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감정, 그 감정이 발생한 이유 따져 물어야
분노와 한, 소외의식...언더도그마 정서가 호남인의 제2의 정체성
호남, 근대화 과정의 소외자이자 근대화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자
호남을 혐오하지 말고 비판해야...대중적 차원의 이념투쟁, 사상투쟁 필요
전선만 제대로 형성하면 '우파 필승' 구도...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객원 칼럼니스트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지역평등시민연대라는 단체를 만들어 막 호남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하던 무렵이니 거의 10여년 전의 일이다.

호남 출신 인사들 주도로 지역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언론에 자주 소개되는 한국 사회학계의 저명한 교수가 발제를 맡는다고 해서 나도 청중의 한 사람으로 토론회에 참석했다.

그 교수님의 발제는 재미있었다. 발제 요지는 ‘지역 문제가 중요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다. 특히 정치적인 문제(사회적, 감정적인 문제 포함)와 경제적인 문제가 교차되는 현상일 뿐이지, 두 가지가 중첩되는 관계인 것은 아니다’는 것이었다.

그 분의 주장에 따르면, 호남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인 차원일뿐, 경제 사회적인 차별과 겹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 심각하게 여길 것은 아니고 노력 여하에 따라(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런데 이 분은 같은 발제에서 “대선이나 총선 등 중요한 선거에서 처음에는 영호남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경제적인 이슈가 제기되면 그때부터는 영호남 대립이 전면화된다”는 말씀도 하셨다. 질의응답 시간에 나는 여기에 대해 질문했다.

“지역갈등과 경제적인 이해가 상호 교차 관계일뿐 중첩 관계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또 선거 때 경제적인 이슈가 제기되면 영호남 대립이 첨예해진다고도 하셨다. 두 가지 말씀이 모순 아니냐? 선거 때마다 영호남 대립이 첨예해지는 것은 이 문제가 자원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

그 교수님이 내 질문에 답변하지 않아서 그분의 생각을 깊이 알 수는 없었다. 그나마 그 교수님 정도면 문제의 본질을 피하지는 않은 경우라고 봐야 한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호남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를 꺼린다. 호남 문제에 대해 부득이하게 발언할 경우에는 천편일률적인 답변을 내놓곤 했다. 특히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이 그랬다.

“지역문제는 계급문제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다. 계급문제가 해결되면 지역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그나마 좌파는 이런 교과서적인 답변이라도 내놓지만, 우파 지식인들은 아예 호남 문제에 대한 견해라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나는 그 이유를 비교적 나중에야 알게 됐다. 우파의 견해란 게 사실은 일베로 대표되는 호남 혐오 외에는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베의 호남 혐오가 공론장에서 담론의 지위를 가지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러니 우파 지식인들이 호남 문제에 대해 아예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좌우 지식인들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나는 호남 문제를 그리 간단하게 정리할 수 없었다. 우선 호남 출신으로서 내 자신이 50여년 넘게 직접 겪은 경험치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반세기 넘게 선거 때마다 재연되어왔던 정치적 대립구도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60년대 최소한 70년대부터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전국 규모 선거는 사실상 영호남 대립구도였다. 문제는 이 영호남 대립구도의 진정한 의미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이 매우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피상적인 ‘지역감정’이라는 용어가 모든 합리적인 접근과 분석을 대신했다. 하지만, 감정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현실의 반영일뿐 본질은 아니다. 지역감정이라면 그 감정이 발생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나는 이 문제가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영남패권의 편중된 자원 배분에서 비롯된 것으로 봤다. 1960년대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의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급속한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제한된 자원을 소수의 기업과 지역에 집중하는, 이른바 선택과 집중 전략이 불가피하게 필요했고 그 결과 일부 대기업과 영남 지역이 수혜를 본 반면 호남은 거기에서 소외됐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 자원은 대부분 한일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일본에서 들여온 자금과 기술 등이었다. 지정학적으로 일본 간사이 경제권과 영남 지방의 연계가 한국 경제개발의 핵심 엔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자원 배분을 구체적으로 결정하고 집행하는 역할을 중앙정부가 맡는 것은 불가피했다. 경부축이 한국 경제의 대동맥이 되고, 수도권 집중 현상이 심화된 것도 모두 이런 구조적 원인이 발현된 결과이다.

