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칼럼] 예술의 정치화, 정치의 예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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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4.21 11:36:42
  • 최종수정 2018.04.22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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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과 이산하의 시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서울대 불어불문학 전공.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

파시즘은 정치를 예술화 했고, 공산주의는 예술을 정치화 했다고 벤야민은 말했다. 정치 행위를 예술인 것인 양 하든, 예술가의 작품이 실제로 정치적인 것이든 그 어느 쪽도 결국은 전체주의다.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실험이 모두 실패로 끝나 사회주의적 환상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21세기 오늘 날,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아직 예술의 정치화와 정치의 예술화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

왜 한국의 화가, 문인 등 예술가들은 모두 좌파냐고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한다. 물론 기존의 관습에 저항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의 본령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주의와 직접 연결되어 혁명의 도구가 된 것은 아무래도 1917년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부터이다.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사실주의 미학은 이미 19세기 프랑스에서 등장한 문예 사조이지만, 레닌은 거기에 계급투쟁 이론을 가미하여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만들었다.

레닌의 반(反) 모더니즘

20세기 초의 서구세계는 모든 예술이 모더니즘이라는 다소 막연한 이름으로 불리던 시기였다. 미술에서는 입체파, 표현주의, 미래파, 순수추상 등이 제 각기 꽃을 피웠고, 건축에서는 장식을 배제한 기능주의가 지배적 트렌드였으며, 음악에서는 음조를 포기한 무조(無調) 음악이 나왔고, 문학에서는 전통과 단절된 각종 실험들이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이 모두가 모더니즘의 기치 아래 공존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에서는 혁명 직후 잠시 동안은 혁명적 정치와 급진적 예술 형태가 평화롭게 공존하였다. 구성주의(constructivism)가 번성했고, 아방가르드도 가끔 찬양되었다. 그러나 곧 이런 양식들은 배척되었다. 모든 생산 수단과 제품들이 공동체에 속했고, 예술 생산의 수단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예술도 강력한 프로파간다 도구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혁명가들은 인상파나 입체파 같은 모던 양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프롤레타리아라 하더라도 문화에 관한 한 자본가, 지주, 관료 사회에서 축적된 인류의 지적 자산을 논리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게 레닌의 생각이었다.

우선 비 재현적 예술은 러시아의 오랜 전통인 사실주의와 상충될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와 전혀 맞지 않는 예술 양식이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만을 미술로 알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있어서 인상주의나 추상화 같은 모더니즘은 이해할 수도, 호감을 가질 수도 없는 예술이었다. 볼셰비키가 사실주의를 혁명 예술 양식으로 채택한 것은 근본적으로 모던 양식과 노동계급의 부적합성 때문이었다.

혁명 정부는 곧 예술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초기 소비에트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냈던 극작가이며 비평가 아나톨리 루나카르스키(Anatoly Lunacharsky, 1875~1933)의 지침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는 인체의 미학을 강조하면서, 예술이 인간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면 건강한 몸, 지성적인 얼굴, 친절한 미소를 묘사해야 한다고 했다. 건강한 몸과 웃는 얼굴이 본질적으로 생명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처럼 완벽한 인간을 묘사함으로써 예술은 시민들을 완벽한 소비에트 인간으로 교육시킬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작이었다. 혁명 초기부터 공산체제가 붕괴한 1991년까지 소련의 공식 예술 양식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32년 스탈린이 주재한 고위 정치가들의 회동에서였다. 다음 해인 1933년 소설가 막심 고리키(Maxim Gorky, 1868~1936)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고, 그 이후 이 용어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비록 혁명 전의 소설이기는 하지만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1907)는 흔히 최초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소설로 여겨진다. 미하일 숄로호프(Mikhail Sholokhov)의 『고요한 돈강』 2부작(1934)도 이 계열의 주요 소설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명확하게 정의된 것은 1934년 소비에트 당 대회에서였다. 당 최고인민위원들은 예술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창작 지침을 내렸다. 첫째, 예술은 우선 프롤레타리아적이어야 한다. 작품의 소재는 노동자와 관련이 있어야 하고, 노동자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둘째, 예술은 인민의 일상생활 모습을 그려야 하는데, 그 일상생활은 전형적인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 기법은 사실적인 재현이어야 한다. 추상이나 환상 또는 모더니즘 같은 것은 절대로 안 된다. 넷째, 예술은 당파적(partisan)이어야 한다. 즉 국가와 당의 목적을 지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참고로, 당파적이라는 뜻의 파르티잔은 바로 우리의 6.25 체험 속에 깊이 각인된 빨치산의 어원이다. 빨치산은 산 속의 게릴라가 아니라 당에 충성을 바치는 당파성 강한 유격대원이라는 의미이다.

물자가 부족한 사회주의 경제의 가짜 모습을 그린 동독의 1951년 크리스마스 포스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이다.

