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잘 웃던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나는 웃기도 잘 하고 웃기기도 잘 한다. 술 마시는 자리는 물론이고 심각한 회의나 심지어 장례식장에서도 나는 참 잘 웃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입을 닫고 있었다. 나이 먹고 침통해져서가 아니다. 표현과 단어 선택 때문에 머뭇거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웃음은 타이밍이다. 대화 사이와 끝에 재빨리 치고 들어가야 그게 웃음으로 연결된다. 웃기는 기능이 그나마 작동하던 몇 년 전 술자리였다. 겨울이었는데 얼마 전 어머니를 잃은 친구 하나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다. “우리 엄마 춥겠다.” 바로 물고 들어갔다. “병신, 땅속이 더 따듯해.” 친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네. 하하, 술 먹자.” 분위기도 밝아졌다. 그래봐야 몸 상하는 강도만 높아진 거지만. 이때 포인트가 있다. 병신이라는 단어를 철저히 영혼 없이 담담한 톤으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 웃음의 질이 높아진다. 그런데 이제 그런 거 못한다. 병신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개그를 짜도 병신이라는 단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까봐 망설이다보면 웃길 타이밍이 지나간다. 병신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 그 즉시로 장애인 비하가 같이 떠오르면서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꼭 몸이 불편해야 병신인가. 마음이 병든 병심病心도 병신이고 ‘찐따’ 같은 평균 미달의 행동도 병신이다. 전부 웃음의 소재다. 그들은 모두 구제받게 되었다. 장애인 비하가 사람 여럿 살렸다.

남의 비극을 바라보면서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안도하는 게 비극의 기능이라면 남이 나보다 못한 것을 보면서 웃는 게 희극의 기능이다. 예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키 작은 남자, 뚱뚱한 여자를 코미디 소재로 삼았다. “키가 그게 다야?”, “쫙 퍼진 게 안정감은 있네.” 이런 대사 이제 꿈도 못 꾼다. 비하, 혐오에 해당하는 발언이나 행동 했다가는 그 즉시 매장이다. 연예인 000 비하 발언 사과했다, 이런 기사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다. 제일 위험한 건 여성 비하 발언이다. 가수 누구는 콘서트에서 “내가 공연을 할 때 힘을 받을 수 있게 앞자리에 앉아계신 여자 분들은 다리를 벌려 달라.” 발언했다가 골로 갈 뻔 했다. 또 다른 가수 누구는 라디오 방송에서 트로트 곡 ‘사이다 같은 여자’를 소개하며 “여자는 회와 같다”면서 “일단 신선해야 하고 쳐야한다” 했다가 사과만 한 달을 했다. 여성 비하 발언은 아예 독창적인 브랜드도 가지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이다. 프로이트가 살아 돌아와도 못 알아들을 이 어려운 단어가 사회 전 영역을 지배하는 중이다. ‘인턴기자’라는 코미디를 보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중인데 혹시 여성 차별, 비하 같은 몰매 맞고 중도 하차할까봐. “왜 하필 여성이냐.”, “사회 초년생 여성 단체 비하다.” 할까봐. 다행히 아직까지 그 지경은 아닌 모양이다. 코미디는 아슬아슬해야 재미있다. 경계에서 줄을 타야 맛이다 남녀 간 연애에서 밀당이 중요한 것도 그 긴장감 때문이다(어쩌면 얼마 안가 이 ‘남녀 간’도 성차별로 지적당할지 모르겠다. 연애가 꼭 남녀 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표현해서 동성애자 인권을 침해했다고). 아슬아슬, 경계, 긴장감에 관대하지 못하고 인색해지는 순간 사회는 도덕적으로 변한다. 명확하게 A이거나 B여야지 A와 B에 살짝 겹쳐있으면 안 된다. 사회가 도덕적으로 변해서 나쁠 게 뭐 있냐고? 도덕은 개인의 영역이다. 도덕을 사회에서 관여하는 순간 강제와 규범이 된다. 내가, 우리가 도덕적으로 바뀌어야지 사회가 도덕적으로 변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글이 짧다. 제목이 전부라서 그렇다. 원래는 좀 길었다. 지우고 잘라내고 고치고 한 끝에 이렇게 되었다. 밋밋하고 병신 같은 글이 되었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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