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시들어도 꽃이고 걸레는 빨고 삶아도 걸레이다. 말을 번지르르하게 바꾼다고 해서 그 말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말의 본질을 바꾸려면 말하고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태도, 사회의 인식 등 보다 큰 그림을 바꿔야 한다. 아니 이런 것들이 바뀌면 말은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된다. 쓰던 말을 버리고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 그 사용을 종용하는 건 세상을 바꾸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나 자신부터, 내 가족부터 마음가짐을 고쳐먹고 자녀를 제대로 교육하려 노력하는 것이 낫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20대 중반,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내 어머니께서 내게 해 주신 말씀이 있다.

“직장 생활을 원만히 하려면 청소부, 운전기사, 수위 등 그 조직에서 궂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깍듯이 대해야 한다.”

나의 첫 직장은 4층짜리 작은 건물을 소유한 직원 30명 정도의 조직으로, 그 30명 안에 청소부 아주머니, 수위 아저씨, 기사 아저씨도 있었다. 내가 아침에 출근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내 상사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당부대로 건물의 현관문을 열면 곧바로 마주치는, 혹은 사무실로 오르는 계단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보고 늘 웃는 얼굴로 착실하게 인사했다. 내가 열심히 인사하니 그들도 나를 늘 반갑게 맞이했다. 젊은 날의 내 하루는 그들과의 기분 좋은 인사로 상쾌하게 시작되었다. “미스 황은 예의 바르고 늘 웃는 얼굴의 심성 좋은 직원이다”라는 긍정적인 평판이 그들 입으로부터 흘러나와 나의 상사에게로 전해진 것은 오히려 덤으로 얻은 결과라 할 수 있다.

내가 부장의 지위로 다니던 회사 직원 중에도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평소 한 시간 일찍 출근해 한 시간 일찍 퇴근하는 그 아주머니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때는 회식 자리밖에 없었다. 나는 회식 때마다 그 아주머니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그들을 위해 정성껏 고기를 구웠다. 그것이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껏 만나온 청소부 아주머니들을 무시하거나 하찮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내가 성실하게 하는 것처럼 그분들도 자신들이 맡은 일을 늘 열심히 하고, 그 덕분에 내가 쾌적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청소 노동자’라는 용어 사용을 권장하는 공익 광고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광고에서는 마치 ‘청소부’가 그들을 하대하는 호칭인 양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제껏 쓰레기 분리 수거도 안 하고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채 그릇을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얘기도 했다.

청소부들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청소부라는 명칭이 무슨 죄가 있어 버림받아야 하는 걸까? 그럼 이제껏 그는 ‘청소부’라는 명칭에 무시나 천시의 감정을 담아서 불렀다는 말인가? 지금이라도 태도를 바꾸려 한다면 다행이지만 성인이 되도록 분리 수거도 제대로 안 하던 사람이 청소 노동자라는 호칭을 사용한다고 갑작스럽게 청소부를 존중하는 사람이 될까 의문이 든다.

최근 들어 우리말에 인플레이션 현상이 부쩍 심해졌다. 기존에 쓰던 멀쩡한 말에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여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말을 마구 생산해낸다. 그리고는 예전의 말을 쓰면 마치 개념 없는 사람인 듯, 배려가 없는 사람인 듯 취급하는 분위기도 있다. 위의 ‘청소 노동자’ 같은 경우가 그 일례이다.

또 경우에 어긋날 정도로 지나친 용어, 마치 조선 시대 왕실의 존호(尊號)와 같은 말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흔해졌다. 멋대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고 또 멀쩡한 말을 쓰지 말자고 멋대로 종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전에 없던 말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든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말 그 자체에는 가치가 담겨 있지 않다.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말에 가치를 불어넣었을 뿐이다. 중국과 교류한 지 얼마 안 되어 조선족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왜 젊은 여종업원에게 아가씨라 부르는지 모르겠어요. 접대부라는 좋은 말 놔두고…….”

그 친구는 그때까지 한국에서 ‘접대부’라는 말이 어떤 느낌으로 쓰이고 있는지 몰랐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접대부’라는 말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그 말에 어떤 특징적인 뉘앙스를 심었을 뿐이다.

최근에 ‘명예 석좌교수’라는 호칭이 등장했다. 석좌교수는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이룬 당대의 석학을 초빙해 모시는 교수’라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이 앞에 ‘명예’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말인가? 탁월한 학문적 업적이 없는데 그냥 있는 걸로 해준다는 얘기 아닌가? 명예교수는 ‘그 대학에서 일정 기간 교수로서 근무한 사람이나 학술상 특별한 공로가 있었던 사람에게 퇴직한 뒤에 주는 칭호’라 한다. 명예교수에도 석좌교수에도 해당하지 않는 사람에게 뭔가 그럴듯한 자리를 주고 싶어 억지로 만든 호칭이라는 느낌이 확연히 든다.