결국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목표는 창조적 표현을 통해 소련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당은 최고로 중요한 것이고, 따라서 언제나 가장 우호적으로 묘사되어야 했다. 회화 작품들은 바쁜 공장과 농업 현장을 보여주었고, 조각 작품들은 노동자, 보초병, 초등학생들을 묘사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흔히 쓰인 이미지들은 꽃, 햇빛, 인체, 젊음, 비상(飛翔), 공장, 그리고 신기술이었다. 이런 시적 이미지들을 통해 예술은 미학적 즐거움을 뛰어넘어, 매우 특별한 기능에 봉사했다.

거기에는 압도적인 낙관주의가 있었다. 현재는 건강과 행복으로 가득 찼고, 미래도 아주 행복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비극과 부정성의 묘사는 다른 시대 다른 장소의 것에만 허용되었다. 공산주의를 초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든 제외되어야 했으므로, 예술가는 자기가 보는 그대로의 삶을 묘사할 수 없었다. 예술이란 사회에 봉사할 때만 유용하다고 했던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 Plekhanov, 1856~1918)의 말처럼 예술은 사회적 의미를 가진 사건, 감정, 행동들을 전달하고 환기시키고 묘사하는 한에 있어서만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창의성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배척되었다. 이 시기에 선호된 예술 창작 스타일은 가장 이상적인 현실을 가장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화가들은 행복감에 젖은 근육질의 집단 농장 농부들이나 공장 노동자들을 묘사했다. 당연히 그 모두가 사실적 기법으로 그려졌다. 스탈린 시대에는 수많은 영웅적 초상화들이 그려져 독재자에 대한 개인숭배를 부추겼다. 어린아이들에 둘러싸여 자애롭게 웃고 있는 김일성의 초상화도 그런 계열이다. 뜬금없이 문재인 대통령이 아이들을 안고 파안대소하는 어떤 어린이 책 표지는 김일성 초상화와 구도가 너무 비슷해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요컨대 예술은 인민의 교육과 정책 홍보의 도구였다. 당의 성공을 두드러지게 보여줌으로써 예술가들은 소비에트 제도가 최선의 정치 제도라는 것을 홍보함과 동시에, 소비에트 시민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보여주었다. 예술의 목표는 레닌이 ‘새로운 소비에트 인간(New Soviet Man)’이라고 불렀던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 내는 것이었다. 혁명가들이 선호했던 장르는 미술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포스터와 벽화가 대중 교육의 가장 적합한 도구였다. 멕시코시티에 있는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대형 벽화들은 바로 이 시기 전 세계 좌익 화가들이 종주국 소련의 양식을 얼마나 충실하게 답습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서구에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물론 자유주의체제인 서구에서도 30년대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세였다. 초현실주의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흔히 기괴한 행동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자동기술(自動記述, automatism)이라는 고유의 창작 기법을 갖고 있었다. 자동기술이란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발적 상상력을 전개시켜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손이 기계적으로 받아쓰는 방식이다. 또 일관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일관된 것을 만들어 낸다든가, 명백히 비논리적이어서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지극히 필연적인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 등이 모두 초현실주의의 창작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혁명이었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1897~1982)은 『현실 세계』(Le Monde réel, 1934) 연작에서 노동 계급을 프랑스의 떠오르는 세력으로 묘사했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위하여』(Pour un réalisme socialiste, 1935), 『공산주의적 인간』(L'Homme communist, 1946) 등의 사회평론도 썼다.

당시 유럽의 건축가들도 대부분 친 사회주의적이었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가 정착되기 훨씬 전에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Less is more)라거나,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The God is in the detail)라는 짤막한 경구로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표현했던 독일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는 살해당한 스파르타쿠스단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를 기리는 기념비를 설계했다. 현재 우리의 주거 형태인 콘크리트 아파트를 처음으로 설계한 프랑스의 르코르뷔지에(1887~1965)도 소련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는 건축가였다.

이때는 미국 유럽 할 것 없이 서방 세계가 모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30년대 대공황 시기였다. 따라서 서방 건축가들에게 있어서 소련은 이데올로기적으로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명백히 서구보다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20세기의 역사』에서 넌지시 확인하고 지나간 이 말은 예술의 정치화가 이념의 문제만이 아니라 돈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좌파가 문화적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것 역시 그 진영에 돈이 풍성하게 몰려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예비평에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은 그 어느 것보다 강력했다.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던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 1885~1971)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미학에 접목시켜 서구의 문예비평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편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문학이론에 끼친 그의 영향은 막강했고, 특히 70~80년대의 한국에서는 절대적이었다. 대표작 『역사와 계급의식』(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1919)에서 그는 소외, 물화(物化), 계급의식 등의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미학 이론을 정립했다. 특히 그는 개인주의를 비판하여, 예컨대 실존주의 같은, 주체의 개인성을 강조하는 철학을 부르주아 철학으로 낙인찍으며 비판했다.

