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근 칼럼]역진화(逆進化)하는 경쟁정책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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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5.09 09:22:32
  • 최종수정 2018.05.1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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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종과 품목 제한없는 ‘생계형 적합업종 제도’의 입법화를 추진하는 정부와 여당
기존 민간자율 형식과 달리 '생계형 적합업종'은 중기부가 심의·지정까지 모든 업무를 관장
무엇이, 누구에게 적합한 업종이 판단하는 것은 정부가 아닌 '시장'
적합업종 지정은 경쟁압력의 부재로 산업과 기업의 효율성에 부정적 영향 미쳐
대기업 진입 규제하면 중소기업이 아닌 외국 업체가 반사이익을 누리는 '규제의 역설' 우려돼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신자유주의: 역진화(逆進化)는 이렇게 진행된다”(Neo-liberalism: devolution starts here)라는 문구가 회자된 적이 있다. 문구는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닌 “직립 인간이 반(半) 직립의 원숭이로 퇴화하는 그림”을 포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인류 문명을 퇴화시킨다는 패러디다. 급기야 문구와 그림은 티셔츠에도 채용돼 하나의 패션 브랜드화한 적도 있다. 하지만 냉소적 패러디는 잠시 주의를 끌 뿐 생명령을 가질 수 없다. 

좌파들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일종의 전술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조어(造語, coining)는 자유주의를 공격하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자유주의를 악마화(惡魔化) 시키려는 의도에서 신(新, neo)을 붙인 것으로 추론된다. 그런 점에서 네오콘(Neo-con, 신보수주의)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이념과 제도는 진화한다.  
   
유감스럽게도 역진화하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쟁정책이 그 사례일 것이다. 모든 경쟁정책을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중소기업 관련 경쟁정책의 경우 역진화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만은 없다. 중소기업 보호를 위한 경쟁제한 정책의 원조는 노무현 정부의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이다. 동 제도는 노 정부에 의해 시행되었지만 노 정부에 의해 폐기됐다. 논리적으로 특정규모 기업에 국한된 고유업종은 있을 수 없다. 고유업종 지정은 일종의 배타적 인·허가권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중소기업 고유업종은 폐기됐다. 폐기돼 박물관에 소장된 것을 되살린 것은 이명박 정부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개명(改名)했다. 정책 강도 조절 차원에서 ‘고유를 적합’으로 순화시킨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해관계자 간의 ‘자율협약’ 형식을 취함으로써 정부개입이라는 금지선을 넘지는 않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는 ‘생계형 적합업종제도’로 더욱 퇴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현재, 생계형 적합업종 제도는 법제화되어 있지 않지만 여권 내에서 의원입법안이 발의 됐으며 정책조율을 위한 공청회가 끝난 상태다. 정부와 여당은 경제민주화 강화 차원에서 경제민주화 헌법 조항에 ‘생상과 조화’를 넣겠다는 입장인 만큼 실제 입법화로 이어질 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 제도는 과거 적합업종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선 신청대상 업종과 품목에 제한이 없다. 일부 소상공인의 연명(連名)으로도 지정 신청이 가능하다. 과거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는 민간자율 형식을 취했지만 생계형 적합업종은 ‘중소벤처기업부 심의위원회’가 적합업종 심의 및 지정까지 모든 업무를 관장하게 된다. 심의위원회는 사업의 축소와 철수까지 권고할 수 있으며 불이행 시 별도의 이행 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다. 한미 FTA는 상대국 정부규제로 인한 자산가치 하락 등 재산권 침해를 통상 규범 위반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업철수 권고와 이행 강제금이 부과되면 통상 분쟁은 불문가지다. 생계형 적합업종제도는 필히 통상마찰을 부르게 돼있다.   

경쟁의 단위는 '개인'으로 ‘집단 간 경쟁’ 있을 수 없어  

그 어떤 변형이라 하더라도 적합업종제도에는 치명적 오류가 내재되어 있다. 적합업종의 출발점은 ‘대기업 대 중소기업’의 2분법적 갈등 구조다. 하지만 경쟁은 어떤 경우에도 ‘개체’ 간의 경쟁이지 ‘집단’ 간의 경쟁일 수 없다. 집단 간의 경쟁이 이뤄지려면 집단의 ‘공동체적 이익’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적 이익 즉 ‘종(種)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사자는 동료 사자의 먹거리 보존을 위해 초식동물 사냥을 자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개별 중소기업은 소비자에게 자신의 물건을 팔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여타 동료 중소기업의 시장기회를 뺏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전체의 공동체적 이익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은 대기업의 횡포가 아닌 영세업자의 ‘과다진입’이다. 대기업의 진입을 막으면 그만큼 빈자리로 남아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더욱 진입할 것이고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은 더 과밀해 질 수 있다. 

