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적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의 조화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여러 해 전 작가 이문열 씨와 만났을 때, 그가 좌파로부터 박해 받은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느닷없이 좌파 사람들이 이문열 씨의 책들을 태우겠다고 책을 실은 상여를 메고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의 기세에 눌려, 누구도 나서서 막지 못했습니다.

그때 마을 이장이 혼자 상여를 가로막고 선언했습니다, “상여는 사람 사는 마을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오. 그래서 상엿집을 마을 밖에 짓는 것이오.” 그 한마디에 기세등등하던 억지 상여 행렬이 돌아섰답니다.

이문열 씨의 얘기를 듣자, 그 당당한 이장의 모습에 중국 천안문 학살 때 전차 행렬을 혼자 가로막은 청년의 모습이 겹쳤습니다. 자신의 도덕적 판단에 따라 혼자서 다수에 맞서는 개인의 모습은 늘 우리 마음을 휘젓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익명성 뒤에 숨은 물리적. 언어적 폭력에 맞서는 것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용기임을 일깨워줍니다.

지금 ‘드루킹 댓글 사건’이라 불리는 추문이 나라를 뒤흔듭니다. 익명성 뒤에 숨은 언어적 폭력이 얼마나 해롭고 무서운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이어 이문열 씨는 부산에서 그를 우파 반동 작가라고 격렬하게 비난한 사람들을 만난 일을 얘기했습니다. 포장마차에서 그들과 얘기를 했는데, 얘기가 자꾸 헛돌더랍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문열 씨가 물었답니다, 자신의 무슨 책들을 읽었는가.

놀랍게도, 열 가까이 되는 사람들 가운데 이문열 씨의 책을 단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답니다. 모두 ‘이문열이가 우파 작가니 나쁘다’는 얘기만 듣고 덩달아 욕하고 책을 태워야 한다고 난리를 친 것이었습니다.

다른 작가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문열 씨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가입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엔 문인들이 ‘예술적 현실참여’에 가장 적극적이어서 위상이 높았고 문학 시장도 컸습니다. 이문열 씨처럼 인기 높은 작가들은 몇백만 부씩 파는 일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런 작가의 책도 한 권 안 읽은 사람들이 그를 가장 격렬하게 비난했다는 사실은 사람의 천성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들을 들려줍니다. 그 뒤로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비난하는 사람들로 속이 상한 후배 문인을 만나면, 이문열 씨의 경험을 들려주고 함께 웃습니다. “이문열이도 그런데, 우리 같은 군소 작가들이야…”

논란이 많기로는 진화론을 따를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진화론이 종교적 신념과 부딪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터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진화론과 종교적 신념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진화론적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의 조화

찬찬히 들여다 보면, 현대 사회들은 진화론을 근본적 ‘문법’으로 삼아 움직인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의료도 따라서 발전하고 평균 수명도 길어진다. 의료는 본질적으로 생물학에 바탕을 두고, 생물학은 진화론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진화론이라는 문법에 어긋나는 일들은 궁극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문법을 어기면, 비문이 나오듯.

우리가 일상적으로 입에 올리는 ‘DNA’라는 말이 그 점을 일깨워준다. 유전자가 존재해야 생명 현상이 설명된다고 확신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유전자의 모습을 추론하고 찾아나선 것이 바로 진화 생물학자들이었다. 그리고 20세기 중엽에 유전자가 단백질이 아니라 DNA라는 것을 밝혀낸 것도 진화 생물학자들이었다.

사정이 그러하지만, 진화론을 의식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진화적 세계관이 종교적 신념과 부딪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이 서로 다른 사정을 살피는 것이 긴요하다.

모든 생명체들은 나름의 세계관을 지녔다. 환경에 적응해야 생존할 수 있으므로, 생명체마다 환경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모두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았으므로, 그런 세계관은 나름으로 합리적이다.

박테리아의 세계는 자기 둘레의 작은 공간이므로, 당연히 그들의 세계관은 원초적이다. 지능을 갖춘 동물들은 엄청나게 크고 정교한 세계관을 지녔다. 특히 사람의 세계관은 경이적으로 방대하고 정교하고 유기적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사람들의 세계관은 종교에 바탕을 두었다.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고 모든 현상들을 그런 존재의 작용으로 설명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세계관을 따른다.

