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또 한 분의 6·25 참전 미군의 영웅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 4월 9일 윌리엄 웨버(William Bill Weber) 예비역 육군 대령이 향년 97세로 메릴랜드 캐롤카운티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웨버 대령은 1925년 시카고 출생으로 1943년 입대하여 2차대전 동안 제11 공수대대 소속으로 필리핀에서 근무했고 종전 무렵에는 일본의 군수기지에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 강제 노역자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 187 공수여단 소속 육군 대위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고, 이후 원주에서 공산군에 맞서 싸우다가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퇴원 후 다시 현역에 복귀했던 참군인이었다. 이런 6·25 영웅의 별세 소식에 애도가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은 추모패와 함께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웨버 대령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조전을 보냈고, 윤석열 당선인도 페이스북을 통해 유족에게 애도와 경의를 보냈다. 웨버 대령의 6·25 참전과 예편 이후에 이어진 그와 그의 가족들의 ‘한국 사랑’ 스토리를 아는 재미 한인사회도 슬픔을 나누었다.

원주 전투는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일전이었다. 전쟁 당시 웨버 대령과 함께 미 제187 공수여단에서 싸웠던 콜맨(J.D. Coleman) 예비역 중령이 2001년 한국전쟁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한 책 「Wonju-the Gettysburg of the Korean War」에서 원주 전투를 ‘한국의 게티스버그 전투’로 불렀다. 미국의 남북전쟁때 게티스버그 전투가 북군의 승리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원주 전투가 공산군의 전쟁 의지를 꺾고 양측을 휴전협상으로 끌어낸 계기로 본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한국전쟁의 쉰들러’들

원주 전투 직전까지 전황은 유엔군 측에 불리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을 북쪽으로 패퇴시키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 10월 1일 38선을 통과하여 10월 19일에는 압록강에 도달하여 통일을 목전에 두었다. 미군 병사들은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김일성 정권을 살리기 위해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급변했고 이후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중공군은 여섯 차례의 공세를 펼치면서 유엔군을 압박했다. 1950년 10월 25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제1차 공세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청전강 이남으로 후퇴해야 했고, 11월 25일에 개시된 제2차 공세는 유엔군은 38선 이남으로 밀어냈다. 이 공세로 미 제2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미 제10군단 휘하의 미 제1 해병사단은 장진호에서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 공격을 받으면서 해상을 통해 철수했다. 그것이 흥남 철수작전이었다.

흥남 철수작전은 중공군의 2차 공세로 함경남도로 진출했던 미 10군단이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어 유엔군이 흥남 부두를 통해 한국군 제1군단과 미군 제10군단의 장병 10만여 명과 군수물자 35만 톤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고, 1950년 12월 15일에서 25일까지 전개되었다. 당시 흥남 앞바다에는 철수 작전에 동원된 선박들이 가득 찬 상태였고, 흥남 부두는 공산치하를 벗어나려는 피란민들이 배를 타려고 아우성을 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세브란스 의전 출신 의사로서 미 제10군단의 고문관으로 근무했던 현봉학 박사와 한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알몬드(Edward M. Almond) 미 제10군단 사령관에게 피란민을 태워달라고 애원했고, 결국 알몬드 장군은 선박에 실었던 무기들을 내리고 피난민을 태웠고, 이들은 28시간의 항해 끝에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에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흥남부두를 떠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최대 2천 명을 태울 수 있는 화물선이었지만, 1만4천 명을 승선시킴으로써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선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빅토리호 선상에서는 5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는데, 한국말을 모르는 미군은 ‘김치1, 김치2’ 라는 식의 임시 이름을 붙였다. 2016년 서울역 앞 연세세브란스 빌딩에서 열린 현봉학 박사의 동상 제막식에 참여한 인사 중에는 빅토리호에서 ‘김치 1’과 ‘김치 5’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손양경 씨와 와 이경필 씨도 있었다. 흥남 절수작전을 통해 10만여 명의 피난민을 남쪽으로 보내는 기적을 만들어낸 현봉학 박사, 김백일 장군, 알몬드 사령관 등은 한국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한국전쟁의 쉰들러’들이었다.

