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 '시민의식' 이해는 우리 근현대사의 해묵은 숙제를 푸는 단서
근대 이후 '미개하다'는 뜻은 도시생활의 규칙을 체화하지 못했다는 의미
'시민'은 지배자인 동시에 피지배자, '시민의식'이란 '주인의식'의 또다른 표현
중국 비롯한 동아시아 문명에선 개인주의 기반한 '계약 문화' 생겨날 수 없어
개인이 없으면 진정한 법치도 인권도, 그리고 대등한 계약관계도 성립 불가
한국의 근대화, 이런 중국의 영향으로부터의 처절한 투쟁이었다
21세기 한국은 중국 문명의 DNA 확산을 저지하는 투쟁의 최전선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광주광역시에도 꽤 많은 눈이 내렸다. 최근 오픈한 국민의힘 서구갑 정당선거사무소에 나와 빗자루를 들고 길거리 눈을 쓸었다. 단독주택에서 살아본 것이 오래 전 일이라 이렇게 직접 눈을 쓸어본 기억이 어슴푸레하다.

문득 ‘성숙한 시민의식’이라는 표현이 기억 밑바닥에서 소환되어 떠올랐다. 이 표현을 어디서 들었더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유신시절이나 1980~90년대 권위주의 정권 시절 공중파 방송 등에서 아나운서나 방송인 등이 훈계조로 시민들에게 강조했던 표현 같다.

저런 표현을 들으면서 자신이 성숙한 시민으로서 길거리 청소 등 이른바 착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공감했던 국민들이 얼마나 됐을까? 저런 표현이 자주 쓰였다는 건 역설적으로 우리나라에 저런 시민의식이 희귀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길거리 청소 같은 사소한 사례를 들었지만 사실 시민의식이라는 용어는 생각보다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다. 시민과 시민의식의 이해는 우리 근현대사의 해묵은 숙제를 푸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시민’은 요즘 주로 도시 거주민(citizen)의 의미로 쓰이지만, 원래는 부르주아지(Bourgeoisie) 즉 자본가 계급이라는 의미였다. 이 두 용어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활동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자본가는 본질적으로 도시 거주민이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중세의 관용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자유를 위해 도시로 탈출한 농노들은 1년하고도 딱 하루를 도시에서 버텨내면 자유민의 신분을 얻을 수 있었다.

신분의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넘어 경제적으로도 경천동지할 변화를 불러오는 판도라의 상자였다. 부르주아지들이 생산의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신분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하고 노동계약을 맺을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의 등장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농노가 농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도시 거주민이 되어야 그들을 상대로 자유로운 노동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농노 제도는 농노 자신은 물론이고 그들 위에 군림한 영주들에게도 그다지 수지맞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상의 제약과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농노들에게 노동의 자발성과 창의성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요구였고 이는 당연히 생산성의 정체 및 하락을 초래했다.

영주들 역시 농노들과 영구적인 예속 관계를 맺는 게 그다지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영주들도 일 잘하는 농부와 계약을 맺고, 그렇지 않은 농부와의 관계는 정리하는 게 더 이익이다. 하지만, 농노제도라는 관습에는 그런 선택권이 존재할 수 없었다.

도시에 자리잡는 데 성공한 농노들은 상업에 종사하거나, 가내 수공업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되거나 아니면 새로 등장하는 부르주아지들과 노동계약을 맺고 노동자의 신분이 되었다. 그 중 일부는 부르주아지로의 신분 상승을 이루기도 했다.

이 모든 변화의 대전제가 자유이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고, 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역이 된다. 나아가 사회경제적으로 자유가 확산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변화를 초래한다.

우선 생산의 주역이 된 자본가들의 정치적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정치적 요구의 핵심은 사회적 신분의 예속을 근본적으로 철폐하고 기업과 시장, 거래, 계약의 자유 보장이었다. 이런 자유를 가장 제대로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의회 민주주의였고, 그 정신을 한마디로 압축한 표현이 미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요구였다.

부르주아지의 요구에 의해 확대된 정치적 자유는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의 전반적인 권리 향상으로 이어졌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시대적 요구를 선도적으로 파악하여 반영한 이념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적 변화가 집약적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도시이고, 그런 변화의 주역이 부르주아지 계급이었다. 그래서 시민이라는 용어에는 그 변화의 주역인 부르주아지의 정체성과 함께 그 변화의 공간인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citizen)이라는 개념이 중첩돼 있다.

그렇다면, 이런 도시 거주민들의 도덕성을 상징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은 어떤 내용이어야 할까?

제일 먼저 꼽아야 할 것이 주인의식이다. 시민이 등장하기 전 전근대 사회에서는 극소수 지배계급과 절대다수 피지배 계급만이 존재했다. 이런 사회에서는 진정한 주인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대다수 민중은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존재로서 정치적 동원의 대상이거나 구경꾼의 위치에 머물 뿐이다.

시민이란 도시 거주민의 다수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도시의 주인이고 도시의 번영과 몰락, 생활 수준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지배자이자 그 주권의 결의에 복종하는 피지배자이다. ‘성숙한 시민의식’이란 바로 이런 주인의식의 다른 표현이다.

근대화 이후 도시 생활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별은 존재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충만한 주인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도시 생활의 변방에 위치한 사람들도 주인의식을 불가피하게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시장 기능의 결과이다. 도시 생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건 시장의 일원이 된다. 시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가치 평가이다. 그 가치 평가의 대상에는 상품과 서비스뿐만이 아니라 그 도시의 일원인 평범한 시민들도 빠짐없이 포함된다.

