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객원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칼럼니스트

대한민국에 대한민국이 없다. 정부에도 정치에도 그리고 대선판에도 대한민국은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괴이쩍다. 설상가상으로 국제사회와 동맹국 미국에서도 대한민국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다. 12월 10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안보회의에서 발표하기 위해 출국하던 날에도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괴이쩍은 현상들이 필자의 뇌리를 짖누르고 있었다. 임기가 반년도 남지 않은 정부가 핵무장 북한과의 종전선언에 올인하는 모습에 실망하고 대선판에서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대 이슈들이 실종되고 있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미국이 코로나 음성 판정 시한을 탑승전 72시간에서 48시간으로 그리고 또 다시 24시간으로 단축함에 따라 혼란이 가중되었다. 워싱턴에서 보낸 4박 5일 동안도 그랬다. 재미 좌성향 한인단체들과 재미 정부자문 기구들이 미 정치권을 대상으로 종전선언 로비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과 일부 한국 기업들이 가세하고 있다는 침울한 소식을 접해야 했다. 그것이 지난 5월 미 하원에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촉구하는 ‘한반도평회법안(H.R.3446)’이 발의된 배경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중에 미국이 종전선언에 합의할 리가 없다는 미 전문가들의 분석이 위안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치에 대한민국이 없다

‘대한민국 실종’을 알리는 ‘괴이쩍은 현상들’은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분단 70여 년이 지나면서 남북 간 경제력 격차가 50배에 이르고 있음에도 북 체제를 두둔하는 사람들이 정부와 사회의 요로들을 차지하고 있는 괴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그런 나라의 정치에서 대한민국이 실종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념적·정치적·지역적으로 쪼개진 나라에서 선거가 정책대결이 아닌 ‘내전(內戰)’처럼 되어 가고 있는 판에 그리고 보스를 잘 만나면 막대기를 꼽아도 당선되는 텃밭에서 능력이나 소신과는 무관하게 다선(多選)을 하고 중진이 되어 대통령 후보가 되는 정치풍토에서 ‘구국(救國)’에 불타는 능력자들이 부상하기란 무척 어렵다. 언론인과 법조인 그리고 정치인 간의 구분이 희미해진 것도 이런 괴현상을 부추기는 한 요소다. 한국에서는 국회의원의 절대 다수가 언론인과 법조인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공정성을 기해야 하는 언론인이나 공직자가 인연이 닿으면 곧장 국회의원이 되는 나라에서 균형잡힌 보도나 ‘법과 양심에 따른’ 법집행이나 공무집행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요로를 차지한 좌파들이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찍어내듯 사회주의적 법과 제도들을 양산하는데도 체제수호에 명운을 거는 정체세력이 없는 것도 괴현상이다. 이권 카르텔이나 권력 카르텔과 유사한 정치세력들은 있어도 선진강국 건설에 골몰하는 우국 집단은 제도권에서 퇴출된지 오래다. 좌파이념으로 똘돌 뭉친 세력과 정치권력 쟁취와 유지가 목표인 무이념 인사들이 제도권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중에 정통 우파세력은 존재하지 않으니 대한민국 정치에 ‘대한민국’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목소리가 간간이 들리지만 그들의 외침은 코로나 방역과 젊은이들의 무관심 그리고 진영논리에 함몰된 언론인들의 외면 속에 묻힌지 오래며, 그들은 여전히 조직도 세력도 없는 ‘불쌍한 집토끼들’로 머물고 있다. 무시해도 그만이고 배신해도 그만인 ‘동네북’이다.

이런 정치문화 속에서 벌어지는 대선판에 ‘대한민국’이 있을 리가 없다. 지금은 미래 비전과 안보·경제·기술·문화·교육 강국 재건을 위한 청사진들을 펼쳐 보이면서 또는 불공정 시정, 국민통합, 정치개혁 등을 위한 구체적이고 진실성이 담긴 복안들을 제시하면서 국민의 심판을 요구하는 지도자들이 정치판을 채워야 할 때이다. 그것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지금 대선판은 그와는 반대로 자기 정치를 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그런 사람들에 둘러싸인 후보들은 감성 자극용 네거티브 공세와 입에 발린 공약들을 양산하면서 인기영합성 쇼맨쉽을 연출하느라 눈코 뜰 사이가 없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뻔한 거짓말 약속도 서슴치 않는다. 그들이 쏟아내는 말과 행동에 깊이와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고 나라 장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종전선언을 둘러싼 괴이쩍은 현상들

