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징역 2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은 이재용 부회장은 문 대통령이 공언한 사면 기준에 부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면에서 배제돼왔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징역 2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은 이재용 부회장은 문 대통령이 공언한 사면 기준에 부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면에서 배제돼왔다. [사진=연합뉴스TV 캡처]

법무부가 지난 9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을 결정한 데 대해 청와대는 “따로 언급할 게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정치권 안팎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에 따른 결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전 국민의 관심사였던 이 부회장 가석방을 실무적인 기준만으로 처리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재벌 특혜’라는 논리로 가석방이나 사면을 반대해온 지지층을 의식해, 대통령의 의중과 무관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부회장은 가석방 이후, ‘취업 금지’ 조항에 걸려 삼성전자 경영에 공식 복귀하기가 어렵다. 여론의 60~70%가 이 부회장 가석방 또는 사면에 찬성한 것은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였다.

박범계 장관, 이재용 가석방은 절차의 문제임을 강조...‘취업 승인’ 가능성은 단호하게 반박

그러나 박범계 장관은 가석방된 이 부회장에 대해 ‘취업 승인’ 조치를 취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하고 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지난 9일 오후 경기 과천시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룸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 여부가 결정된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심사위)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지난 9일 오후 경기 과천시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브리핑룸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 여부가 결정된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심사위)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 장관은 10일 과천청사 출근길에 취재진들과 만나 “이재용씨만을 위한 가석방이 아니다. 가석방 요건에 맞춰 절차대로 진행한 것이고, 이재용씨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가석방에 대해 노동계와 시민단체가 제기한 “법무부가 가석방 심사 기준까지 낮춰가며 특혜를 줬다”는 비판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박 장관은 이번 결정을 두고 청와대와 사전 조율이 있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가석방은 법무부의 절차와 제도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는 말로 갈음했다. 검찰의 반대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에도 "가석방은 법무부의 정책"이라고 답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박 장관이 발표한 이 부회장 가석방 결정에 대해 "법무부 가석방 심사위에서 규정(기준)과 절차에 따라 진행한 일이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 부회장의 가석방 문제는 청와대가 언급할 사안이 아니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하지만 중요 인사의 가석방에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 법조계는 물론 정치권에도 두루 퍼져 있다. "법무부 장관이 가석방을 결정한다고 하지만, 결국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가석방은 법무장관 권한이지만 주요인사 가석방 여부는 대통령 의중이 기준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반면, 가석방은 법률상 법무장관의 권한으로 되어 있다. 법무부 차관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가석방을 심사한다. 따라서 지난 9일 법무부가 발표한 810명의 가석방 명단은 법무장관의 뜻대로 결정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주요 인사에 대해서는 법무장관이 혼자 결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와 관련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2014년 남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이 소환됐다. 한 교수는 현 정부에서 법무부 법무 검찰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문재인 정권과 가까운 인사이다. 조국 전 법무장관 딸의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 인턴 활동 증명서 발급에 관여한 의혹을 받기도 했다.

한인섭 교수는 페이스북에서 '법적으론 법무장관 권한일지 몰라도 실제로 청와대와 법무부의 협의를 거쳐 대통령의 의중대로 결정된다고 보면 틀림없다'고 적었다. [사진=한인섭 페이스북 캡처]
한인섭 교수는 페이스북에서 '법적으론 법무장관 권한일지 몰라도, 실제로 청와대와 법무부의 협의를 거쳐 대통령의 의중대로 결정된다고 보면 틀림없다'고 적었다. [사진=한인섭 페이스북 캡처]

한 교수는 지난 2014년 12월 27일 페이스북에서 기업인 가석방을 청와대 권한이 아니라고 밝힌 박근혜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법적으론 법무장관 권한일지 몰라도 실제로 청와대와 법무부의 협의를 거쳐 대통령의 의중대로 결정된다고 보면 틀림없어요. 괜히 발뺌하지 말아요’라고 적었다. 어느 코미디 대사를 빌려서 "누굴 바보로 아나?"라고까지 힐난했다.

국가경제 기여할 가능성 차단하고 풀어주는 가석방이 오히려 ‘재벌 특혜’

청와대와 박 장관의 부인에도 불구, 가석방에도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다면 왜 굳이 사면이 아니라 가석방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와 관련 정치평론가 이성수씨는 “역대 정부는 재벌 총수에 대해 가석방보다는 ‘사면’을 택해 왔다. 이 부회장에 대한 가석방은 이례적이다”고 분석했다. 사면을 해줘야 기업의 경영정상화라는 실익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재벌총수를 가석방해주면 수감을 면하게 해주는 효과 이외에는 없다. 국가경제에 기여할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재벌총수를 풀어주는 가석방이 오히려 ‘재벌 특혜’라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역대 대통령은 수감된 재벌총수에 대해 정상적 경영복귀 가능한 ‘사면’ 조치 취해

따라서 역대 대통령들은 구속 중인 재벌 총수들에 대해서 ‘가석방’이 아닌 ‘사면’ 조치를 취했다. 물론 그 정치적 책임은 대통령이 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말인 2002년 12월31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김선홍 전 기아그룹 회장,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등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7년 2월12일 외환위기 극복 10주년을 맞아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부회장,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등을 대거 사면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그해 12월31일 사면받았다.

전임 대통령이 임기 말년에 사면을 단행한 것과 달리,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첫해인 2008년 광복절에 ‘경제 살리기’를 명분으로 재벌 총수를 대거 사면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김승연 한화그룹, 최태원 회장 등이 사면·복권됐다.

2009년 12월 31일에는 이건희 회장을 ‘원포인트’ 사면했다. 재벌 총수 한 명을 위한 사면은 헌정 사상 처음이었다. 2010년 2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를 앞두고, 이 회장의 역할론과 사면론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법무부는 보도자료에서 이 회장을 ‘이건희 IOC 위원’이라고 적으며 “적극적인 유치 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광복절에 최태원 회장, 2016년 광복절에 이재현 CJ그룹 회장을 사면했다. 최 회장은 회삿돈 46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2013년 1월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이 회장은 1657억원대 횡령·배임·조세포탈 혐의로 2015년 12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문 대통령은 재임 중 재벌 총수 사면 안해...국가경제 영향보다 정치적 부담 피하는 데 우선순위 둬

하지만 전임 대통령과 달리, 문재인 대통령은 현재까지 단 한 차례도 재벌 총수에 대한 사면을 단행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내세운 ‘뇌물·알선수재·알선수뢰·배임·횡령’ 등 ‘5대 중대 부패범죄’의 사면은 배제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1월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와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징역 2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따라서 ‘중대 부패범죄자’인 이 부회장은 문 대통령이 공언한 사면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가 사면 대신 가석방이라는 우회로를 밟은 것으로 풀이된다.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이 결정했으면서도, 형식적으로는 법무부장관이 결정한 것처럼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성수 정치평론가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 사면을 단행했다면,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 요구도 거세졌을 것이다.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보다 정치적 부담을 피하는 데 우선순위를 뒀다는 분석인 것이다.

실제로 청와대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과 관련해서 선을 그은 바 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주무부처인 법무장관도 계속 말해왔듯이 현재 (사면을 진행하기에는) 물리적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며 "그리고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만큼 (더 이상의) 언급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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