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 장석주 '대추 한 알' -

사진=연합뉴스

공직자의 사명은 무엇인가

2013년 늦은 가을 어느날 청와대 인트라넷에 대통령실 전직원 조회가 공지됐다. 오랜만에 조회가 소집됐다. 이 때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10개월 쯤이다. 직원 조회가 열리는 당일 400여 명의 직원들이 영빈관에 모였다.

이날 조회는 두 달 전 부임한 김기춘 비서실장이 직원들을 만나고 싶어 소집한 자리였다. 비서동을 오가며 비서실장께 인사를 드린 적은 있지만 직접 대면해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없었기에 어떤 말씀을 하시려나 기대가 있었다.

영빈관 행사장의 연단에 오른 김기춘 비서실장은 '공직자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라고 하는데 그게 맞는 말이냐"라고 물었다. 연이어 "'공무원은 영혼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맞는 말이냐"라고 물었다. 그러고는 "공무원은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고,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가장 우선해야 한다"며 "공직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새로 임명된 장관이나 공공기관장들의 통상적인 인사 말씀과는 결이 달랐다.

'문체부 블랙리스트' 어떻게 생겼나

2013년 10월 18일을 전후로 서울시 비영리 민간단체의 보조금 편파 지원 사실이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당시 서울시장은 박원순이었다. 보조금을 받은 단체 중에는 박원순 시장과 민주당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하며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국정원 댓글 관련 시국선언'에 참여한 단체가 있는가 하면 문재인 대선후보 캠프에 참여하거나 2000년 총선 때 낙천·낙선 운동을 주도한 인사가 대표인 단체도 있었다. 단체 중에는 서울시장 선거 당시 캠프에 참여해 박원순 시장 당선을 도왔거나 지지를 표명한 임원진이 포함돼 있었다.

통합진보당 관련 단체도 3곳이나 포함돼 있었다. 1,200만 원을 받은 지역 관련 단체는 대표가 통합진보당 당원이었고, 역시 1,200만 원을 받은 청소년 관련 단체는 청소년 회원들이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다. 각종 불법집회에 참여한 단체나 관련 인사들이 임원인 단체도 포함됐다.

2013년 10월 31일에는 한국자유총연맹이 국고보조금을 부당집행한 사실이 적발됐다. 당시 안전행정부는 자유총연맹의 국고보조사업 집행 실태에 대해 특별감사한 결과, 이런 사실이 드러나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13년 12월 4일에는 국고보조금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던 농민단체 회장 등 전현직 간부들이 경찰에 적발됐다.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및 업무상 횡령 혐의로 농민단체 전 회장이 구속되고, 현 회장 등 3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허술한 국고보조금 관리 실태에 대한 지적이 국정감사와 언론 보도로 크게 부각되자 김기춘 비서실장은 국고보조금 지원 실태와 개선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국고보조금이 통합진보당 등과 같은 친북단체의 자금으로 유용되거나 반정부 불법시위 등을 주도하는 특정 정치세력의 자금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문화일보 등의 보도로 국고보조금 문제가 크게 부각됐다. 비영리 민간단체를 지원하는 국고보조금은 문체부와 안행부가 우선적으로 관련성이 높은 부처다. 그에 따라 두 부처가 특히 주목을 받게 됐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실과 해당 부처가 국고보조금 지원 실태 파악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관련 실무자들이 반정부 불법시위에 참여하거나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등의 국고보조금 지원 부적격자가 될 만한 단체와 인사 관련 자료를 만들었다. 국고보조금 지원 여부를 결정할 때 사용할 참고자료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자 이 자료는 '문체부 블랙리스트'(이하 블랙리스트)라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 김기춘 비서실장 등을 형사처분하는 무기가 됐다.

서울시의 조례 제2조(정의)에는 비영리단체 보조금 지원 대상을 '특정 정당 또는 선출직 후보를 지지하거나 특정 종교의 교리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닐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특정 정당 또는 선출직 후보를 지지하는 단체나 인사는 국고보조금 지원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규정화돼 있다.

국고보조금 지원 관련 개선방안 마련에도 집중했다. 비영리 민간단체들의 투명한 회계와 효율적인 사업 운영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기부 방법 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해 온 한국가이드스타 박두준 사무총장이 나섰다. 그는 회계 투명성과 관련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필자도 당시 박두준 사무총장을 만나 그의 조언을 경청한 적이 있다.

안전행정부는 2014년 2월 11일에 '비영리 민간단체 보조금 회계비리 근절' 방안을 발표했다. 청와대 비서진과 안전행정부 담당자 등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 및 현장 활동가들의 조언을 반영하고 협의해 만든 결과였다. 공익활동 지원사업 관리정보시스템 도입, 업무절차 재정비 및 체크카드 사용 의무화, 자부담 경비 관련 대책, 회계교육 등 지원 서비스, 행정안전부의 직접적 회계검사 추진 등이었다. 특히 관리정보시스템의 도입 이후 보조금 회계비리 근절에 큰 진전이 있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라고 했던가. '국민 세금 비리'를 막고자 한 것이 탄핵을 거치며 '정적 탄압'이라는 범죄가 되었다.

