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구광모 회장이 LG전자 서초 R&D 캠퍼스 내 디자인경영센터를 방문해 출시 예정인 제품들의 디자인을 살피는 모습/사진=연합뉴스
LG 구광모 회장이 LG전자 서초 R&D 캠퍼스 내 디자인경영센터를 방문해 출시 예정인 제품들의 디자인을 살피는 모습/사진=연합뉴스

지난 30여년간 우리나라 상위 10대 재벌 거의 대부분이 검찰수사, 사법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한국의 기업과 기업인처럼 정치의 영향을 심하게 받는 나라는 드물다.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와 압축성장으로 삼성과 현대, SK, LG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이 탄생했지만 관치경제로 인한 정경유착, 1987년 민주화 이후 반기업정서 확대, 반기업, 규제정책이 난무하면서 많은 기업인들이 희생됐다.

윤석열 차기 대통령은 재계 1~3위 기업인 삼성 현대차 SK그룹 오너를 구속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16년 국정농단 특별검사팀 수사팀장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2012년 최태원 SK 회장, 2006년에는 정몽구 당시 현대차 회장을 구속 기소한 바 있다.

하지만 LG그룹은 창업이래 지금까지 단 한번도 오너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돼 사법처리된 일이 없었다. 구인회 창업주는 물론 2세 구자경, 3세 구본무 회장 등 LG그룹의 역대 오너 경영인들이 ‘정도(正道)경영’이라는 신념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경유착을 통해 몸집을 불려온 다른 기업들과 달리,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 골프장을 가보면 삼성 임원들은 주로 ‘갑(甲)을 접대하는 골프’를. 현대 임원들은 ‘을(乙)로부터 접대받는 골프’, LG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인화(人和)의 골프’를 하더라는 풍속도가 이를 대변한다.

LG는 재계에서 가장 공정과 상식에 부합하는 기업으로 꼽힌다. ‘인화’와 ‘정도경영’을 추구해온 LG는 재계는 물론 국민적으로도 이미지가 으뜸이다. 오랫동안 동업을 해 온 LG의 구씨 가문과 GS 허씨 가문의 경영자 대부분이 ‘재계의 신사’로 꼽혀왔다.

1968년 삼성 이병철 회장이 사돈인 LG 구인회 회장에게 전자산업 진출을 통보한 뒤 구 회장이 아들 구자경 전 회장에게 남겼다는 말은 구씨 가문의 ‘심성’, 이로 인해 형성된 기업문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쪽(삼성)에서 꼭 하겠다면 서운한 일이지만 우짜겠노. 서로 자식을 주고 있는 처진데...섭섭한 점이 있다면 금성사(LG전자)가 어려운 형편에 있을 때 넘어뜨리자고 덤비는 것...나도 설탕사업 할려면 못할 거 있나...그렇지만 나는 사돈이 하는 사업에는 손대지 않을끼다.”

 

LG전자는 우리나라 대기업 중 사실상 유일한 ‘노사상생 기업’이며 계열사 대부분이 노사분규가 없다. ‘편법 경영승계 시비’나 오너 일가를 둘러싼 탈·불법 논란이 LG그룹에서는 없었다.

기업 분위기가 좋을 뿐 아니라, 정·관계나 언론계 등 외부인들도 LG 그룹의 가족적인 분위기, ‘LG사람’들의 친절함과 따뜻함을 칭찬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LG그룹을 평가할 때, ‘신사’라는 칭찬에 가려진 그늘, 바로 보수성과 도전의식의 부재가 약점으로 지적되곤 한다.

LG와 삼성은 출발부터 오랫동안 한국 재계의 양대 산맥이자 라이벌이었다. 회사 설립 초기, 삼성은 비료와 조미료, 설탕, 모직 등이 주 업종이었고 LG는 화학(화장품)과 전자사업에 주력하고 있었다.

