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야 북방영토 문제라는 역사적 감정적 앙금이 있으니 러시아를 적대시 한다지만 한국은 도대체 왜 러시아의 비우호국 명단에 들어갔는지, 치명적인 외교실책은 없었는지를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도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악성인플레이션에는 어떻게 대처할지, 그리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너지 수급을 어떻게 할지,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꼬일대로 꼬여버린 한국 외교는 고려 시대 요나라의 장수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강동 6주를 되찾아온 서희가 환생해도 풀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

우크라이나 위기가 한창인 지난 8일, 러시아는 비우호국·지역 명단을 발표했다. 이 명단에는 미국, 캐나다, EU국가(단일체로 본 EU체제로 반드시 개별국가를 의미하지는 않음), 영국과 그 속방(저지, 버진아일랜드, 앵귈라, 지브롤타) 우크라이나, 몬테니그로, 스위스, 알바니아, 안도라, 아이슬랜드,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노르웨이, 산 마리노, 북 마케도니아, 일본, 한국, 호주, 미크로네시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타이완 등 모두 22개 개별 국가 및 지역이 열거됐다.

비우호국의 ‘비우호’는 영어로는 ‘unfriendly’이며, 그 뉘앙스는 단순하다. 한국어 해석으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unfriendly’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니드루쥐늬’(недружный)의 뉘앙스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형제, 가족 같은 우애에 반(反)하는 비우호적’이라는 뜻이 담긴 이 단어는 ‘언제라도 적으로 간주한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비우호국 명단에서 러시아가 간주하는 주적(主敵)에 미국과 영국 등 앵글로색슨 계열 국가가 모두 들어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의 푸틴을 전범으로 규정했으니 미국은 당연히 러시아의 적이고 영국은 원래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숙적이다. 영국은 브렉시트로 EU에서 탈퇴했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회원국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지원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가 미국과 영국이다. 반면 러시아산(産) 천연가스가 없으면 경제가 마비되는 독일, 그리고 원자력발전소가 있기는 하지만 다소 실용 외교로 전환하고 있는 프랑스의 경우 러시아를 적대시하는 것을 피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지원도 미온적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유럽연합(EU)를 이끌어가는 두 축이 러시아에 대해서는 중재자를 자처하면서 극단적인 대(對)러시아 제재를 자제하는 편이다.

독일,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은 3월 15일 대러시아 경제제재안을 발표했다. 영국은 러시아에 대한 럭셔리 상품수출을 금지하고 러시아산 상품에 대해 현재 환율기준으로 새롭게 35%의 수입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내용을 보면 영국산 고급 차량과 명품·패션 상품 수출을 금지한다는 것인데, 이는 예를 들면 롤스로이스를 러시아에 팔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아주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푸틴은 이미 전용 리무진을 독일 벤츠에서 자국산 호화 브랜드 아우루스로 바꾼지 오래됐다. 러시아 부유층들도 아우루스로 바꾸면 그만이다.

영국은 러시아산 보드카에 대해서도 추가 수입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보드카가 러시아의 자존심인 만큼 상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면서 이른바 정신승리를 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 경제에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겠다면서 35%의 추가관세 수입 상품들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철강, 비료, 목재, 타이어, 열차 컨테이너, 시멘트, 구리, 알루미늄, 은, 납, 음료, 보드카를 포함한 주류, 식초, 유리제품, 시리얼, 종이, 기계, 미술품, 가죽, 생선등이 망라됐다. 이는 오히려 저렴한 러시아산 원자재를 수입하는 자국 업자만 타격을 받는 부메랑 효과를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에 있어 영국은 역사적으로 숙적이다. 이는 러시아인의 인식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한 세기 전 러시아가 패배한 러일전쟁은 일종의 대리전이었다. 영국이 일본을 돕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봉쇄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대제국의 이점을 이용해 러시아 발틱함대의 태평양 진출을 방해했다. 결국 발틱함대는, 220일 동안 지구둘레의 4분의 3이나 되는 2만9천킬로미터(㎞)를 항해하는 바람에,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일본연합함대에 대패(大敗)했다. 이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의 이른바 그레잇게임(Great Game)에서도 러시아와 영국은 늘 라이벌이었다. 영국에 대한 원한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군가 ‘크라스나야 아르미야 프셰흐 실녜이’(Красная Армия всех сильней, 붉은 군대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라는 곡에서도 나타난다. 타이가에서 영국해까지(Ведь от тайги до британских морейКрасная Армия всех сильней) 군사력으로 압도한다는 무시무시한 가사 대목이 있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의 군사 퍼레이드.(사진=로이터)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의 군사 퍼레이드.(사진=로이터)

러시아가 발표한 비우호국 명단에는 영국과 미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앵글로색슨 국가들이 모두 포함됐고 쿼드(QUAD) 회원국 가운데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지혜로운 외교를 하고 있는 인도를 제외한 미국, 호주, 일본이 들어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미국의 동맹국들 가운데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가장 러시아에 적대적이다. 일본은 이른바 북방영토 문제에서 일찌감치 자국 편을 들어 러시아에 대해 반환을 요구한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패할 확률이 높을 것으로 판단하고 과감하게 도박을 하고 있는 일본은 북방영토 영유권 주장을 최근 크게 강화했다.

사실상 러시아를 적국으로 보고 있는 일본은, 그러나, 현실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항공(JAL)과 전일본공수(ANA)가 각기 러시아 영토를 북과 남으로 크게 우회해 날고 있으며 러시아발(發) 악성 인플레이션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경제파국의 가능성이다. 원유생산 세계 3위, 소맥수출량 세계 1위인 러시아발 에너지, 식량난의 공포가 현실화 되고 있다. 러시아는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희귀금속 팔라듐도 대량으로 수출하는 국가다. 일본만 해도 세계적인 수입원자재 수급난으로 인한 엔저현상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일본은 당분간 제로금리를 유지한다는 방침이지만,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면 역시 엔저를 면하기 힘들다. 원유 등 수입품의 가격이 앙등하는 가운데 엔저 현상이 심각해지면 중소기업 임금인상 압박 등으로 인해 당장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장기적인 소비 냉각을 막기 위해 임금인상이 불가피한데 이는 다시 물가인상으로 이어져 악성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게 된다.

일본이야 북방영토 문제라는 역사적 감정적 앙금이 있으니 러시아를 적대시 한다지만 한국은 도대체 왜 러시아의 비우호국 명단에 들어갔는지, 치명적인 외교실책은 없었는지를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국 편을 드는 등 우리를 적대시한 적이 없다. 우크라이나가 침략을 당해 동정하는 입장이라면 정부차원에서 조용히 인도적 물자지원을 하고 대러제재에서는 미국등 동맹국들을 어쩔수 없이 따라가는 정도만 했으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민간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응원한다면서 키예프를 ‘키이우’로 불러야 한다는 등 요란을 떨 필요가 전혀 없는 사안이다. 비우호국 명단에서 인도, 터키, 중동, 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빠져 있다. 한국이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는 나토나 유럽연합 회원국도 아닌 마당에 상당히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제 우리도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악성인플레이션에는 어떻게 대처할지, 그리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너지 수급을 어떻게 할지,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꼬일대로 꼬여버린 한국 외교는 고려 시대 요나라의 장수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강동 6주를 되찾아온 서희가 환생해도 풀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박상후 객원 칼럼니스트(언론인 · 前 MBC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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