일본 전역에 걸쳐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많은 승병을 보유하고 있던 기존의 대형 사찰들이 오다 노부나가 등의 공격을 받으면서 몰락한다.

에도 시대(1603년-1868년)에는 주자학, 양명학 등 유학(儒學)과 국학(國學), 난학(蘭學), 양학(洋學) 등 사상과 학문의 백가쟁명 시대가 펼쳐지면서 오랜 세월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던 불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줄어들게 된다.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이후 유럽과 미국의 학문인 양학(洋學)이 대세가 되면서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를 환속시키는 폐불훼석(廢佛毁釋) 운동이 일어나고 일본 고유의 신도(神道)를 장려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숭신억불(崇神抑佛) 정책이 시행되자 일본의 불교는 그 교세가 계속 축소되었다.

2015년 현재 일본 전역의 불교신자 수는 모두 9,000만명인데 이 중 약 1,250만명이 정토진종, 약 600만명이 기타의 정토종, 약 1,400만명이 일련종 계열에 속해 있다. 지역별로 보면 서일본 지역에서는 정토종이 우세한 반면 동일본 지역에서는 일련종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1. 교키(行基: 668년-749년)

685년 천황이 각 지방의 관청 옆에 사원을 설립하고 불상과 경전을 구비하라고 지시한 데 이어 702년에는 승려들의 신분을 보장하는 동시에 그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승니령(僧尼令)을 발표한다.

이 때부터 속세의 가치를 버리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을 본업으로 해야 할 승려들이 천황의 안녕을 비는 각종 행사 준비와 불교 경전 연구에만 몰두하기 시작한다.

당나라 현장법사의 제자, 도쇼(道昭)에게 법상종을 배운 교키는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불교의 전도와 민중의 복지, 후생 향상에 전념한다. 이에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액을 기부하자 교키는 그 자금으로 각지에 수많은 사원을 건립하고 빈민구제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717년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던 교키는 정부로부터 승니령 위반이라는 경고를 받는다. 하지만 민중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신라의 파계승 원효(元曉)가 한반도를 불국토(佛國土)로 만들었던 과거 사례를 기억하고 있던 일본 불교 고위층들이 개입하면서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는다.

743년 천황이 나라의 도다이지 대불조영(大佛造營)을 위한 칙령을 발표하는데 당시 재정난에 시달리던 조정은 교키와 그의 제자들의 활약으로 민간의 시주를 받아 가까스로 불상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교키는 일본 최초로 대승정(大僧正)에 임명되고 사후에는 보살(菩薩)의 칭호를 받게 된다.

2. 사이초(最澄: 767년-822년)

도다이지 대불 조영에 크게 기여했던 교키를 따르던 사도승(私道僧)들이 - 승니령에 따르면 승려의 자격이 없었음에도 - 집단으로 승려의 자격을 인정받은 데 이어 여자 천황 코켄(孝謙)의 총애를 받던 승려 도쿄(道鏡)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오미의 고쿠분지(國分寺)에서 불경을 공부하고 나라의 도다이지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국가 공인 승려가 된 사이초는 히에이 산(比叡山)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수행에 전념하면서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천태종(天台宗)에 관심을 갖게 된다.

기존 남도육종 중심 불교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이초는 804년 견당사(遣唐使)의 일원으로 입당하여 중국 절강성 천태산에서 천태교학을 배우고 밀교를 전수받은 후 805년 수많은 불교경전들을 가지고 돌아온다.

조정으로부터 히에이산을 하사받은 후 사이초는 자신이 예전에 거처하던 곳에 사원을 세우는데 이 절이 훗날 천태종의 총본산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엔랴쿠지(延曆寺)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기존의 나라 불교를 비판하는 한편 불교 교단은 국가 권력과 거리를 두고 일반 민중들에게 밀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남도육종은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 논평하는 서적에 기반한 논종(論宗)이지만 자신의 천태종은 부처님의 말씀을 적어 놓은 법화경(法華經)에 기반한 경종(經宗)이다.

