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스 에세이 3편] 소비자 주권: 미제스가 의미한 것(Robert M. Murphy)
[미제스 에세이 3편] 소비자 주권: 미제스가 의미한 것(Robert M. Mur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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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권위 있는 연구에서 유래한 현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사회의 희소한 자원들을 가지고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재화를 생산할지 결정하는 데서 소비자 선호의 최고권(最高權)을 강조한다. 미제스 자신이 이 사태를 서술하는 데 “소비자 주권(consumer sovereignty)”이라는 용어를 채용했(고 W. H. 헛(W. H. Hutt)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차후의 오스트리아학파 학자들은, 특히 머리 로스버드(Murray Rothbard)는, 그것의 전문적 부정확성뿐만 아니라 그것의 불행한 정치적 함축 때문에도, 그 용어를 경멸했다. 이 논문에서 나는 미제스의 입장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소비자 주권에 관한 미제스의 견해

자기의 전문적 저작뿐만 아니라 대중적 저작에서도, 미제스는 시장 경제에서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관계에 관한 자기의 견해를 역설했다. 부르주아 계급을 모든 다른 사람의 지배자로 간주하는 전형적인 견해와 대조적으로, 미제스는 정반대로 주장한다.

자본가, 기업가, 그리고 농부들은 경제 문제의 처리에서 도구가 된다. 그들은 키를 잡고 있고 배를 조종한다. 그러나 그들은 배의 항로를 마음대로 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최고가 아니고, 선장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조타수일 뿐이다. 선장은 소비자다. (≪관료제(Bureaucracy)≫, “이윤 관리,” p. 226)

소비자가 선장일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소비자는 냉혹한 선장이다. 미제스가 설명하기를,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진정한 상관은 소비자들이다. 그들은 사거나 사지 않음으로써 누가 자본을 사용하고 공장을 운영해야 할지 결정한다. 그들은 무엇을 생산해야 하고 얼마만큼의 양과 질로 생산해야 할지 결정한다. 그들의 태도로 기업가에게 이윤이나 손실이 발생한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고 부유한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든다. 그들은 다루기 쉬운 상관이 아니다. 그들은 변덕과 일시적 기분으로 가득 차 있어서, 가변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들은 과거의 실적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더 좋아하거나 더 값이 싼 물건이 자기들에게 제공되자마자, 그들은 옛날의 상인들을 버린다. (p. 227)

소비자 주권의 은유는 (미제스 자신과 같은) 주창자들이 시장의 작동을 매일의 국민 투표(plebiscite)에 비유할 때 그것의 극단으로 치닫는데, 여기서는 소비되는 어느 페니(penny)나 다 사회의 자원들이 돌려져야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가리키는 소비자의 표(vote)이다. 만약 소비자들의 대다수가 초록색 물방울무늬들(polka dots)을 가진 자줏빛 자동차를 싫어한다면, 사유 재산에 기반을 둔 사회는 그런 이상야릇한 자동차를 생산하는 데 자원들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고객들의 소망을 조롱하고 자기의 색다른 기호에 맞는 차량을 대량 생산하는 괴짜 생산자는 이내 파산할 것이다. 그 지점에서 어느 유형의 자동차를 만들지의 결정은 대중의 선호에 더욱 동조하는 다른 생산자들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다.

소비자로서의 생산자

비록 피상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시장 경제의 작동에 관한 이러한 해석은 독자에게 과장이라는 인상을 줄지 모른다. 생산자들이 최고의 화폐 수익을 낳는 행동 방침을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따를 것이라는 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만약 자원 소유자가 자기의 제품을 최고 입찰자에게 팔지 않는다면, 미제스는 이 생산자가 소비자 주권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여전히 말할까?

그렇다고 미제스는 말할 것이다. 그의 논거를 이해하기 위해, 특정 예에 집중해 보자. 어떤 사람이 자기 집 옆에 거대한 숲을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더 나아가서 만약 그가 수세기의 나이를 가진 초목을 제거하고 아파트 건물들을 세우기라도 한다면, 그 사람은 (건설 및 유지비용을 감안한 후에) 순 임대료 지급금으로 매년 10,000달러를 벌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자.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수백 명의 간절한 세입자들을 위해 주택들을 설립하기보다, 이런 가능한 소득을 포기하고 그 대신 자기의 숲을 미개간 상태로 유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은 생산자로서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소비자의 소망을 침해했는가?

아니 그는 침해하지 않았다고 미제스는 주장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저 자기 자신의 소비에 종사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 사람은 그 땅을 현재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 매년 10,000달러를 지불하고 있다. 소비자로서, 그 사람은 (아파트 건물 옆에서보다) 숲에서 사는 기쁨을 얻기 위하여 10,000달러 가치의 다른 재화들과 서비스들을 포기하고 있다.

그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소구획지의 땅을 고찰할 수 있는데, 이것은 수백만 마일 떨어져 있다. 이 경우, 그 사람은 그 땅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관해 아무런 개인적 선호도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이러한 자산으로부터 얻는 재정적 수익을 극대화하도록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하자. 심지어 그렇다 하더라도, 그 소유자도 역시 반드시 이 숲을 제거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획의 소유지에 인접해 사는 자연 애호가가, 그 소유자가 그 땅을 미개간 상태로 보존하는 것과 교환으로, 그 소유자에게 매년 10,000달러의 수표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전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형의 상황에서는, 그 땅의 소유자가 소비자들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을 것이고 소비자들의 “주권”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 명백하다. 이것과 우리의 원래의 시나리오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첫 번째에서는, 소유자와 숲에 인접해 살고 있는 소비자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예외로서의 독점

미제스에 따르면, 소비자의 지배에 대한 하나의 이론적 예외는 독점 가격의 경우다.