통상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의 일부이지만, 당장 평화협정이 어려우면 종전선언을 먼저 할 수도 있다. 즉,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의 서문에 해당한다. 하지만, 기회가 오면 상대방을 때려눕히겠다는 흑심(黑心)을 품은 일방이 있거나 힘의 균형을 통한 상호억제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종전선언·평화협정은 반드시 깨지게 되어 있다. 그 경우 거짓 평화에 젖어 방심한 국가는 비참한 패망을 맞이하거나 대학살을 면치 못했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래서 평화협정이나 종전선언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아름다움보다는 이면에 존재하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주체통일의 목표를 그대로 고수한 채 핵무장에 여념이 없는 북한은 완벽하게 이런 조건을 갖춘 나라다.

지금 한반도에서는 이런 종전선언과 관련하여 괴이쩍은 현상들이 목도되고 있다. 우선, 한국 정부가 종전선언을 하지 못해 안달이다. 대통령이 세 번씩이나 유엔연설을 통해 국제사회의 협력을 호소하는 가운데 고위 공직자들이 정치권력을 위한 ‘영혼없는 심부름꾼’이 되어 종전선언 외교로 동분서주한다. 나라를 안전과 성공으로 이끌 책무를 진 정부가 나라를 해롭게 할 수 있는 평화이벤트에 연연하는 것도 괴이쩍은 현상이지만, 국민이 그런 정부를 택한 것도 괴이쩍은 일이다. 종전선언·평화협정은 한반도로부터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기를 원하는 평양정권의 숙원사업인데도 북한이 오히려 “말을 잘 들으면 서명에 응해줄 수도 있다”는 식으로 갑(甲)질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괴이쩍다. 이 나라의 대북 정책이 어떠했기에 이 모양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만난 워싱턴의 전문가들이 일말의 위안을 주었다. 한국 정부가 강하게 종용하니 동맹국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미국이 종전선언 협의에 임하고 있을 뿐이라는 분석이었다. 종전선언 관련 ‘한미 간 이견’ 또는 ‘합의 불발’ 등의 용어가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동맹관리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공직자들이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일뿐 동맹과 주한미군 그리고 유엔사의 지위에 아무런 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강변하지만, 종전선언이 한국내 좌파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동맹 해체, 미군 철수, 유엔사 해체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분출하게 만들어 동맹과 한반도 안정을 해칠 수 있음을 미국 정부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종전선언 문구 최종 협의중’이라는 일부 한국언론의 보도나 공직자들의 코멘트는 한 마디로 웃기는 얘기라는 취지였다. 필자는 이 분석이 사실이기를 바라면서 애써 위안을 삼았지만, 이런 중차대한 문제들이 대선경쟁에서 주요 화두가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는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다시 미국을 생각한다

지금의 미국은 과거의 미국이 아니며 한미동맹도 예전과 같지 않다. 동맹이완의 발단은 미국 국민을 실망시킨 한국 정부의 ‘친북·친중·탈미·반일’ 기조였지만, 미국발 원인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변화는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면서 동맹 경시를 고수한 트럼프 대통령 이후부터 급물살을 탔지만, 바이든 행정부도 변화의 물결을 거슬릴 생각은 없는 듯하다. 과거 미국은 전작권 조기 분리와 같이 동맹을 훼손하거나 한국의 안보를 해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만류하는 입장을 취했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걸핏하면 미군철수를 거론했고 한국의 지방선거 바로 전날인 2019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북한과 평화쇼를 연출하는 무신경(?)을 과시했다. 지금 바이든 대통령은 핵문제 관련 최고위 국가전략서인 핵태세검토서(NPR)에 미국이 동맹국들에게 제공하는 핵우산과 확대억제를 약화·무력화시킬 수 있는 ‘핵 선제불사용(NFU)’ 조항과 미 본토 방어용이 아니면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단일 목적(sole purpose)’ 조항을 삽입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과거에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북한과의 종전선언’ 문제를 한미 간 아젠다로 수용하고 있다.

이제 미국은 ‘America First’를 넘어 ‘America Only’로 가는 것일까?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맹주인 미국에서 좌파 한인들이 이토록 설칠 수 있게 된 것일까? 지금까지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 하에서 번영을 누리는데 결정적인 토양이 되었던 한미동맹도 흔들릴 것인가?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후손만대에 부강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지금 대한민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의 대선 후보들도 이런 ‘대한민국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까? 필자는 귀국행 비행기를 타면서도 뒤숭숭해진 머릿속을 정리할 수 없었다. 이 혼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전 통일연구원장·전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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