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힘이 상병 말년의 24세 청년을 주저하지 않고 전쟁터로 가겠다고 나서게 했을까? 또 그런 그를 말리지 않고 아무런 말도 없이 보내려 했던 가족, 친구에게는 어떤 신념이 있었던 것일까? 그땐 그랬다.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전쟁터로 달려가는 것이 이 나라 군인의, 이 나라 국민의 할 일이라고 국민 대부분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엄청난 일을 그렇게 흔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교육의 힘이었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침공당하자 외국에 나가 살던 많은 우크라이나 인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다. 20년 동안 한국에 살며 한국 팝스 오케스트라에서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던 주친 드미트로 씨. 그의 나이는 47세이다. 20년 동안 한국에 살았다면 거의 한국인이나 다름없을 것이고 그의 나이를 감안했을 때 굳이 전쟁터로 가서 군복을 입지 않아도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조국으로 달려갔다. 같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던 마트비예코 코스틴(52세, 트럼펫) 씨와 레우 켈레르(51세, 비올라) 씨도 함께 비행기를 탔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스포츠 선수들도 망설이지 않고 총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중 안타깝게도 이미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도 있다. 하르키우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 우크라이나 국가 대표 바이애슬론 선수 예브게니 말리셰프가 전사했다. 그의 나이 이제 열아홉이다. 키이우(키예프) 부근에서 벌어진 교전에서는 자원 입대한 카르파티 리비우, 드미트로 마르티넨코 선수가 전사했다. 이들은 겨우 20대 초중반의 축구 선수들이었다.

이런 상황과 관련된, 어린 시절 들었던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한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각각 수에즈와 골란 고원의 양 전선에서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 제4차 중동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명문 대학교에 다니던 이스라엘 유학생이 부지런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영문을 묻는 친구들에게 이스라엘 학생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는데 마음 편히 이곳에 있을 수 없다. 나는 참전하러 이스라엘로 가겠다.”

기숙사 다른 방에서 아랍 학생도 열심히 가방을 싸고 있었다.

“너도 참전하러 귀국하는 거냐?”

“아니,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터졌으니 곧 징집 영장이 날아올 텐데 그걸 피하기 위해서 떠나는 거야.”

당시는 중동 국가에 대한 정보를 별로 접할 수 없었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정보도 미국을 통해서 들어오던 때였다. 그러니 주로 그런 편향된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중학생이던 나는 그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 사람들에 대한 선입관을 갖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개전 엿새 만에 골란 고원 전투에서 시리아군을 물리쳤다. 그 뒤 시나이반도로 이동한 이스라엘군은 개전 열흘 만에 수에즈 시를 점령했다. 당시 나는 이 전광석화와 같은 승부도 두 나라 젊은이들의 ‘정신 상태’를 감안했을 때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1
 이동 중인 러시아 군인들. 이 칼럼과는 관계 없음. 

물론 위 이야기와 같은 학생들도 있었겠지만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다. 문제는 위 이야기의 진위 여부가 아니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언제라도 우리 앞에 닥칠 수 있고 그때 우리가 어떤 쪽에 서게 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휴전협정을 맺어 포성이 멎은 지 70년 가까이 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쟁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또 그 70년 동안 위 이야기에 나오는 그런 선택을 할 경우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1983년 8월 초의 일이다. 내 남편은 당시 군 복무 중으로 우리는 아직 결혼 전이었다. 휴가 나온 남자친구(남편)와 나는 그의 집에 다니러 갔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니 인천 지역에 공습경보가 발령되었다는 속보가 뜨고 있었다. 인천은 수도 서울과 지척이고 일반적으로 공습경보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아무 정신도 없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주섬주섬 군복을 챙겨 입는 것 아닌가?

“휴가 중 비상시 용산역으로 집결하라는 지침이 있었어.”