2차 대전 후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좌파 지식인의 아이콘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사르트르가 60년대에 실존주의를 마르크시즘과 접목시킨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쓴 것도 강력한 동시대 주류 사조에서 소외되었다는 평생의 열등감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라고 우리는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여하튼 사르트르의 인기가 꺾이는 것과 동시에 60년대부터 서구의 마르크시즘은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서구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사회주의 체제는 예술 표현을 질식시키고 문화의 진보를 늦춘 전체주의 사회에 불과했으며, 그 사회의 공식 예술이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이라기보다는 그냥 단순한 프로파간다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국은 아직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대

유독 한국 사회에서는 모든 장르를 통해 아직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냉전 시대 소련이나 동구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자신의 체제를 이상화하여 실제 이상으로 현실을 아름답게 그리는 포지티브한 예술이었다면, 안정적 사회주의 체제를 확보하지 못한 한국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끊임없이 자유주의 보수 진영의 어두운 면을 강조해 보여주는 네거티브한 예술 형식이다. 이성을 가진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온갖 세월호 음모론의 서사라든가, 여성 대통령을 소재로 그린 음탕하고 잔인한 그림들, 또는 70년 전 제주 4.3 사건에 대한 노래와 시 등이 그것이다.

지난 4월 3일 ‘4.3 추념식’에서 이효리가 읽은 두 편의 시 가운데 하나를 쓴 시인 이산하(본명 이상백)의 시집 『한라산』은 가장 최근의 전형적 사례이다. 1987년 <녹두서평> 창간호에 실린 후 국가보안법으로 시인이 구속되기도 하였으나, 시집은 꾸준히 발행되다가 2000년대 초 자연스럽게 절판되었는데, 문재인 정부의 4.3 사건 재조명에 힘입어 이 달 초 복간되었다. 시인은 1987년 국가보안법으로 형을 선고 받은 후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 전문을 항소이유서로 제출했었다. 한국에서 유통기한이 가장 긴 반공 이데올로기의 심리적 마지노선에 작은 흠집을 내기 위해서였다고 시인은 복간된 시집의 후기에 썼다.

책의 복간을 기획한 좌파 진영은 이 시인의 국가보안법 적용도 재심을 청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재심 청구에 참여할 심재환 변호사는 “촛불혁명을 거친 현재 시점에서 당연히 무죄를 받아야한다. 법원도 유죄를 내리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단순히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는 것만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사죄도 받고 보상도 받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북콘서트에 참여한 좌파 작가들은 한 술 더 떠 “한라산을 미국의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영역해 미국의 평화애호세력에게 읽혀, 종국에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침공 이후 한반도에 온갖 고통과 폭력을 저질러온 미국으로부터 총체적인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도대체 어떤 시(詩)길래?

시집 『한라산』의 저본은 당시 조총련 오사카지부 서열 3위였던 골수 공산주의자 김봉현의 『제주도 피의 투쟁사』이다. 일본어로 쓰여진, 공산당 격문을 방불케 하는 문서였다. 처음에는 번역서를 내려했으나, 출판사와 저자는 곧 이 기록물을 장시(長詩)로 전환할 것을 기획했다. 시로 전환하면 공산주의자의 저작이라는 지뢰도 피할 수 있고, 또 서사시의 대중 파급력과 감동의 크기가 기록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딱딱한 기록물을 찾아 읽는 독자는 별로 없지만, 시는 손쉽게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는 독자들의 ‘가슴 속에 눈도 내리게 하고 비도 내리게 하고 바람도 불게 하고 때로는 불도 확 질러 대중을 뒤흔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 선동을 목적으로 쓴 격정적인 문체여서 시적인 코드로 전환하기도 쉬웠다고 한다. 결국 한 공산주의자의 당파적 선동이 잔인한 시구를 앞세워 순진한 독자들을 민족해방과 반미(反美)의 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함정이다. 예술은 팩트일 필요가 없다. 팩트가 아니면서도 독자들에게 미치는 힘은 엄청나게 크고 광범위하다. 팩트가 아니라는 이유로 법이 개입하면, 창작의 자유에 대한 국가 권력의 침해라고 대중 권력을 선동하면 된다. 예술이 정치와 결합하면 책임은 없으면서 가공할 힘을 가진 괴물이 된다. 우파가 모든 기업과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전혀 경제적 생산을 하지 않는 좌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현상은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산하의 시

문재인 대통령이 4.3 희생자 추념사에서 고마움을 표시한 이산하의 시는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시는 우선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산하 구석구석에서/ 민족해방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해 가신 전사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서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발가벗겨/ 나무와 바위에 묶어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모두 대검으로 젖가슴을 하나씩 천천히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버린 그날/