군부 엘리트가 권력을 잡고 오랫동안 권위주의적 통치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시대적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현상이었다고 봐야 한다. 자원의 편중은 필연적으로 소외된 계급과 지역의 불만을 낳지만 한국 같은 저개발국가의 경우 그걸 해소할 별도의 자원을 마련하기 어렵다. 즉, 통치체제에서 당근보다 채찍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1960~70년대 상황에서 이런 채찍 역할을 할 수 있는 집단은 군부가 유일했다. 가장 근대적인 교육을 받고 조직화된 집단이었고 저항세력을 진압할 수 있는 물리력을 갖고 있었다. 정치적인 관심도 높았다. 박정희가 18년 동안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군부 집단의 대표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구조가 박정희 시스템의 핵심이다.

호남은 이런 자원 배분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다. 본격적인 산업화로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영남과 수도권의 산업 벨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자의반 타의반의 신분 전환이 이루어졌다. 노동자로 신분 전환한 경우는 그나마 낫고 그냥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경우도 많았다.

사회적 하층계급은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 하층계급이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호남 출향민은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었다. 게다가 호남 혐오는 조선시대부터 존재해왔던 증거도 있다. 이런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상태에서 호남 혐오가 생기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었을 것이다.

호남 출향민은 출향민대로, 호남 현지에 남은 호남인은 호남인대로 분노와 한, 소외의식이 쌓여갔다. 이런 호남인의 정서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여 자신의 정치 자산으로 삼은 정치인이 김대중이다. 그리고 호남의 언더도그마 정서가 호남인의 제2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은 결정적인 계기가 5.18이었다.

5.18을 계기로 호남의 언더도그마 정서가 좌파의 이념체계와 강고하게 결합했다. 감정이라는 속살에 이념이라는 갑옷이 덧입혀진 것이다. 이것은 반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가진 좌파 진영에 최적의 무기이자 기회였다. 이들이 이 무기를 사용해 최초로 거둔 정치적 승리가 1987년 직선제 개헌과 6공화국의 성립이다.

현재 좌파 진영의 주축인 시민단체들 대부분이 1987년 체제 성립 이후에 등장했다는 것에서 이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후 사태는 언덕 위에서 굴린 눈덩이가 아래로 내려가며 거대한 눈사태를 만들어내듯이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됐다. 좌파가 정치적 승리자의 위치를 활용해 경제와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주도권을 확대해간 것이다.

3당합당도 여소야대의 수세에 몰린 우파가 위기 돌파를 위해 상당한 정치적 지분을 내주고 온건 좌파와 손잡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좌파가 제도권 안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둑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파는 좌파의 근거지인 시민단체와 노조 등을 타격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정치적 승리자로서 명분을 장악한 좌파의 영향력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두지만, 나는 1987년 체제의 민주화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는 건국과 산업화 단계를 거쳐 진행되어온 근대화 과정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과제였다는 얘기다.

민주화가 가져온 성과는 어마어마하다. 사회 전반의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분위기가 극복되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로 가는 단초가 만들어졌다. 한국 경제가 성장을 지속하고 세계 10위권의 위상에 오른 것도 민주화로 인해 열린 기회의 창, 민간 부문의 자율과 창의의 분위기가 결정적이었다.

다만, 이 민주화가 말 그대로 근대화의 마무리라는 위상을 확고하게 하려면 그 이전 단계인 건국과 산업화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호남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이 이 절차를 생략하거나 거부한 데에서 1987년 체제는 그 엄청난 성과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균열 요소를 갖게 됐다. 지금 한국 사회의 심각한 갈등과 분열의 진원이 바로 이 문제라고 봐야 한다.