지금은 생활가전부터 반도체 모바일 분야는 물론, 차세대 먹거리 사업으로 떠오르는 바이오산업에 이르기까지 경쟁을 펼치며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다. 재계에서는 “LG와 삼성그룹을 수평저울 양쪽에 달고 무게를 재면 딱 반도체사업만큼 차이가 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LG보다 늦게 전자산업에 뛰어든 삼성이 반도체를 세계 1등으로 만든 것,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후 들어선 김대중 정부의 빅딜 강요로 반도체사업이 현대를 거쳐 SK로 넘어간 것이 LG로서는 뼈아픈 대목이다.

LG그룹에서 오래 근무한 임원들은 오늘날의 SK하이닉스에 대해 “LG가 정권의 외압에 의해 빼앗긴 것”이라고 말한다. 구광모 회장의 부친, 구본무 회장은 삼성전자가 반도체로 글로벌 기업이 되고 엄청난 돈벌이를 하는 것을 보며 늘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LG그룹의 ‘인화’와 ‘정도경영’은 삼성이 추구해온 ‘인재’, ‘일등주의’와는 대척점에 있다. 삼성이 반도체 등 IT산업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이병철 창업주와 2대 이건희 회장이 추구해온 ‘인재중심’과 ‘일등주의’ 경영철학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인재중심’이 가장 유능한 사람을 골라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면 ‘인화’는 능력보다는 관계, 협조를 중시하는 조직운영 방식이다.

이병철 이건희 회장은 전자사업을 키우면서 최고의 전문가를 찾은 뒤 그에게 과감하게 권한을 위임, 더 나아가 일임하는 방식을 택했다. 실제로 삼성그룹의 전문경영인 이학수 윤종용 최지성 등은 ‘2인자’가 아니라 ‘오너의 대리인’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본무 회장 시절에는 LG에서도 삼성과 같은 ‘스타급 전문경영인’이 기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LG의 ‘부회장급’들이 가진 권한은 정책결정 및 인사 등에서 삼성그룹의 부회장급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경영전문가들은 ‘인화’와 더불어 ‘정도경영’이 도전의식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 것으로 지적한다.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LG는 ‘정도경영’을 통해 기업 이미지와 지속가능성을 높인 것으로 평가받지만 실적과 성장의 측면에서 보면 ‘일등주의’ 삼성과 간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구광모 회장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이자 ‘가문(家門)의 염원’은 ‘LG 황금시대’를 재현하는 것이다. LG와 삼성의 오랜 인연, 경쟁관계를 놓고 볼 때 구광모 회장은 자신의 시대에 마주한 삼성 이재용 부회장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한다.

재계에서는 구광모 회장이 LG의 오랜 전통을 변화시킬지 주목하고 있다. 이와 관련, 구 회장 취임 이후 LG가 삼성전자와 SK 등 라이벌 기업들과 양보없는 싸움.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관심을 끈다.

지난 2019년 LG와 삼성전자간에 발발한 ‘8K TV 화질전쟁’ 당시 LG 임원들은 삼성전자 제품을 겨냥해 “국제기준 미달”, “변칙” “소비자 오도”라는 원색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공격했고, 지금도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자동차 배터리 인력유출 및 특허침해 소송과 관련해서도 재계 안팎에서는 LG와 구광모 회장에 대해 “SK 최태원 회장 간의 최고위급 대화로 좋게 해결해야 하라”는 압박이 심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LG는 삼성 및 SK그룹 양쪽 모두 전자산업, 특히 반도체와 관련해 아픈 역사를 겪었다. 오는 6월이면 취임 4주년을 맞는, 재계의 가장 젊은 총수로서 구광모 회장은 그룹 안팎에 보여줘야 할 것이 많은 상황이다.

윤석열 차기 대통령은 대선 슬로건으로 ‘공정과 상식’을 내건 바 있다. 공정과 상식이라는 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기업으로 꼽히는 LG와 구광모 회장이 윤석열 시대에 마주할 상황에 관심이 모아진다. <펜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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