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끝낼 수 없어. 우리 멈출 수가 없잖아. 때론 상처가 좌절로 남아 돌이킬 수 없는 후회도 하고 신문에 실려 온 얘기들. 헝클어진 우리들을 탓할 수 없어. 이제 모든 걸 다시 시작해. 이렇게 여기서 끝낼 수 없어. 내겐 아직도 시간이 있어. 지금 이렇게 지금 멈출 순 없어.

1990년대 초반 큰 인기를 모았던 ZAM이라는 그룹의 ‘난 멈추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노래다. 이 노래를 들으면 종착역을 앞두고 속도를 더 높이는 폭주 기관차 같은 현 정권이 연상된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달리는 게 아니라 노래 가사처럼 멈출 수 없을 뿐이다.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실정과 비리 그래서 파국이 뻔히 보이는데도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여기서 끝낼 수 없다고 개혁할 수 있다고 정신 승리하면서 페달을 밟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언론개혁 입법이라고 밀어붙이고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보면 분명 브레이크가 고장 나 달릴 수밖에 없는 정권이 분명해 보인다. 어차피 순수히 정권을 빼앗기니 차라리 욕 좀 먹더라도 나라가 어떻게 되더라도 정권만 다시 잡으면 된다는 생각에 함몰되어 있는 것 같다. 법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정상적인 민주국가라면 생각조차할 수 없는 발상이다. 헌법에 명기된 표현의 자유는 물론이고 언론의 권력 감시 기능을 크게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 가짜뉴스를 때려잡고 기레기의 병폐를 근절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런데 엄청난 배상금이 겁나서 문 닫는 게 두려워서 언론사들이 정작 말해야 할 것을 할 수 없다면 그 피해는 누가 배상해야 할까. 말할 것도 없이 언론의 주된 감시 대상은 정치적·경제적 권력 집단과 권력자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그래서 뉴스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보도로 피해를 보았다고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도 그들이다. 이 법으로 언론의 보도기능이 위축되면 최대 수혜자는 당연히 권력을 가진 집단 그중에서도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차기 대통령선거를 200여 일 앞둔 이 시점에 수많은 비판을 감내하면서 이 법을 몰아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선거에서 이기고 싶어서다. 아니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선거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집권 여당을 평가하는 회고적(retrospective) 의미와 미래 정책을 선택하는 전망적(prospective) 의미를 담고 있다. 두 의미는 상호 연결되어 있고 중첩될 수 있다. 하지만 차기 대통령선거는 회고적 의미 즉, 정권심판 분위기가 압도할 가능성이 높다. 그냥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쌍팔년도 구호가 당시 등장하는 선거가 될 수도 있다.

당연히 회고적 선거의 주메뉴는 집권 여당의 실정들이다. 부동산 폭등, 외교적 고립, 안보 붕괴, 코로나 방역 실패 같은 정책들은 물론이고 정권 내내 이어진 인사 파행과 불법·탈법적 행태들이 선거 쟁점으로 부각될 것이다. 이런 쟁점들이 주도하게 되면 여당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집권 여당은 실패한 정책들이 쟁점으로 부각되지 못하도록 해야만 한다. 특히 권력 내부 인사들의 비리와 파행 그리고 불법적 행위들과 관련된 보도를 막는데 사활을 걸어야 할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선거기간 중에 언론사들의 이런 논제설정(agenda-setting)기능을 위축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야당은 물론이고 우군이었던 언론단체들까지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 법안을 강행하는 이유다. 아마 선거기간 내내 집권 여당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쟁점보도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가뜩이나 매체환경 변화로 고전하고 있는 언론사 입장에서 이 중 몇 개만 패소하게 되면 경영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더구나 이 정권은 법원과 사법기관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다. 이처럼 예상된 보복이나 처벌은 언론사들로 하여금 알아서 기는 이른바 ‘자발적 규제(self-censoring)’를 압박할 것이다. 심지어 선거에 지더라도 이어지는 소송전을 통해 부정선거 분위기를 조성하고 정권의 정당성에 흠집을 내려 할 것이다.

언론규제는 어떤 긍정적 효과가 기대되더라도 이로 인해 언론행위들이 위축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중시한다. 대의민주제도가 가지고 있는 권력 독점의 맹점을 견제하고 민주적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정책이나 쟁점들에 대해 누구나 자유롭게 비판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토대 위에서 존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취지라 하더라도 –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의도 자체도 불순하다 – 그로 인한 사회적 손해가 더 크다면 반민주적 규제인 것이다.

미국에 1949년에 만들어진 ‘형평의 원칙(fairness doctrine)’이라는 법이 있었다. 방송사가 특정 쟁점이나 사건을 보도할 경우에는 이와 관련된 상반된 의견을 균형있게 보도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 법은 40년 가까이 미국 방송의 정치적 형평성과 보도 공정성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해왔다. 하지만 1987년 미국의회는 이법을 폐기하였다.

그 이유는 케이블TV 같이 방송 채널이 많아져서 굳이 한 채널에서 형평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형평의 원칙을 지키다보면 방송사들이 쟁점이 될 만한 중대한 정책현안이나 사건들에 대한 보도를 꺼린다는 것이다. 좋은 취지로 만든 법이지만 언론의 취재·보도행위를 도리어 위축시켜 국민들의 알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다.

언론의 징벌적 배상제는 입법 절차는 물론이고 그 내용도 과잉입법이고 반민주적이다. 그렇지만 선거를 앞두고 권력에 대한 언론보도 자체를 억압하려도 취지는 더 반민주적이다. 아마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역대급 언론탄압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이 정권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욕스러운 권력욕은 결코 멈추지 않고 있다.

황근 객원 칼럼니스트(선문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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