호남의 자랑스러운 유산인 민주화의 성과가 좌경화로 오염되기 시작한 것이다. 좌파들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근대화의 진정한 승리자이며 그런 점에서 민족사적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들은 북한 김씨조선 방식의 근대화가 올바른 근대화이며 따라서 평양정권에 민족사적 정통성이 있다고 믿는다. 비극적인 것은 호남이 그런 좌파의 전위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문제의 해결이 어려운 것은 호남이 근대화 과정의 소외자라는 성격과 함께 근대화의 가치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자라는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호남을 혐오하지 말고 비판해야 한다고 우파에게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흑백논리 접근으로는 문제 해결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5.18묘역에 참배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역효과를 낳는다. 좌파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시켜주는 것이다. “내가 과거에 잘못했다”는 말만 계속하는 정치세력을 호남이 지지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이래서 옳다”는 얘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복합 쇼핑몰은 우파가 내세우는 가치가 어떤 것이며, 그게 왜 호남의 평범한 유권자들에게도 유리한가를 직관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이슈였다. 나는 특히 이 이슈가 호남의 젊은이들과 여성, 주부들이 피부로 느끼는 불만을 좌파 민주당과 시민단체들에 대한 분노로 직결할 수 있는 인계철선이라고 판단했다.

심하게 열이 나는 환자가 있다고 해보자. 이때 의사의 대응은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열이 나는 근본 지점을 파악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열이 나는 이유를 찾아낼 수 없어 일시적인 해열제만 처방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우파 정당과 정치인들이 호남 문제를 대하는 방식은 후자에 가까웠다.

호남 문제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대증요법만 줄기차게 시행해온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시시때때로 5.18묘역에 찾아가 무릎 꿇는 것이다. 그걸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것만 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호남이 갖고 있는 반기업 반시장 반대한민국 정서를 비판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호남에 대한 애정이자 화합의 노력이다.

호남의 진짜 문제는 근대화 과정의 소외이자 자발적인 반근대 가치의 수용이다. 소외는 해소하고 그 회복을 지원해야 하지만, 자발적인 반근대의 가치의 수용에 대해서는 엄정한 비판과 대안 제시가 있어야 한다. 대중적인 차원의 이념투쟁, 사상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어설픈 예산 퍼붓기나 과거사 사과, 진정성도 없는 립서비스 따위로는 호남을 변화시킬 수 없다. 호남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차원도 아니고 호남 사람들이 그런 방식에 감복해 생각을 바꿀 정도로 어설프지도 않다.

호남은 이념적 성향은 강하면서도 이념적인 내용은 별로 없다. 좌파 진영으로서의 지향이 강하지만 그것이 체계적인 이념 학습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호남의 좌파들은 좌파의 이념적 내용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특히 NL주사파 성향들의 이념적 무지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저 단순 프로파간다를 복제 재생하는 스피커 수준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이건 호남의 좌파 아성을 가장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가 바로 대중적인 이념투쟁, 사상투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대로 전선만 형성하면 우파가 필승하는 구도다. 이걸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9:39~40)

나는 호남의 엘리트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이 말하지 않고 침묵한 그 진실을 말한 하나의 돌멩이였을 뿐이다. 그 진실의 위력이 궁금한가? 이번 대선에서 호남 특히 광주는 역대 최고의 우파 후보 지지율을 보여줬다. 이렇게 늘어난 광주와 호남의 지지가 아니었다면 윤석열 후보는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윤석열 후보와 국민의힘 모든 당원과 당직자들 그리고 지지자들과 승리의 기쁨을 함께하면서 내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호남 승리의 진실을 공유하고 싶다.

주동시 객원 칼럼니스트 (국민의힘 광주광역시 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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