상황은 채 10분도 안 되어 종료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중국 조종사 쑨티엔친[孫天勤]이 MIG-21기를 몰고 인천 상공을 향해 귀순해오는 통에 공습경보가 발령된 것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각자 많은 생각을 했다. 6‧25전쟁 때 격전지로 유명한 화천군 사창리 부근에서 복무하던 남자친구는 입고 갈 군복을 챙기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전황이 심각해지면 우리 부대까지 가지도 못하고 다른 부대에 배속될 텐데 어디로 가게 될까? 사병이야 어차피 어느 부대에 배속되나 마찬가지겠지. 그런데 군복을 다려 입고 갈까? 가족에게 보이는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는데 깔끔한 게 낫지 않을까?’

나는 또 이런 생각을 했다.

‘이대로 헤어지면 영 이별이구나. 이렇게 해서 이산 가족이 되는 거구나.’

하필 그 일이 있기 한 달여 전인 6월 말부터 KBS 이산 가족 찾기 방송이 시작되어 연일 전 국민을 울리고 있던 참이었다.

2
우리는 아직도 전쟁의 위협 속에 살고 있다. 사진은 파주 임진각, 끊어진 다리.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 그의 어머니와 형, 그리고 나,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군복으로 갈아입는 그에게, 즉 전쟁터로 떠나는 그에게 “꼭 가야 하느냐? 가지 않으면 안 되느냐?”라는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가지 않으면 탈영이니 그건 안 된다 하더라도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가라든지, 아직 휴가 날짜가 남았으니 내일 가면 안 되느냐는 말을 꺼낸 사람도 없었다. 우리 모두 침통했고 무거운 비장감이 감돌았지만 당연히 가서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는 것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내 남편은 독립 투사의 후손도 아니고 국가 유공자 혹은 군인 집안의 자손도 아니다. 그저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부모님으로부터 상식적인 가정 교육을 받았고 평범한 학교 교육과 평범한 사회 교육 속에서 살아온 청년이었다. 그런데 어떤 힘이 상병 말년의 24세 청년을 주저하지 않고 전쟁터로 가겠다고 나서게 했을까? 또 그런 그를 말리지 않고 아무런 말도 없이 보내려 했던 가족, 친구에게는 어떤 신념이 있었던 것일까? 그땐 그랬다. 내 남편뿐만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전쟁터로 달려가는 것이 이 나라 군인의, 이 나라 국민의 할 일이라고 국민 대부분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엄청난 일을 그렇게 흔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모두 교육의 힘이었다.

세월이 40년이나 흘렀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교육은 많이 변했다. 지금의 젊은이들도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기꺼이 전쟁터로 달려갈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을까? 지금 20대 중반이 되어 있을, 10여 년 전 내가 만난 청소년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내 질문에 한결같이 이렇게 답변하였다.

“외국으로 가면 되지요.”

그럼 그 다음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너 미국 시민권자냐? 혹은 다른 나라 국적 가지고 있냐?”

물론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전쟁이 시작되기 최소 며칠 전부터 병력 이동 등을 위성 촬영으로 알 수 있다, 이 정보 상황에 따라 전쟁이 터지기도 전에 공항과 항만이 가장 먼저 폐쇄된다, 섬이나 다름없는 데서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라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혹시 전쟁이 났을 때 외국에 있더라도 곧바로 비자가 취소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비자 기간이 끝나면 난민으로 살아야 한다, 그 나라에서 망명 처리 안 해주면 우리나라로 돌아와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면 그제야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래도 “목숨 바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야지요”라고 말하는 아이는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교육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40년 전에 있었던 애국적 국가관이나 나라를 위한 희생 정신 등은 지금의 교육에서 말소되어버렸을까?

3
수많은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20명의 총리와 여러 분야의 수많은 세계적 명사를 배출하였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온 영국의 명문 학교 이튼스쿨의 학생들은 “약자를 위해, 시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라는 글을 늘 마음속에 새기며 산다고 한다. 그런 교육 속에서 훌륭한 인품의 위대한 리더가 배출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길러내고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드높이고 싶다면 우선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을 길러야 한다. 그 교육의 시작은, 내가 희생하고 헌신하여서라도 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지켜내겠다는 생각을 심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지키지 못하면 국민이고 리더고 다 소용없을 것 아닌가. 우리 스스로 우리를 도우려 노력하지 않으면 이웃 나라는 물론 하늘도 우리를 돕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던 바이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