복부가 대검에 찔려 창자가 삐져나온 사람/ 음부에 긴 쇠꼬챙이가 꽂혀 있는 사람/

서귀포 임시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패너로 혓바닥까지 뽑아 버리던 그 날, 바로 그 날/ 관덕정 인민광장 앞에는 사지가 갈가리 찢어져/ 목이 잘린 얼굴은 얼굴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전봇대에 전시되어 있었다’고 당시의 현장을 묘사한 후

‘한 손에 빵과 또 다른 한 손엔 해방군의 탈을 쓰고/ 발톱까지 무장한 채 당당하게 상륙한 그들은 마침내/ 순결한 조선의 하늘과 푸른 산하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 놓았다/ 그리고 다시 40여년의 기나긴 세월이 흘렀건만/ 총독부가 대사관으로 바뀌었을 뿐, 창살 없는 감옥, 식민지 산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어 왔던 수많은 날들/ 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 누가 잊을 것인가 누가 잊으라고 하는가’라며, 한국이 아직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한다.

‘멀쩡한 땅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늙은 허수아비를 조종하더니/ 수백만의 양민들을 빨갱이로 만들어 무차별 살상하더니/ 평양 상공을 날며 움직이는 것들은 모조리 총질을 해대더니/ 대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네이팜탄으로 불태워버리더니/ 나치 같은 홀로코스트로 북녘을 병영국가로 만들더니/ 마침내 성조기의 51 번 째 별을 그리듯 휴전선을 그어/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남한을 반공인질로 잡아/ 우리가 간신히 다시 일어나 간절히 다시 꽃 피울 때마다/ 가차 없이 민주주의의 동맥을 끊어온 너희 양키들은 들어라.’고 미국을 규정한 후

‘미제의 각을 뜨다/ 적의 가슴팍에 불을 지르다/ 끝내 다 뜨지 못한 채/ 끝내 다 지르지 못한 채/ 한 줌 피 묻은 뼛가루로 날아간’ 희생자들의 시신 위에 ‘깃발을 덮어다오/ 인공의 깃발을/ 그 밑에 죽기를 맹세한 깃발.’이라고 말함으로써 4.3 희생자들의 조국이 인공(人共)의 북한임을 분명히 밝힌다.

‘친일매국노의 대를 이은 친미매국노들을 죽창에 꽂아/ 친일자본가의 대를 이은 친미자본가들을 횃불에 태워/ 그들에게 돌려주자./ 그리고 꽃 피는 광주코뮌의 수천 명을 학살한/ 저 피 묻은 5월의 원수들을 찢어서/ 갈가리 찢어서/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에게 돌려주자.

‘돌려주자/ 오늘도 노란 유채꽃이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는/ 아! 피의 섬 제주도 그 4.3이여,

우리의 심장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이 진달래꽃을/ 그 누가 꺾을 수 있으랴/ 돌려주자/ 기름진 지주와 자본가의 살을 죽창에 꽂아/ 그들에게 돌려주자/ 공장의 프레스에 싹둑싹둑 잘려 나간 노동자들의 손가락을/ 포크레인에 찍힌 철거민의 팔과 다리를/ 얼어붙은 배추포기 같은 삶을 살다 농약 속으로 사라져 간/ 농민들의 그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그리고/ 푸르른 5월의 금남로를 승냥이처럼 할퀴고 간/ 저 피 묻은 손을/ 찢어, 갈가리, 찢어서,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에게 돌려주자’고 4.3과 5.18을 한데 묶어 섬뜩한 저주를 퍼붓는다.

결국

‘그 아름다운 제주도의 신혼 여행지들은 모두/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이다./ 그곳에 뜬 별들은 여전히 눈부시고/ 그곳에 핀 유채꽃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별들과 꽃들은/ 모두 칼날을 물고 잠들어 있다.’

학살의 현장으로 신혼여행을 갈 사람이 있을까?

시인은 4.3의 제주도를 '가스실 없는 한국판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라고 표현하면서,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을 즐기는 그 땅이 피로 물든 학살의 현장이라고 했다. ‘제주 4·3 사건은 의로운 저항이나 봉기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일으킨 반란일 뿐이다’라는 역사적 사실은 학자들에게 맡겨 두기로 하자.

그러나 내가 제주도 사람이라면 나는 “당신들이 신혼여행을 즐기는 그 땅이 학살의 현장”이라는 말에 강력하게 항의를 할 것 같다. 아무리 나치에 분노하는 서구의 의식 있는 젊은이라도 아우슈비츠로 신혼여행을 가지는 않을 것이고, 아무리 촛불 정신에 투철한 한국의 개념 있는 젊은이라도 자기가 발 딛고 있는 땅 밑이 피에 흥건한 학살 현장이라는 말을 듣고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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