사회의 약속인 언어는 연탄재처럼 쉽게 내다 버리고 멋대로 새것을 만들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약속인 언어는 연탄재처럼 쉽게 내다 버리고 멋대로 새것을 만들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이 안 되는 것 이상 심각한 문제는 이런 명칭이 한번 만들어지면 앞으로도 대책 없이 남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교수 사회의 명예나 질서를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치에도, 뜻에도 맞지 않는, 마구잡이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말은 말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반드시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석좌교수, 명예교수들이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 말의 사용을 막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 호칭이 대상자에게 명예나 학문적 업적에 대한 인정까지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의 분수에도 맞지 않는 호칭을 제의받으면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극구 사양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과공비례(過恭非禮, 공손함이 지나치면 오히려 예의가 아니라는 말)라 하지 않았는가.

또 간첩 행위를 하다가 붙들린 사람들에 간첩이라는 말 쓰기를 꺼리고 ‘활동가’라는 막연한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활동가로 일하던 사람이 간첩 행위를 하다 붙잡혔다면 그들은 간첩이다. 그런데도 계속 활동가라 부르다가는 자칫 ‘활동가’라는 호칭이 ‘간첩’을 일컫는 말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은 열심히 일하는 진짜 활동가들이 나서서 막아야 할 일이다.

고사성어 중 ‘양상군자(樑上君子)’라는 말이 있다. 이는 대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도둑’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한자어를 동원한들 도둑은 어디까지 도둑이다. 간첩이라고 직접적으로 부르지 않아도 간첩질한 사람은 간첩이다. 그나마 양상군자라는 말에는 위트와 풍자가 들어 있다. 그러나 위트나 풍자는 찾아볼 수 없는 말들을 질서 없이 사용하여 사회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가 뭘까? 사회의 약속인 언어는 연탄재처럼 쉽게 내다 버리고 멋대로 새것을 만들어 쓸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꽃은 시들어도 꽃이고 걸레는 빨고 삶아도 걸레이다. 말을 번지르르하게 바꾼다고 해서 그 말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말의 본질을 바꾸려면 말하고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태도, 사회의 인식 등 보다 큰 그림을 바꿔야 한다. 아니 이런 것들이 바뀌면 말은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된다. 쓰던 말을 버리고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 그 사용을 종용하는 건 세상을 바꾸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나 자신부터, 내 가족부터 마음가짐을 고쳐먹고 내 자녀를 제대로 교육하려 노력하는 것이 낫다.

독일 작가 모니카 페트의 《행복한 청소부》는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는 거리 표지판을 닦는 청소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청소부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고 그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거리를 지나던 한 꼬마가 자신보다 그 거리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청소부는 그 거리와 관련된 음악가와 작가에 대해 공부했다. 그 음악가들의 연주가 있는 공연에도 가고 작가들의 책도 읽었다. 그 청소부는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고 유명 음악가들의 노래를 부르거나 작가들의 글을 외우면서 청소했다. 청소부의 그런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고 대학에서 강연 제의까지 들어왔다. 바야흐로 청소부가 유명 강사로 ‘인생 역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 청소부는 강연 제의를 거절했다. 자신은 청소부로서 행복해지기 위해 공부를 한 것이다, 청소부일 때 자신은 가장 행복하다면서…….

중요한 것은 호칭이 ‘청소부’냐 ‘청소 노동자’냐 하는 게 아니다. ‘기사 식당’인지 ‘기사님 식당’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그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 직업에 귀천이 없음을 진심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무슨 일을 하든 그 종사자를 직업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존중해주는 것, 진정으로 대우받는 느낌이 들도록 해주는 것, 이런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근본적인 해결은 이루지 못한 채 명칭이나 호칭만 바꾸다 보면 우리말의 인플레 현상은 끝없이 심해질 것이다. 그 인플레 현상이 심해지다 보면 조선 시대 왕이나 왕비의 존호와 같이 모든 좋은 의미의 말을 다 붙인 긴 호칭을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참고로 무려 예순세 자(字)에 달하는 고종의 존호를 여기 소개하겠다.

고종통천융운조극돈윤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신렬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이 가운데 ‘문헌무장인익정효(文憲武章仁翼貞孝)’ 여덟 자는 그의 사후에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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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예순세 자에 이르는 존호를 받은 고종의 무덤.

황인희 객원 칼럼니스트 (다상량인문학당 대표 · 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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