그러다가 고대 문명에서 원초적 과학이 싹 텄다. 몇 백만 년에 이르는 인류 역사에 비기면, 몇 천 년에 지나지 않는 고대 문명 이후의 시기는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다. 그 짧은 기간에 과학적 세계관이 조금씩 자라서 마침내 근대에 과학이 폭발적으로 번창했다. 자연히, 종교는 위축되고 종교적 세계관은 과학적 세계관으로 많이 대치되었다.

과학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검증(verification)이다. 이 세상에 관한 이론들은 모두 실재의 어떤 부분에 대한 모형(model)들이다. 그런 모형들이 맞느냐 틀리느냐 확인하는 과정에서 과학은 검증을 택한다. 검증으로 확인되면, 그 모형은 과학 체계의 한 부분이 된다. 검증으로 틀렸음이 드러나면, 아무리 그럴 듯한 모형도 폐기된다.

이처럼 과학은 검증이 가능한 이론들만을 다룬다. 검증이 불가능한 이론들은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는 얘기다. 형이상학이 그르다거나 쓸모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형이상학은 과학과 다른 범주의 지식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검증가능성(verifiability)은 과학의 경계를 이룬다.

종교적 이론들은 본질적으로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종교적 경험에 바탕을 둔 개인적 믿음들이다. 특히 전지전능한 신에 관한 명제들은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는 다른 차원의 지식 체계들이다. 서로 만나는 부분이 아주 작다.

이제는 종교에서도 이런 관점을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 종교철학자 존 히크(John H. Hick)는 신은 ‘강제되지 않은 신앙의 반응(an uncompelled response of faith)’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므로, ‘과학은 종교적 주장을 확인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종교 철학(Philosophy of Religion), 1963]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를 지녔고 종교적 세계관을 따른다. 물론 다양한 종교들은 서로 옳다고 주장하고 흔히 다투고 그런 다툼이 지금 가장 큰 재앙들을 불러오지만, 모든 종교들은 종교적 신앙을 세계관으로 삼는다는 점에선 동질적이다. 자연히, 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을 조화시키는 일은 중요하다.

이 어려운 일에 많은 과학자들이 성공했는데, 그들은 과학이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의 웅장하면서도 오묘한 뜻을 드러내는 길이라고 믿었다.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서양 중세의 세계관을 흔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뉴턴과 찰스 다윈은 평생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현대 진화론의 정립에 선구적 역할을 한 도브잔스키는 동방정교 신자로 인격적 신(personal god)을 믿었다.

종교와 과학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뉴턴은 특히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물질의 변질(transmutation)을 시도하는 연금술을 진정한 학문으로 여겼다. 그래서 적잖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 비금속을 귀금속으로 만드는 연구에 진력했다. 그의 사후에 물리학이 급속히 발전해서 물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이론이 정설이 되었다. 그래서 뉴턴이 연금술을 믿은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약간의 경멸을 보였다.

1901년 영국 화학자 프레데릭 소디(Frederick Soddy)는 방사성 토륨이 라듐으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 환희에 차서, 그는 함께 연구하던 어네스트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에게 외쳤다, “러더포드, 이것은 변질이다.”

러더포드는 차분히 대꾸했다, “제발 그것을 변질이라 부르지 말게. 사람들은 우리가 연금술사들이라면서 우리 목을 딸 걸세.”

원자가 붕괴된다는 것이 입증되자, 연금술이 아주 그른 이론이 아님이 드러났다. 이어 핵융합이 태양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것이 발견되고 핵융합 기술이 실제로 개발되자, 물질의 성격에 관한 이론들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생명은 핵융합으로 새로운 물질들이 탄생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 덕분에 존재한다.

이 일화는 과학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특정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검증에 바탕을 둔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과학자의 올바른 태도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지식도 그르다고 판명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과학자의 충성심은 특정 이론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과학과 과학자를 겸허하게 만든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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