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북한 지령을 받고 활동해온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수사로, 4명 중 3명이 구속된 ‘청주 간첩단’ 사건은 문재인 정부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된 최초의 간첩 수사이다.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아 미국산 전투기인 F-35A 도입 반대 활동 등을 한 혐의이다. 이들은 2017년부터 중국·캄보디아에서 북한 대남공작기구 공작원을 접촉, ‘북한 노선에 동조하는 한국 지하조직’ 결성 지령과 함께 활동자금 2만달러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사자들은 ‘불법 사찰을 통한 조작 수사’라고 우기고 있다. 친여 성향의 매체들은 그들의 활동이 미미했음을 주장하며, 당사자들의 주장에 힘을 보태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수면 위로 처음 드러난 간첩단 사건의 수사 배경에 이목이 쏠리는 상황이다. 현 정부의 국정원과 경찰청 안보수사국이 일부러 간첩 사건을 만들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주 간첩단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노동특보단으로 활동한 인물들이다.

내년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문재인 특보단 출신 간첩단 검거를 공개?

정부가 안게 될 상당한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 법적 단죄에 나선 상황 자체가 사안의 심각성을 반증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 9단으로 불리우는 박지원 원장의 국정원이 굳이 내년 대선을 앞둔 이 시점에 간첩단을 검거한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는 실정이다.

국민의힘 소속 국회 정보위원인 김기현·이철규·하태경·조태용 의원은 지난 11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북한의 국내 정치개입은 명백한 남북합의 위반이며, 향후 북한의 대선개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국회 정보위를 즉각 소집해서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하태경(오른쪽), 이철규 의원이 지난 11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더불어민주당에 북한의 국내 정치개입 진상규명을 위한 정보위원회 소집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하태경(오른쪽), 이철규 의원이 지난 11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더불어민주당에 북한의 국내 정치개입 진상규명을 위한 정보위원회 소집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시급하게 정보위를 소집하자는 국민의힘의 요구를 민주당은 거부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 정보위 간사인 김병기 의원은 입장문을 내고 "안보를 이용한 정치공세"라며 "간사 논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결산국회를 앞두고 오는 24일 정보위 전체회의를 열기로 되어있다"고 반박했다.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사안이어서 보고도 제한될 수밖에 없으므로, 시급히 진행할 사안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이로써 국회 정보위원회 소집은 불발됐다.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 및 경찰청 안보수사국 핵심 관계자를 통한 수사 단계별 정보 확인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국정원이 현 시점에서 간첩단 수사를 강행하고 이를 공개한 이유로 3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① 3년 후 대공수사권을 경찰청에 넘겨야 하는 국정원, 그 부당함에 대한 우회적 호소?

문재인 정부는 권력기관 개혁을 통해 2024년부터 대공수사권을 경찰청 안보수사국으로 이전한다. 범여권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있고, 대공수사권마저 경찰로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국정원이 간첩단 사건을 내세워 대공 수사의 중요성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다.

2024년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은 경찰청 안보수사국으로 이전된다. [사진=연합뉴스]
2024년부터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은 경찰청 안보수사국으로 이전된다. [사진=연합뉴스]

실제 국정원은 이 사건에 대한 첩보를 이미 오래전에 입수해 관련 정보를 취합해오다가 최근 수사에 속도를 낸 것으로 전해진다. 국회 정보위 관계자는 “경찰로 대공수사권이 이관되면 이런 수사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정보 당국 관계자 역시 “이 같은 수사는 해외 조직이 있는 국정원 아니면 하기 힘들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경찰청 안보수사국으로 대공수사권이 이전되는 것을 반대하는 국정원 내부에서 일부러 이번 간첩단 사건을 흘렸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해외 네트워킹이 없는 경찰청이 대공수사권을 넘겨받게 되면 청주 간첩단과 같은 주요 사건을 인지하고 수사하는 게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호소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② 박지원에 대한 하극상이 아니라 본격적인 레임덕의 신호탄?

박지원 국정원장 체제 하에서 ‘간첩 수사는 물건너갔다’는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게다가 지난 7월 경찰청 치안감급 인사에서 대공·보안수사 경험이 전혀 없는 전남 나주경찰서장 출신이 안보수사국장으로 임명됐다. ‘안보수사 무력화’를 염두에 둔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발생한 간첩단 사건에 대한 의아함은 증폭됐다.

이 사건은 지난 5월 27일, 28일 국정원과 경찰청 관계자 100여명이 간첩단의 사무실과 자택 등을 압수수색하면서 시작됐다. 대대적인 수사였다.

이 수사를 놓고 ‘국정원 내 하극상’ ‘명령 불복종’ 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박 원장을 비롯한 상층부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확실한 증거가 제시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 앞에서, 박지원 원장도 어쩔 수 없이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하극상보다는 일종의 레임덕이 아니겠느냐? 앞으로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레임덕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③ ‘대북송금 사건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않은 박지원의 선택?

이번 사건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사실상 처음 진행 중인 간첩 수사이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피의자들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된 이후, 지난 6월 경기도 시흥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를 찾아 취재진에게 “간첩이 있으면 간첩을 잡는 게 국정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보법 폐기가 아니라 존치,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도 밝혔다. 간첩단 수사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던 박 원장이 당시만 해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이번 수사를 의식해 발언했던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현 정부 계획에 따라 2024년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넘겨주게 될 국정원 대공수사팀이 장기간 준비한 이번 사건을 묵살했을 경우의 ‘후폭풍’을 고려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박지원 국정원장이나 국회 정보위 소속 여당 의원들도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여러 증거를 보고받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며 “현 정권에 불리하더라도 이를 감추려고 했다면 오히려 뒷감당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았겠냐”고 분석했다.

특히 박 국정원장 입장에서는 ‘대북송금 사건’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북송금 사건은 북한에 돈을 주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했다는 의혹에서 시작돼, 특검으로까지 비화한 사건이다. 당시 특검 결과, 현대아산 이사회 정몽헌 회장은 자살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박지원 전 비서실장은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실형을 살다 복권되었다.

따라서 박 국정원장 입장에서는 청주 간첩단에 대한 수사를 뭉갠 이후 초래될 결과에 대한 우려 때문에 수사를 용인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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