기업가의 자격으로의 기업가는 항상 소비자들의 완전한 주권의 지배를 받는다. 팔 수 있는 재화와 생산 요소의 소유자들과, 물론, 그러한 재화와 요소의 소유자들의 자격으로의 기업가들에 대해서는 다르다. 일정 조건들 아래에서 그들은 공급을 줄이고 그것을 단위당 더 높은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더 잘 지낸다. 그렇게 결정된 가격, 독점 가격은 소비자의 주권과 시장의 민주주의에 대한 침해 행위이다. (≪인간 행동(Human Action)≫, p. 358)

진행하기 전에, 우리는 한 가지를 아주 명백히 해야 한다. 미제스는 모든 독점자가―즉, 주어진 상품이나 서비스의 유일한 생산자인 모든 사람이―반드시 소비자 주권을 침해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위의 인용이 나타내듯이, 충족되어야 하는 “일정 조건들”이 있다. 특히, 독점자가 “경쟁” 수준 미만으로 산출물을 제한하여 이윤을 얻고 소비자들의 소망을 침해하는 더 높은 “독점 가격”을 부과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수요 곡선이 관련 영역에서 비탄력적(inelastic)이어야 한다.

미제스의 견해를 예로써 설명하는 쉬운 방법은 대규모 커피 농작물을 상상하는 것인데, 첫 번째 경우에는 많은 개별 소유자들을 가정하고, 두 번째 경우에는 전 농작물을 소유하는 하나의 거대한 독점자를 가정한다. 아마도 수십 혹은 수백 명의 농부들 각각이 그 농작물의 소부분을 소유할 소위 경쟁적인 경우에는, 어떤 한 농부도 커피의 시장 가격에 현저하게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어떤 개별 농부도 자기의 매상고 그 자체가 그 가격을 떨어뜨릴 것을 걱정하지 않고 시장에서 매매되는 가격에 자기의 전 농작물을 팔 수 있다. 그러므로 각 농부는 커피의 “현행(going)” 시장 가격에 자기의 전 수확물을 판매함으로써 자기 이윤을 극대화한다.

만약 우리가 집합적으로 모든 농부들에 의해 총 백만 부셸(bushelsㆍ1부셸은 약 2말)이 수확된다고 상상한다면, 백만 부셸이 소비자들에게 팔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커피의 시장 수요 곡선은 부셸당 50달러의 가격에 백만 부셸이 수요되도록 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이것은 커피에 대해 경쟁적으로 결정되는 시장 가격이 될 것이다.

이제 다른 시나리오를 고찰해 보자. 커피 농작물이 수십 혹은 수백 생산자들 사이에 나누어지기보다, 한 개인이 백만 부셸의 전 공급량을 소유한다고 상상해 보자. 만약 커피의 수요 곡선이 그 양에서 비탄력적이라면, 이것은 가격의 주어진 퍼센트 증가가 커피 수요량의 더 작은 퍼센트 감소에 대응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독점자는 백만 부셸 모두를 팔기로 결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공급량의 일부를 보류함으로써 돈을 더 많이 벌 것이다. 예를 들면, 아마도 그 독점자는 부셸당 75달러에 80만 부셸의 커피를 판매함으로써 자기 수입을 극대화할 것이다. 이 경우, 그 독점자는 자기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나머지 20만 부셸을 팔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그것들을 태워 없앨지도 모른다. (이것은 경쟁적인 경우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아무도 시장 가격에 눈에 띌 정도로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으므로, 커피를 태워 없애는 것은 어떤 개별 소유자에 대해서도 이윤을 감소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석에 동의하건 않건, 미제스가 어떤 의미에서 독점 가격의 경우가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일반적인 이익 조화에 대한 예외라고 생각했는지 명백할 것이다. 우리의 커피 예에서, 만약 생산자가 단지 소비자들의 “수임자(mandatory)”로서만 행동하고 있다면, 그는 20만 부셸의 커피를 파괴함(destroying)으로써 참으로 임무를 잘못 수행하고 있다.

이 절을 끝맺기 전에, 나는 독점 가격의 해로운 효과에 관한 자기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미제스가 이러한 시장 경제의 결점이라고 주장되는 것에 대해 확실히 정부 “해결책”을 보증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미제스는 독점 가격이, 비록 자기에게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라도, 경험적으로는 드물다는 것과 진정으로 소비자를 괴롭히는 정부 시행(government enforced) 독점들과 카르텔들에 비교할 때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사유 재산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생산되는 재화들의 구성을 결정하는 데서 소비자의 역할을 자주 강조했다. 부르주아 계급을 사실상의 과두 정치 집정자들(oligarchs)로 보는 대중적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미제스는, 정치적 비유라는 면에서 볼 때, 소비자들을 선거가 매일 열리는 거대한 민주 국가의 국민들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공식적으로 생산 수단을 “관리하고 있는(in charge)” 사람들은 단지 일시적인 관리인들(custodians)일 뿐이고, 만약 그들이 진정한 주인들인 소비자들의 소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들의 직위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

저자) Robert P. Murphy (Mises Institute 선임연구위원) 

역자) 황수연 (前 경성대 교수)

원문) https://mises.org/library/consumer-sovereignty-what-mises-meant
▶자유와 시장경제에 관한 더 많은 글을 「미제스와이어」(www.mises.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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