둘째, 남도육종은 개인적으로 깨달음을 찾기 위해 학문과 수행에 몰두하는 불교인 반면 천태종은 깨달음 자체에 직접 도달한 이후 모든 중생들을 함께 인도하는 대승(大乘)의 가르침이다.

이로 인하여 기존 불교계와 사이초의 대립은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사이초가 개창한 천태종이 불교의 여러 종파들을 모두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에 훗날 엔랴쿠지는 정토종, 선종, 화엄종 등 다양한 종파의 경전과 이론서들이 집중된 일본 불교학의 중심지로 발전해 나아갈 수 있었다.

3. 구카이(空海: 774년-835년)

나라에서 논어 등 유학 공부에 몰두하던 18세의 구카이는 화엄종 승려인 카이묘(戒明)에게 허공장구문지법(虛空藏求聞持法)이라는 수행법을 전수받은 후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804년 견당사의 일원으로 당나라에 건너간 구카이는 중국 섬서성 서안의 용천사에서 태장계(胎藏界), 금강계(金剛界) 등 밀교를 배운 후 806년 수백권의 불교 경전들을 가지고 귀국한다.

구카이는 816년 조정으로부터 고야 산(高野山)을 수행 장소로 하사받아 곤고부지(金剛峯寺)를 설립하고 823년 천황으로부터 교토의 도지(東寺)를 하사받는데 이 두 사찰을 거점으로 자신이 개창한 진언종(眞言宗)을 일본 전역에 전파한다.

주술적 성격이 강한 밀교인 진언종의 수행 방법은 입으로는 진언, 즉 다라니(陀羅尼)를 외우면서 손으로는 인계(印契), 즉 수인(手印)을 맺고 마음은 삼매(三昧)에 두면서 자신과 부처가 일체가 되는 경지를 직접 체험하려 하는 것이다.

구카이는 모든 불교 종파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 화신(化身) 석가모니불을 교주로 하는 현교(顯敎)와 영원불변하는 법이 형상화된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을 교주로 하는 밀교(密敎)로 분류하면서 자신의 불교 이론이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진언종은 나라 지역에 기반한 남도육종의 세력을 억제하고 싶었던 헤이안 조정과 귀족들의 지원을 받는 동시에 기존 불교의 현학적 성격과 차별화되는 밀교의 주술적 특성에 매료된 민중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4. 엔닌(圓仁: 794년-864년)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승려인 사이초와 구카이는 804년에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갔던 각별한 인연이 있었고 귀국한 이후에 당시 천황의 총애를 받던 사이초가 구카이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주기도 했다.

밀교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던 사이초는 812년 구카이에게 밀교를 배우고 관정(灌頂) - 부처님의 오지를 상징하는 다섯병의 물을 머리에 붓는 밀교 의식 - 까지 받았다. 그러나 다음해 사이초가 이취석경(理趣釋經)이라는 경전을 빌려달라고 하자 구카이가 "사이초는 실천수행 없이 문장수행만으로 밀교를 배우려 하고 있는데 이는 불법을 훔치려고 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양자의 사이는 멀어졌다.

이후 사이초의 천태종은 구카이의 진언종을 넘어서기 위하여 천태종 교리에 밀교의 가르침을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사이초의 제자 엔닌은 838년 마지막 견당사로 당나라로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본격적으로 밀교를 배울 수 있었고 중국 섬서성 서안의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금강계 만다라와 태장계 만다라를 그려서 847년 일본으로 가지고 왔다.

그가 당나라에서 들여온 밀교 의식과 각종 예술품 및 불교 서적들에 기반하여 성립한 천태밀교, 즉 태밀(台密)은 진언종의 동밀(東密)와 경쟁하면서 헤이안 시대 후기 일본 불교의 주류세력으로 성장한다.

기존 천태종은 법화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여기고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중심으로 교리가 구성되어 있었으나 천태밀교는 밀교 경전과 대일여래(大日如來) - 밀교에서는 '비로자나불'을 의역하여 '대일여래'라고 부른다 - 를 더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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