어떤 사람은 신뢰가 있고 어떤 사람은 믿을 수 없는지, 어떤 사람의 노동에 얼마 정도의 가치를 매길 것인지가 시장의 평가에 의해 냉정하게, 가장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요즘은 그런 평가를 흔히 평판(reputation)이라고 부른다. 도시민들은 이런 평판을 의식해 자신이 원하건 원치 않건 주인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도시 생활이 눈에 보이지 않게 강제하는 주인의식이 자발적인 질서의 형성과 정착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개하다’는 표현의 진짜 의미는 누군가가 도시 생활의 규칙을 체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주인의식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이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단어처럼 오해되는 개념도 드물 것 같다. 원래 이 개념은 자신이 이 도시, 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그만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이고 그만한 값을 제대로 치른다는 얘기이다. 즉, 공짜는 없다는 원칙의 구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돈 많고 권력 많은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공짜로 기부하는 것을 강요하는 논리로 사용된다. 결과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 내용은 정반대다. 서양에서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공짜는 없다’는 정신의 표현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공짜를 강요하는 것이 선(善)’이라는 왜곡된 논리로 변형됐기 때문이다.

공짜 심리와 가장 거리가 먼 가치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명예이다. 공짜를 기대하는 심리는 본질적으로 거지나 강도의 마인드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비열하고 불법적인 수단으로 얻어내려는 심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찾아보기 힘든 가치가 바로 명예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명예’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사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명예는 ‘명성’이라는 단어를 분칠한 것에 불과하다. 명예훼손죄가 그렇고, 명예교수니 뭐니 하는 타이틀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한국사람들은 명예라는 단어에서 아무 실감도 못 느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단어의 진짜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짜를 선(善)으로 여기는 심리에는 명예라는 개념이 들어갈 바늘구멍만한 틈도 없다. 원래 한반도에서 명예는 희귀한 가치였지만 좌파의 가치관이 이 나라를 잠식해가면서 그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그 단적인 표현이 ‘사람 사는 세상’ 또는 ‘사람이 먼저’라는 슬로건이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가치나 행위를 평가하지 말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공평하게 나눠먹는 대동세상을 만들자는 얘기이다.

그 결과가 거지와 강도가 귀족이 되는 세상이다. 깡패 노조들의 행패나 떼법의 횡행이 그런 현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원래 귀족의 모럴이다. 그 연원은 근대 이후 시민계급이 아니라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야 한다. 그것은 지중해 문명 특유의 전통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와 로마 등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었던 국가들은 중무장 보병을 중심으로 병력을 운용했다. 자기 돈으로 무장할 수 있는 자영농이 그 주축이었다. 노예나 무산계급에게는 아예 병역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병역이 명예가 되고, 장교단이 귀족으로 구성되는 서양의 전통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등에서 영국과 미국의 명문가 자제들, 명문학교 학생들이 대거 희생된 것이 이런 전통의 표현이다.

중국 등 동아시아 문명에서는 이런 전통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는 지정학적 조건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황하 치수를 위해 고대부터 거대한 인력을 동원하고 조직해야 했고, 이는 문명의 초기부터 중앙집권적이고 전체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DNA가 황하문명에 내재하게 된 원인이 됐다.

이런 DNA에서는 개인주의와 거기 기반한 계약 문화라는 게 생겨날 수 없다. 모든 개인이 집단 속에 매몰되기 때문에 개인의 책임이란 게 드러날 수 없고, 이는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황폐화시킨다. 계약 문화가 없기 때문에 그 연장인 법치가 자리잡을 수 없다. 중국 사회는 지금도 이런 특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법치는 그 출발부터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이 대등한 관계 속에서 상호 규율하는 계약의 연장이 아니라, 지배자가 피지배계급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이었다. 특정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소유권을 확실하게 하고 다른 집단이 거기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는 개념에 가깝다.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이다.

‘법의 지배’가 없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나 인권이란 개념 자체가 생겨날 수 없다. 애초에 중국 문명에서는 대등한 계약관계라는 게 성립할 수 없다. 지배하거나 지배 당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중국이 21세기 국제질서에서는 성립 불가능한 대국(大國) 의식에 젖어 걸핏하면 ‘소국이 대국에 대들면 안된다’는 등 망발을 거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중국인 개인들조차 집단주의에 젖어있기 때문에 자신은 큰 나라 사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작은 나라 사람들이라는 식의 개념이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다.

중국이 송나라 때 산업혁명을 연상시키는 경제 발전을 이룩했으면서도 그 성과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던 것도 본질적으로 중국문명에 내재하는 이런 한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는 개인이 없다. 그러니 인권도 없고, 자발성과 창의성이 보호받고 이를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연결할 수 없다.

한국에는 이런 중국의 영향이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한국의 근대화는 이런 중국의 영향에서 탈피하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이 에너지가 건국과 산업화라는 세계사적 성공을 이끌어냈다. 그 완성이 민주화라고 말할 수 있지만, 좌파 세력은 민주화를 친북 종중 좌경의 가치로 왜곡시켰다.

21세기 현대문명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집단주의적, 전체주의적 중국 문명의 DNA가 첨단 기술을 이용, 인류가 유사 이래 쌓아왔던 문명의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도전이다. 이 도전을 격퇴하지 못하면 인류문명은 유지될 수 없고 인간은 인간이 아닌 동물적 존재로 추락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이를 저지하는 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는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 지정학적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이 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한민족의 역사는 지워진다.

호남의 심장 광주광역시의 눈 오는 아침에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소식을 들으며 이런 상념에 빠져들게 된다.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국민의힘 광주광역시 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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