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도 아닌 여동생 김여정에 의한 하명(下命) 정치 본격화
지난해 6월 김여정, 대북전단금지법 제정 하명...그해 12월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켜
문재인 정부 최장수 장관 강경화도 김여정에게 찍힌 뒤 경질돼...
“문 정권은 이제 북한의 ’위임통치‘라도 받을 셈인가”

올해 6월 29일 열린 북한 노동당 제8기 제2차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김여정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비판토론자로 나서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올해 6월 29일 열린 북한 노동당 제8기 제2차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김여정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비판토론자로 나서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북한의 남한에 대한 내정간섭이 갈수록 노골화되고 있다. 지난해 6월 김여정의 하명에 의해 대북전단금지법이 제정된 이래 김여정에게 밉보인 남한의 외교안보 장관들은 줄줄이 경질되거나 사퇴했다. 최근 김여정은 남북통신연락선 복원을 대가로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직접적으로 요구하고 나서며 남한의 안보까지 쥐락펴락하는 상왕(上王)으로 등극하는 모양새다.

북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 1일 이달 중으로 예정된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요구했다. 김여정은 이날 발표한 담화문에서 남북통신연락선 복원에 대해 “단절됐던 것을 물리적으로 다시 연결시켜 놓은 것일 뿐”이라며 의미를 축소하면서 “지금과 같은 중요한 반전의 시기에 진행되는 군사연습은 분명 신뢰회복의 걸음을 다시 떼기 바라는 북남수뇌들의 의지를 심히 훼손시키고 북남관계의 앞길을 더욱 흐리게 하는 재미없는 전주곡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미연합군사훈련 개최 여부가 향후 남북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경고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김정은은 지난달 24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전군 지휘관·정치간부 강습회에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적대세력들의 침략전쟁연습’이라고 부르며 “적대세력들이 광신적이고 집요한 각종 침략전쟁연습을 강화하며 우리국가를 선제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계속 체계적으로 확대하고 군비를 증강하고 있는 현 상황은 긴장격화의 악순환을 근원적으로 끝장내려는 우리군대의 결심과 투지를 더욱 격발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김여정의 이날 담화문은 결국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원하는 김정은의 의중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김여정의 담화문이 발표 후 다음날(2일) 일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즉각적으로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연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미연합훈련 연기는 코로나 방역은 물론 남북·북미관계 개선의 새로운 발판이 될 것”이라며 한미가 조속히 연합훈련 연기에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이보다 앞서 지난달 8일 정의당이 대표발의한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촉구하는 국회 결의안에 줄줄이 이름을 올렸다.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가 이날 대표발의한 ‘한반도평화 프로세스 재개를 위한 한미연합훈련 중단 촉구 결의안’에는 배 의원을 비롯해 정의당 강은미, 류호정, 심상정, 이은주, 장혜영 의원 등 소속 의원 6명 전원과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소병훈, 조오섭 의원, 무소속 김홍걸, 양정숙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결의안은 “8월 한미연합훈련이 관성적으로 치러질 경우, 강경의 악순환이 재연되어, 오히려 안보의 위협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한다” “한미연합훈련의 중단을 통한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재개로 얻을 수 있는 안보적 이익이 훨씬 크다”며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촉구했다.

여권 일각에서 이처럼 한미연합군사훈련 연기론이 터져 나오자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서둘러 진화에 나서는 한편 북측에 양해를 구했다. 송 대표는 2일 오전 당 최고위원회에서 “이번 훈련은 시뮬레이션 방식의 전투 지휘소로 대체 실시될 예정이고, 대규모 기동훈련은 이미 하지 않고 있다”며 “김여정 부부장이 염려한대로 적대적인 훈련이 아니다. 남북관계 발전에 장애가 되지를 않기 바란다”고 몸을 낮췄다.