블랙리스트를 저격한 박영수 특검

2016년 10월 도종환 의원(더불어민주당)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회의록 자료를 분석한 결과, 청와대와 문체부가 예술위원회 심사 및 심사위원 선정에 개입했고,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라며 블랙리스트 사건을 발표했다. 이후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문학인,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예술인,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예술인들의 명단이 문체부에서 작성돼 검열의 대상이 되고 야당 성향의 일부 인사는 지원 대상에서 배제된 것이라 발표했다. 도종환은 전교조 출신으로 2001년 임수경과 함께 방북한 대표적인 좌파 문화인이다.

2017년이 되자 블랙리스트 사건은 '박영수 특검'의 수사 대상이 됐다. 박영수 특검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법률'(이하 최순실 특검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최순실 특검법'에는 특별검사의 수사 대상이 정해져 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최순실(최서원)의 사건과 관련이 없어 특별검사의 수사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박영수 특검팀은 최서원이 김종(전 문체부 차관), 차은택(전 문체부 문화융합본부장), 고영태 등과 공모하여 K-스포츠재단과 미르재단 설립에 관여한 것 등을 기회로 블랙리스트 사건을 수사 대상에 포함하고 관련자를 소환조사했다.

당시 특검의 이규철 대변인은 수사 사건을 거의 매일 브리핑했다. 언론은 특검 대변인의 사건 브리핑을 사실관계 확인도 없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부 언론은 이규철 대변인이 '숨겨진 패셔니스타'라며 그의 옷 입는 스타일에까지 찬사를 보냈다.

낯 뜨거운 일들이 한 편의 코미디 영화처럼 재연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피의자의 방어권은 무시됐다. 피의자들의 주장은 묻히고 특검 수사팀의 발표가 곧바로 진실처럼 굳어졌다. 객관적 사실이나 증거로 확인되지 않은 수사팀의 발표가 기자의 상상력과 합쳐져 허위의 여론을 만드는가 하면, 특검 수사팀은 이런 언론의 허위 보도를 피의자 압박 수단으로 활용했다. 특검 수사팀은 여론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특검 수사팀에 맞서다

특검 수사팀이 블랙리스트 사건을 수사하자 필자는 "블랙리스트는 대통령의 정당한 통치행위"라는 입장을 밝혔다. 채널A에서 현직 청와대 행정관의 발언으로 보도하자 그 여파는 특검 수사팀에도 미쳤다. 특검팀 수사에 정면으로 맞서자 특검 수사팀은 필자에게 소환 통보를 했다. 괘씸죄였다.

연휴 첫날인 1월 27일 특검 수사팀과 마주했다. 긴 수사가 진행됐다. 필자는 "블랙리스트는 청와대나 문체부 공무원들이 업무상 필요에 의해 만든 대외비 문서이고,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수호 책무를 위한 국정수행과 통치행위 차원의 정당한 행위이며, 특검의 수사 대상이 아닌 블랙리스트 사건에 진술할 수 없다"며 진술 자체를 거부했고 만약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필자를 계속 조사한다면 특검법에 의거하여 서울고등법원에 이의신청을 제기하겠다고 했다.

결국 특검 수사팀은 필자를 수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특검의 기한이 종료되자 특검에서 조사한 자료는 검찰로 이관되었고, 몇 달이 지나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필자를 다시 소환하였다. 진짜 승부는 이때부터였다.

덧씌운 올가미를 풀어줘야

김기춘 비서실장은 블랙리스트의 주범으로 몰려 1,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일부 내용을 무죄 취지로 판결하여 하급심으로 보냈다. 작년 1월 이후 하급심은 재판을 하지 않더니 급기야 7월에 박영수 특검이 사임하면서 이 사건 재판은 중단됐다. 2017년 초엽에 시작된 사건인데도 아직 법원에서 잠들고 있다. 

그는 허술한 국고보조금 지원을 바로잡기 위해 실태 파악과 개선방안을 마련하도록 조치했고, 특히나 특정 선출직 후보를 지지 및 반정부 불법시위, 친북단체 활동 자금으로 유용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보조금 지원 대상의 규정에도 맞고 국민 세금인 국고보조금의 적절한 관리와 사용을 위한 공직자 책무로서의 처신도 적절했다. 만일 국고보조금이 부당하게 사용되거나 방만하게 운영된 사실을 알고도 모른 채 했다면 오히려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문체부 블랙리스트'는 해당 담당 공무원들이 대통령과 정부가 구상한 국정 행위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대외비 문서, 즉 행정문서이다. 국고보조금 비리를 막고 불법적 시위나 반정부 자금으로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한 행정사무의 참고자료이다.

대통령이나 공직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어긋나는 불법적이거나 반정부적 활동, 친북적 활동을 하는 단체나 개인에게 국민 세금 지원을 배제할 수 있다. 아니 배제해야 한다. 김일성주의나 공산주의에 경도돼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자들에게 국민 세금의 혜택을 주지 않는 것이 왜 불법적 행위인가. 오히려 이것을 방치하는 게 직무유기 아닌가.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덧씌운 올가미를 풀어야 한다. 별의 순간을 놓치고 권력을 빼앗긴 것을, 대통령께 책임을 떠넘길 수 없어 선택한 침묵을, 환란과 위기의 순간에 나서지 못한 책임을 묻는 이들도 있으나 필자는 그 분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 분은 매순간 자신의 책임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70대 후반의 한 노인에게 닥친 극한의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매순간 견뎌야 했다. 그 분이 흘린 눈물을 누가 다 알겠는가.

허현준 前 청와대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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