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1987년 9월 미국을 방문한 노태우 민정당 총재가 레이건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가 화제가 됐다. 노태우 총재는 귀국해서 “레이건이 꼬길래 나도 꼬았다”고 말해 화제를 이어갔다. 당시만 해도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은 일종의 권위였다. 어떤 자리에서 누가 두목인지 알려면 자세만 보면 됐다. 모두 양 다리를 내리고 앉은 무리에서 유일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이 있으면 그게 두목이었다. 국회에 출석한 기관장이나 증인이 다리를 꼬고 앉으면 의원들이 호통을 쳤다. 어디 감히 국회의원 앞에서 다리를 꼬냐는 질책에 끝까지 자세를 유지하는 기개 높은 사람은 없었다. 국회모독죄라는데 감히 누가. 해서 세계 제국 미국 대통령 앞에서 변두리 나라 정당 총재가 다리를 꼰 것이 화제가 되고 신선하게 보였던 것이다. 고루한 유교 질서의 가치관이 빚은 코미디다. 20세기의 일로 끝났을까. 아니다. 현재도 진행 중이다. 방송에 나온 패널이 다리를 꼬고 앉으면 지금도 댓글 창에 격분의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시청자를 뭘로 보고 감히. 20세기에 돌아가셨어야 할 분들이지만 남의 수명을 가지고 뭐라 할 수 없어 이 정도로 줄인다. 다리 꼬기는 의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자세이고 꼬는 다리를 교체하는 동안 앞 사람의 허리나 등에 위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문제지 예절의 차원은 아니다.

레이건과 노태우

집에 사는 꼬마 애들이 배꼽 인사를 해서 기겁을 했다. 같이 사는 여자에게 물었더니 어린이집에서 배운 것이란다. 어린이 집이 노비 양성소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당장 못하게 했다. 그건 조선시대 노비들이 상전에게 하는 인사법이다. 나리,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뭐 그런 뉘앙스다. 어른을 보고 인사할 때는 가볍게 목례만 하면 된다. 건국 대통령도 강권하지 않으셨던가.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배꼽 인사는 스스로 종을 자처하는 짓이다. 자세와 인사에서 왜곡된 한국식 예절은 기이한 악수에서 완성된다. 허리를 어정쩡하게 굽히고 오른 손을 내민 뒤 왼손으로는 배를 만지거나 오른손을 받친다. 이런 멍청한 인사법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악수는 꼿꼿한 자세에서 웃는 낯으로 상대와 눈을 마주치며 당당하게 한 손만 내밀고 하는 것이다.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다. 내 손에는 무기가 없으며 나는 당신과 대화할 의지가 있다는 의사표시다. 이전 정권에서 허리를 90도로 꺾는 폴더 인사가 유행이었다. 임명장을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더 숙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 이 병신 짓을 대체 어쩌란 말이냐.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종놈 놀이다. 진지하고 엄숙하게 업무를 위임하는 자리다. 댁들에게는 국사國事가 장난이냐.

이제 좀 근대적으로 살자

이거 바꾸려면 윗사람이 먼저 나서야 한다. 상대가 이상한 동작으로 악수하려고 들면 못하게 제지하고 올바른 악수 법을 기분 나쁘지 않게 알려줘야 한다. 나이와 사회적 신분은 내가 많고 높지만 당신과 나는 동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옳고 맞다 설명해야 한다. 그렇게 몇 번 하면 그게 기준이 된다. 대통령이 제일 먼저 해야 한다. 그래야 아랫것들이 줄줄이 따라 한다. 그게 전근대적인 유교 예절과 결별하는 것이고 나라의 격을 만드는 일이다. 글이 길어져서 도덕은 다음에 쓴다. A4 한 장 분량이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칼럼이 아니라 자료집이다.

사족 하나. 아, 상대 앞에서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맘대로 지껄여 봐 나는 네 놈의 말 따위에는 하나도 관심 없으니까 하는 호전적인 태도다. 상대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하겠다는 신념의 표출이니 어디로 봐도 예절은 아니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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