적합업종제도는 '지식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서 지식의 문제라 함은, 어떤 업종이 중소기업 적합업종인지 여부를 '경쟁을 통하지 않고는’ 즉 ‘시장의 테스트’를 거치지 않고는 사전에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정책당국의 판단에 의한 적합업종 지정은 자가당착이다. 적합업종이 진정 존재한다면 제 3자 개입이 불필요하다. 굳이 시장에 개입해 “누구는 나가고 누구는 시장에 남으라고” 교통정리를 할 필요가 없다. 업종 특성상 중소기업이 더 효율적이라면 ‘시장의 힘’에 의해 대기업이 자연스럽게 경쟁에서 밀려날 것이기 때문이다. 생계형 자영업자가 더 적합하다면 ‘여타 중소 경쟁자’ 역시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최적자(fittest)가 도태될 수는 없다. 적합업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판단’하는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시장을 분할하는 예리한 ‘선’을 그을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해관계에 의한 밀당(밀고 당기는)에 따라 선이 그어질 것이다. 따라서 적합업종은 작위적인 개념이다. 적합업종 지정의 기저에는 다수를 이루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이해를 우선 반영하겠다는 ‘인기영합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개인의 생계마저 책임져 주겠다는 정부 

과거 적합업종지정으로 얻은 ‘규제익(規制益)’은 무엇인가. 규제익이 있다면 적합업종제도 연장의 최소한의 명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과거 적합업종 지정(2011년) 전후의 경제성과를 비교함으로써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병기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적합업종 지정이 오히려 “산업의 생산액증가율, 사업체증가율, 사업체당 생산액증가율” 등의 지표에서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저하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경쟁압력의 부재가 산업과 기업의 효율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또한 적합업종 제도는 ‘숨은 손실’을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보호받는 ‘차상위 가맹본부’의 이익보다 규제받는 가장 경쟁력 높은 가맹본부의 직·간접적 손실이 훨씬 클 수 있다. 이들 규제 받는 대기업과 연결된 중소기업, 농민, 임시직 등은 보호받는 중소기업주 보다 사회적으로 열위이다. 그렇다면 적합업종 지정은 정의(justice)에 반(反)하는 조치이다.   

뿐만 아니라 적합업종제도는 ‘역차별’을 야기 시켰다. 국내 중소업계의 기반이 약해 대기업이 시장에서 빠지면 해외 다국적 기업에 시장을 내줄 것이라는 우려가 실제 현실이 되었다. LED조명 사업에서 보듯이 국내 대기업의 진입을 규제하자 외국 업체가 반사이익을 누렸다. 그리고 대기업 진입규제가 반드시 국내 중소기업에게 기회를 준다고 볼 수 없다. 브랜드 파워와 기술력에서 뒤지는 중소기업은 적합업종제도가 적용되지 않는 외국계 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하거나 인수합병 되는 등 정부의 사전적 의도와 다른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오리려 국내 중소기업에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규제의 역설’이 목도될 수 있다.  

정부가 칸막이 규제로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를 보호하면 경제적 약자의 경쟁력이 재고될 수 있을까. 과거의 정책 경험은 ‘아니다’ 이다. 안주(安住)효과로 도리어 경쟁력이 떨어지고 국가에의 의존이 타성화될 수 있다. 그럼 왜 생계형 적합업종지정인가. 문재인 정부의 ‘국가개입주의 국정철학’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에서 ‘내 생계마저 책임지는 국가’로 나가기 원할지 모른다. 개인의 삶과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정책사고가 기저에 깔려 있다면, 그 자체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은 ‘내 경쟁자를 시장에서 구축해 달라’는 반(反)경쟁적 요구에 다름 아니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시장을 잘게 쪼개 특정계층에게 우선권을 주겠다’는 국가의 화답(和答)이다. 특정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 정책일 수 없다. 시장은 넓게 써야 혁신이 일고 부가 창출된다. 국가개입주의의 끝은 노예와 가난이다. 하이에크(Hayek)의 통찰이다.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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