‘한국전쟁의 게티스버그’ 원주 전투를 회상한다

중공군의 공세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앞세우고 제3차 대공세를 시작하면서 유엔군의 방어선은 또 다시 무너졌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위 37도선까지 후퇴하여 평택-안성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때 중공군과 전열을 재정비한 북한군은 한반도 중동부에 위치한 교통·전략의 요충지인 원주를 주목했다. 원주 지역을 장악함으로서 대전과 대구로 향하는 남진의 돌파구로 삼고 서부지역의 한국군과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 휘하의 미 제8군을 고립시키려 했다. 원주가 6·25 전쟁의 향방을 판가름하는 핵심적인 승부처로 부상한 것이다. 1950년 12월에서 1951년 1월에 치러진 원주 전투는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 모두가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면서 사력을 다한 총력전이었다. 이 전투에 참가한 유엔군 측 부대는 한국군 제3사단, 미 제10군단, 미 제1해병사단, 미 제2사단과 7사단, 미 제5기갑연대, 프랑스 대대, 네덜란드 연대, 그리스 부대 등이었으며, 공산군 측은 중공군 제42 집단군과 제66 집단군, 북한군 제2, 3, 5 군단 등이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뺏고 뺏기는 혈전 끝에 공산군을 제압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공군은 1951년 1월 8일을 기점으로 일단 공세를 중단해야 했다.

하지만, 중공군은 휴전협상에서의 고지 선점을 염두에 두고 4,5,6차 등 세 차례의 공세를 더 펼쳤다. 중공군은 1951년 2월 11일 제4차 공세를 통해 가평, 홍천 등을 돌파하여 대전-안동 선까지 남진하고자 했으나 지평리 전투에서 미군과 프랑스군에 대패하면서 발목을 잡혔다. 1951년 2월 13일에서 16일까지 경기도 양평리 지평리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부상을 당하고도 후송을 거부하고 끝까지 부하들과 함께 싸운 미 제2사단 23연대장 프리먼(Paul Freeman) 대령과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둘러매고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이면서 진지를 사수했던 프랑군 대대의 몽클라르(Ralph Monclar) 중령이라는 두 사람의 전쟁영웅을 탄생시켰다. 유엔군이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저지하고 서울을 재수복한 후 구축한 임진강-연천-화천-양양으로 이어지는 ‘캔자스선’을 붕괴시키고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1951년 4월 22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제5차 공세도 강력한 저지에 부딪쳐 8일 만에 종료되었다. 5월 16일에 시작된 제6차 공세는 한반도 중동부의 산악지대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감행되었으나 미 제3사단의 역습으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고 4일 만에 종료되었다.

이렇듯 수많은 전투가 이어졌지만 원주 전투는 6·25 전쟁의 중요한 분수령 중의 하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과 북한군 제2군단 및 제5군단은 궤멸 수준의 피해를 입어 대규모 공세를 펼칠 기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반면 유엔군은 ‘선더볼트 작전(Operation Thunderbolt: 1951.1.25.~2.20)’을 통해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 작전으로 북진을 재개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서부 전선에서 수원-이천 방어선을 돌파하여 2월20일 관악산을 점령하고 3월 15일 서울을 재수복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또한 원주 전투는 중국과 소련으로 하여금 한반도 공산통일의 꿈을 접고 휴전협상에 나오게 만든 분기점이었고, 결국 1951년 7월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이 개최되었다. 이후에도 한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공방전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시까지 이어졌지만, 원주 전투는 진정 ‘한국전쟁의 게티스버그 전투’였다.

윌리엄 웨버 대령의 명복을 빌며

웨버 대령이 팔과 다리를 잃은 원주 북쪽 324고지 전투는 1951년 2월 원주 전투의 와중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영하 30도의 혹한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었지만, 반드시 그를 살려야 한다는 미군 최고위층의 명령에 따라 웨버 대령은 서울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다시 일본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후송되었고, 이후 1년동안 수술과 재활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현역에 복귀했을 그는 인공 팔과 인공 다리를 함께 착용한 유일한 미군이었다. 웨버 대령의 한국 사랑은 1980년 예편 후에도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웨버 대령은 한국전쟁 참전용사기념재단 이사장을 맡아 “6·25가 자유 진영이 공산주의 진영의 무력에 맞선 첫 전쟁”이라는 전쟁의 본질과 참상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을 계속했고, 그의 딸 배스 웨버와 손녀 데인 웨버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를 따라 6·25 참전국들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에 참석하면서 전쟁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웨버 대령과 그의 딸과 손녀 모두가 6·25 전쟁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라들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희생된 영웅들이 어찌 웨버 대령뿐이겠는가.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오늘날의 자유와 번영이 70여년 전 전쟁에서 피흘린 유엔군과 국군장병의 희생 위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과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우리를 지키는 담장이 되고 있는 휴전선까지 모든 것들이 이 군인들이 흘린 피로 이루어졌음을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 부산 유엔군기념공원에는 죽어서도 귀국하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영면한 11개 참전국의 유엔군 장병 2,300여 명이 영면해 있다. 국내 국립현충원에도 수많은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다시 한번, 두 손을 모아 그분들의 명복을 빌자.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전 통일연구원장·전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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