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무능한 좌파 586 정권의 갈라치기로 인해 세대, 남녀, 지역으로 이미 충분히 찢긴 대한민국이 더 이상 찢겨지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은 투명성 확보를 국가의 목전 과제로 만들고 있다.

이호선 국민대학교 교수
이호선 국민대학교 교수

대통령 선거는 국민 스스로 주권자임을 확인하고, 우리 공동체의 지나온 날을 반성하며, 그 토대 위에서 미래를 계획하고, 누가 그것을 더 진실하게 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선택할 수 있는 축복의 기회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움이 지속되도록 하는 정치적 자유의 방패이자, 자유민주주의 헌법이 보장하는 귀한 선물이다. 물론 선거 얼마 지나지 않아 잘못 찍은 자신의 손을 잘라 버리고 싶다는 유권자들도 많지만, 일단 5년 단위로 심판이 이뤄질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것 자체로 아직 우리는 숨 쉴 구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22년 3월 9일의 선거는 우리가 정치적 자유의 숨을 들이마시고, 그나마 남아있는 경제적 여유를 갖고 치르는 마지막 대통령 선거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으로 인해 축제의 장이 아닌 필사적인 몸부림의 장이 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대선을 통해 ‘도끼로 이마까’에 뒤이은 ‘깐데또까’세력의 시즌2 집권을 막고, 응급지혈이라도 해서 시간을 벌어야 할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런 점에서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을 뽑는 선거라도, 최악을 피할 수 있다면 그 대선(大選)은 일단 성공이다.

그러나 최악을 향한 여정에 급제동을 건다는 것만으로 대선에 만족할 수는 없다. 그 과정에 새로운 방향과 비전이 보여야 한다. 상식적인 국민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미래 담론이 제시되고, 그나마 말 바꾸기는 하지 않을 것 같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깃발을 들고 나갈 때 대선은 대선(大善)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권심판, 정권교체를 이야기하는 제1야당 대선후보에게서조차 아직까지 명확한 미래의 큰 그림이 보이지 않고 있다. ‘반문(反文)결집’ 정도가 미래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공정과 상식이 국가 비전이나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의 기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여야 후보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들을 공통적으로 꺼내 들고 있고, 무엇보다 메시지 보다 메신저를 먼저 보고 시비와 선악을 판정하는 대한민국의 가치 혼돈 속에서는 공정과 상식도 각자의 문법에 따라 편한 대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거의 절반으로 갈라져 한 쪽에서 찬사를 받으면, 한 쪽에서 조롱받는 깃발로는 국민을 통합할 수도, 미래로 이끌 수도 없다.

이제는 좌와 우, 보수와 진보에 속해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열린 마음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표적 담론을 찾아내야 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와 투명성 확보라는 두 가지 핵심 가치를 전제로 한다. 가치중립적일 수도 있지만, 모든 가치 판단의 토대가 되는 그 중심에 ‘투명성’이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국가청렴도 순위가 국제적으로 30위권 밖에 머물러 있을 정도로 투명성의 척도에서 보면 여전히 후진적이다. 투명성은 비단 부패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개인적 삶의 전 영역, 국가 차원의 경쟁력이 투명성에 달려 있다.

대장동 게이트, LH 투기 등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좀 먹고, 사회의 불신을 자아내는 바탕에는 어두컴컴한 그들만의 리그가 자리 잡고 있다. 2030 청년 세대의 불만의 밑바탕에는 근본적인 ‘불안’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예측가능하지 않은 사회, 나의 의지ㆍ노력ㆍ 능력과 상관없이 내게 한계를 지우고, 그 이유조차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차별과 거부를 강요당해야 하는 사회적 장벽에 대한 절망감에서 나온다.

지난 7월 27일 지방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였다가 다른 응시생들보다 필기 점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면접에서 탈락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부산의 한 특성화 고교 3학년생의 안타까운 사연은 이 시대의 불투명성이 가져온 좌절의 대표적 사례이다. 그가 남겼다는 “면접 이상해 엄마”라는 말은 캄캄한 사회적 분위기에 홀로 던져진 존재의 애처로운 부르짖음이다. 내 힘으로 이룬 필기시험 결과가 무용지물이 되고, 단 10분간의 면접이라는 사정으로 탈락하는 상황,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 가슴이 막히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기성 세대는 이런 슬픈 비명이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치적 수사로 오염된 공정, 법치로는 실질적인 개인의 삶의 행복을 증진할 수 없다.

투명이 보장되지 않는 공정이란 있을 수 없고, 불투명한 곳에 상식이 통할리 없다. 투명성이 확보되면 그것이 공정한지 여부는 국민이 판단할 것이다. 공정을 가장한 블라인드 채용이 실은 한 쪽 눈을 뜨고 내 편을 뽑고, 키워주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의구심은 이제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고 있다. 청년들을 좌절케 하는 입시와 채용의 각종 불공정성은 불투명의 토양에서 자란다. 이제는 이것을 걷어내야 한다. 정권교체, 대통령 선거는 이런 불합리함을 쓸어내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정책은 이것을 구체화하는데 집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투명성 확보는 대한민국의 사회적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국부는 어디에서 오는가〉(Where is the wealth of nation?)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 나라의 부는 물질자본이 아니라 사회적 자본에서 나온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OECD 국가들의 경우 국부의 80%를 신뢰에 기반을 둔 사회적 자본으로 만들어 내지만, 후진국들의 경우 사회적 자본의 비중은 60% 미만이라고 한다. 자발적 참여, 남의 성공을 인정하고, 나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는 ‘승복의 기제’로 투명성만큼 탁월한 설득 도구는 없다.

이 투명성이 국가 규제의 일관성, 예측 가능성으로 옮겨가면 국가 경쟁력의 수단이 된다. 우리 경제의 수많은 규제들을 철폐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그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규제의 일관성이다. 경제 활력을 죽이고, 산업 생태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규제의 숫자 못지 않게 규제의 불투명성에 있다. 기업가 정신을 죽이고,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주범은 불확실성이다. 기관마다,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지고, 상황에 따라 이리 저리 춤을 추는 규제의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는 특효약은 투명성이다.

무엇보다 무능한 좌파 586 정권의 갈라치기로 인해 세대, 남녀, 지역으로 이미 충분히 찢긴 대한민국이 더 이상 찢겨지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은 투명성 확보를 국가의 목전 과제로 만들고 있다. 내년 대선에서는 무능·자해·기생·수탈 정권의 종식과 함께 불신과 맹목적 갈등도 종식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영을 불문하고 쉽게 합의할 수 있는 게임 규칙이 있어야 한다. 대권 주자라면 2022년 3월 10일 새로운 정권 하의 대한민국 구성원들 사이에서 고르게 통용ㆍ적용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게임 규칙부터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규칙 제1조의 자리에는 투명성이 들어와야 한다.

이호선 객원 칼럼니스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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