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 들려온 ‘한수원의 이집트 원전 수주 유력’ 낭보에 한국 원자력업계가 들썩이고 있다. 원전 수출에서 조 단위가 넘는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2008년 UAE 바라카 원전 이후 처음이기 때문이다.

지난 2일 한수원은 이집트 엘다바 원전의 2차 건설사업 부문 계약 체결을 위한 단독 협상 대상자가 됐다고 밝혔다. 오는 2월까지 가격 등 세부 조건 협상을 마무리한 뒤, 4월 말께 정식 계약이 체결될 전망이다. 현재 실제 계약이 체결된 상황은 아니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사업 수주가 유력하다. 이집트 엘다바 원전 사업에 참여하면, 탈원전으로 고사 직전인 업계의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된다.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가운데)이 지난해 3월 16일(현지시간) 이집트를 방문해  이집트 엘다바 원전사업 참여를 위한 협력합의서를 체결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가운데)이 지난해 3월 16일(현지시간) 이집트를 방문해 이집트 엘다바 원전사업 참여를 위한 협력합의서를 체결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러시아가 손 내민 한국 원자력업계의 실력, K택소노미가 발목 잡아

이집트 엘다바 원전은 2017년 러시아 JSC ASE사가 이집트 원자력청(NPPA)이 전체 사업권을 따냈다. 1200㎿급 러시아 원전인 VVER-1200 노형 4개를 짓는 데 총 300억 달러(약 35조원)가 들어간다. 이 중 한수원이 단독 협상에 들어간 것은 터빈 건물 등 2차 계통 사업으로, 전체 사업의 5~10% 정도다. 비밀유지 때문에 한수원은 계약금액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최소 조 단위 규모의 계약으로 추산된다.

더욱이 이번 사업 참여는 한국의 원전 수출 경쟁국인 러시아가 먼저 요청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한국이 UAE 바라카에 원전을 건설하면서, 사막 원전 건설 경험이 있다는 점을 높게 샀다는 후문이다. 이집트 엘다바 원전도 사막에 건설해야 한다는 점에서, 러시아가 자국 업체 대신 한수원을 파트너로 정하고 협상을 진행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업을 시작으로 앞으로 러시아의 다른 해외 원전 수출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원자력 수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K택소노미(녹색분류체계)에 원전을 포함하는 방안이 재검토돼야 한다는 지적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 원전을 수입하는 당사국들은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로젝트 파이낸싱 방식으로 하게 마련인데, K택소노미에 원전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수출입은행이 자금을 지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기 정부, 해외 원전수주 차질 가능성 감안해 K택소노미 개정할 듯

전문가들은 대선 뒤 차기 정부가 공식 출범하는 내년 5월 이후 K택소노미가 개정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실제로 환경부에서는 “유럽연합(EU)에서 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한다는 최종 결정을 내리면, 정부도 논의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환경부는 지난해말 K택소노미를 발표하면서 “1년간 시범 운영한 후 개정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대선 결과에 따라 개정 시점이 더 빨라질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이런 관측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해외 원전 수주 사업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통상 원전 수출을 진행할 때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자본을 유치해야 한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을 수출할 때도 UAE에서 70%, 국내에서 30%의 자금을 각각 조달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수원의 관계자는 “원전의 해외 수출을 추진하고 있지만, 각종 혜택이 많은 택소노미에서 원자력발전이 빠진 상황이라 어려움이 많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원자력업계에서는 EU택소노미 초안에 원전이 포함된 것을 두고 ‘프랑스가 체코·폴란드와 함께 원전에 대한 세제 혜택 및 저금리 차관 확보에 성공했다’는 의미로 분석하고 있다. 원전 수출국인 프랑스 입장에서는 프로젝트 파이낸싱이 쉬워짐으로 인해, 수출 가능성이 훨씬 커지기 때문이다.

K택소노미의 원전 배제, 소형모듈원전(SMR) 수출에 타격 불가피

반면 K택소노미에 원전이 빠진 상황에서는, 원전 수출 가능성이 그만큼 떨어진다. 수출입은행이 K택소노미에 없는 항목을 지원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원자력업계에서는 “정부가 탄소중립 때문에 석탄 분야의 해외 투자를 막은 것처럼, K택소노미로 원자력 분야에 대한 투자도 막게 되는 것”이라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정부가 국내에는 원전을 짓지 말라고 하면서 해외 수출은 지원한다고 했는데, “K택소노미로 막아놓으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불평이 터져 나온다.

특히 K택소노미는 대규모 원자력발전소 건설보다는 연구용 원자로 수출이나 SMR(소형모듈원전) 수출에 타격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100조원 규모의 원자력발전소 건설에는 국내 수출입은행의 지원만으로는 어렵고 해외 은행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K택소노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이번 이집트 엘디바 원전의 경우만 해도 이집트가 러시아로부터 공사대금을 차관으로 제공받아서 우리 원전업계에 지불하기 때문에 K택소노미와는 무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자력업계에서는 100조원 규모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자금은 K택소노미와는 별 관련이 없지만, 그보다 소규모의 원전 수출에는 K택소노미가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집트 엘다바 원전 조감도.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집트 엘다바 원전 조감도.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정범진 경희대 교수, “원전 포함한 EU택소노미는 실용적, 원전 뺀 K택소노미는 이념적”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6일 펜앤드마이크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해 “(원자력발전) 수출은 하겠다면서 내 집안에서는 홀대당하고 있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2009년 요르단에 ‘연구용 원자로’를 수출할 때 수출입은행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런 연구용 원자로 수출과 SMR 수출을 위해서는, 반드시 K택소노미에 원전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 교수는 EU가 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시킨 이유를 되짚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EU는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값비싼 재생에너지만으로는 달성이 어렵다는 판단하에 원전을 EU택소노미에 포함시킨 것”이라고 짚었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으로 원자력발전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이념적인 입장에서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태양광이나 풍력만으로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문제다”고 분석했다.

EU택소노미에 원전이 포함된 점은 우리 원전업계의 수출에 긍정적인 신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탈원전 이념’에만 매몰된 K택소노미는 원전 수출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지적이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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