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직업공무원 제도는 대한민국의 귀중한 자산이다. 5·16 이후 박정희 정부가 정착시켰다. 6·25 전란을 겪으면서 한미관계가 매우 긴밀해졌고, 군 장교들이 미국의 제도와 기술을 가장 먼저 배웠다. 한국 사회에서 군 조직이 가장 엘리트 집단이 되었다. 인사관리, 조직관리, 행정기계화도 가장 앞섰다. 타자기로 문서를 작성하는 것도 군에서 먼저 시작하였다.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던 1961년은 건국 후 13년 되던 해다. 그 당시 직업공무원 제도는 걸음마 단계였다. 평생직업으로서의 공직자는 매우 드물었다. 철도기관사가 20년 근속하면 일간 신문 머리기사로 종종 보도되었다. 극히 일부의 고시 출신자들이 공무원으로 임용되었지만, 엽관주의(spoil system)가 일반적이었다. 유력인사의 자제나 친척이 촉탁(囑託)이라는 이름으로 임시로 일하다가 몇 달 지나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소위 빽(back)으로 공무원이 되는 사회였다.

박정희 정부가 그러한 엽관주의를 없앴다. 공개채용시험을 통해 공무원을 충원하는 것이다. 직업공무원제도의 정착이다. 그것이 제도화되어 이제 한국 관료는 원칙적으로 시험을 거쳐 충원되고, 평생직업을 원칙으로 한다. 20년 근무 후 연금을 타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30년, 40년 근속도 보통인 사회가 되었다.

공무원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신분이 보장된다. 그래서 무사안일, 보신주의에 빠지기 쉬워 철밥통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심역할을 하였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주도했던 사무라이(武士)들이 일본 근대 관료의 시작으로써 근대화를 이끈 것과 같다.

한국의 직업공무원들은 빈곤에서 벗어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한정된 예산으로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 집단이었다. 한국이 연간 10퍼센트의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에 세계언론은 한국의 경제 엘리트들을 극찬하였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국가건설을 위해 우선순위를 정해서 추진하고, 혹시라도 시행착오가 있으면 바로 수정하는 유연성을 발휘하였다. 고도성장 이후 매너리즘에 빠져 1997년 IMF 금융위기와 같은 사태를 사전에 대응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기는 했다. 그러나 직업공무원 제도가 정착되면서 한국 사회의 기둥 역할을 맡아왔고, 이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한 직업공무원(늘공)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임명하는 공무원(어공, 어쩌다 공무원)이 있다. 미국에서는 신임 대통령이 차관보급 이상 6천 명을 새로 임명하는데 국회의 인준을 얻는데도 1년 이상 걸린다. 어느 국가나 그러한 정치적 임명직의 필요가 있다. 한국도 군사정권 당시 장군 출신을 국영기업이나 해외공관장으로 많이 임명하였다. 수십만 명 부하를 거느리던 지휘관 경험과 넓은 시야가 조직 운영이나 외교활동에 새바람을 넣는 역할도 하였다.

요즈음 좌파 정권에서 정치적으로 임명하는 어공들의 역할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문제가 많다. 이념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중책을 맡아 일어나는 부작용이다. 청년 시절 반정부 운동에 몰입해서 뛰어다니느라 머리가 빈 경우가 많다. 마치 문화혁명 당시의 홍위병과 비슷하다. 복잡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할 지식이나 능력이 부족하다. 대표적 실패 사례가 ‘소득주도성장’이다. 얼치기 지식으로 내건 정책이 성공할 리 없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공약도 성과는 전혀 없고 노노갈등만 부추겼다. 무상복지확산을 위한 재원 조달을 위해 과도한 국가빚을 다음 세대에 넘기고 있다.

더욱더 심각한 문제는 국가관이 없거나 반국가적인 인사들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데 있다. 김정은 정권을 옹호하기까지 한다. 탈북민이나 북한주민의 인권은 무시한다. 한마디로 이념 대결로 사회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빠졌다. 체제 안에서 과잉이냐 부족이냐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체제 자체를 깨뜨리려는 자해행위가 일어난다. 잘못하면 건국 이후 70년 동안 이루어온 한강의 기적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대통령이나 여당 말을 믿기 어렵다. 그러면 누구를 믿어야 하나? 누가 국가의 기본을 지켜낼 것인가?

일반 국민이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저항권을 행사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코로나 방역을 핑계로 광장에서의 집단적인 의사표시의 기회도 잃고 있다. 정당은 정치적 의사 형성과 실현조직으로서 매우 중요하나, 유사 독재의 덫에 걸려 제대로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데 역부족이다. 국가 제4부 역할을 하는 언론도 매우 중요한 세력이다. 그러나 정부의 실책이나 국가의 위험을 지적하고 고발할 수는 있어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결국, 싫든 좋든 국가의 틀을 유지하는 기간 세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즉 직업공무원(늘공)이다. 대표적인 예가 판검사와 같이 특수한 직업공무원이다. 사법시험이나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훈련받은 전문성으로 사회질서를 수호해왔다. 그들이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면, 아무리 정치권의 횡포가 심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과 법치주의의 원칙을 지킬 수 있다. 10월 28일 헌법재판소가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임성근 전 부장판사의 탄핵소추에 대해 5대3 의견으로 내린 각하결정도 판검사의 사회질서 유지기능의 한 면을 보여준다. 판검사가 흔들리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를 지켜낼 수 있다.

비단 판검사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모든 직업공무원이 국가이익과 국민의 안녕 복지를 위해 일하는 봉사자다. 이념 대립으로 맹목적 지지의 팬덤(fandom)문화가 휩쓸고 있는 이 사회에서 국가건설과 발전의 중심역할을 했던 직업공무원이 국가의 기본을 지켜낼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정치세력이 불법 부당한 지시나 요구를 한다고 하더라도, 직업공무원이 각자의 자리에서 법과 규범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국가의 붕괴나 자살을 막을 수 있다. 적극적으로 악에 맞서지 못한다면, 소극적인 사보타지를 통해서라도 막아야 한다. 대장동 사건과 같이 조직폭력배까지 연계되고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관련되는 부정부패 행위에 대해 관련 직업공무원은 호루라기를 불어야 한다. 무조건 순종해서는 안 된다. 부패집단의 패악질을 방조하면 사회 자체가 좌초한다. 범죄자를 도와서는 안 된다. 적극적으로 동조하거나 부역한다면 자신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신재민 사무관과 같은 공익제보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악덕 정치인의 불법 부당한 행위를 막을 수 있다.

늘공 직업공무원들은 나라를 근대화하고 세계 10위권 국가로 만드는 데 중심역할을 했다는 자긍심을 살려야 한다. 정치 권력이 사회를 혼돈으로 빠뜨리고 김정은과의 야합으로 국가 안위를 위태롭게 한다면 이에 분연히 맞서야 한다. 각자가 책임 의식을 새롭게 하여 나라의 수문장 역할을 해야 한다.

공무원선서가 그 역할을 잘 요약했다. “나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으로서 헌법과 법령을 준수하고, 국가를 수호하며,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한다.”

김석우 객원칼럼니스트(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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