통일부는 김여정의 담화에 대해 “특별히 논평할 것 없다”며 한미연합훈련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존의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북한이 남북통신연락선 복원의 대가로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요구할 것이라는 점은 이미 예견된 바다. 미국 하와이 태평양포럼의 랄프 코사 대표는 남북통신연락선에 대해 “북한의 전술적 움직임으로 본다”며 “아마 한국의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진영을 돕거나 미국이 더 빨리 북한과의 협상에 나오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전보다 더 축소시키거나 아예 연기시키기 위한 의도도 존재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미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선임연구원도 “북한이 남북통신선 복원에 동의한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이번 남북통신선 복원을 계기로 한국 내에서 한미연합훈련이 연기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길 원했을 것”이라고 했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2일 “김정은 남매의 협박에 굴복해 한미연합훈련을 중지한다면 당면한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잃는 것은 물론 영원히 북핵을 이고 사는 인질이 될 것”이라며 “우리국민의 생명안전을 위한 방어목적인 한미연합훈련 진행이라는 원칙적으로 당당한 모습으로 맞서야 우리가 향후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으며 남북대화를 미북 비핵화 협상으로 이어 놓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여정 한 마디에 외교·국방 장관들 줄줄이 경질되거나 자진 사퇴

북한에은 남한의 장관 교체에도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은 올해 초 갑자기 경질됐다. 당시 외교부 주변에선 문재인 정부의 ‘원년 멤버’인 강 장관이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5년 임기를 채울 것이라는 예상이 파다했다. 그러나 2020년 12월 9일 김여정은 강 장관을 콕 집어 “남조선 외교부 장관 강경화가 중둥 행각 중에 우리의 비상방역 조치들에 대하여 주제넘은 평을 하며 내뱉은 말들을 보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들었다”며 “얼어붙은 북남관계에 더더욱 스산한 냉기를 불어오고 싶어 몸살을 앓는 모양”이라고 비판했다. 김여정은 그달 5일 바레인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코로나로 인한 도전이 북한을 더욱 북한답게 만들었다”고 말한 것을 두고 “주제넘은 망언” “정확히 들었으니 우리는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고 아마도 정확히 계산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돼 문재인 정부의 최장수 장관인 강 전 장관은 전격 교체됐다.

그보다 앞서 2020년 6월에는 김여정의 담화문 발표 후 통일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이 잇따라 사퇴했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은 김여정의 6월 담화 후 2주 뒤에 “남북관계 악화의 책임을 지겠다”며 사의를 밝혔다. 정경두 전 국방부 장관도 김여정의 지휘를 받는 김영철 당중앙위 부위원장이 담화를 통해 ‘경박하고 우매하다’고 비판하자 2개월여 만에 사퇴했다. 당시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은 “김여정 하명 인사에 ‘오경화(문재인 정부와 5년 임기를 함께 한다는 의미)’도 무너졌다”며 “문재인 정권, 이제는 북한의 ‘위임통치’라도 받을 셈인가”라고 비판했다. 조 의원은 “천안함 폭침의 주역인 김영철이 ‘경박하고 우매하다’고 비판하자 정경두 국방부장관을 교체했고, 김여정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며 데스노트를 찍어내자 김연철 통일부 장관도 경질됐다”며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장관 인사는 북한의 입을 쳐다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문재인 정권에게 묻고 싶다.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내팽개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북한의 ’위임통치‘라도 받을 셈인가”라고 했다.

●김여정 하명법, 대북전단금지법

김여정은 2020년 6월 4일 대북전단을 날리는 탈북민 단체들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청와대를 향해 대북전단 살포를 막을 ‘법이도 만들라’고 발광을 했다.

김여정은 이날 발표한 담화문에서 “탈북자라는 것들이 기어나와 수십만장의 반공화국 삐라를 우리측 지역으로 날려보내는 망나니짓을 했다는 보도를 보았다”며 “사람값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들이 함부로 우리의 최고존엄가지 건드리며 핵문제를 걸고 무엄하게 놀아댔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김여정은 대북전단을 날린 탈북민들을 행해 “그 바보들” “탈북자라는 것들” “글자나 겨우 뜯어볼가 말가하는 그 바보들” “똥개들” “쓰레기들”이라며 욕을 해댔다. 이어 “똥개들은 똥개들이고 이제는 그 주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때”라며 “구차하게 변명하지 말고 그 쓰레기들의 광대놀음을 저지시킬 법이라고 만들고 애초부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못하게 잡도리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를 향해 대북전단 살포를 막을 ‘법’을 만들라고 직접적으로 하명한 것이다. 김여정은 대북전단 살포를 막지 않으면 금강산 관광 폐지와 개성공단 완전 철거, 그리고 있으나마나한 남북군사합의를 파기하겠다며 단단히 단도리를 했다.

이날 김여정이 담화문을 발표한 지 불과 4시간여 만에 통일부는 “대북전단 중단 법률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무릎을 꿇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북 삐라는 참으로 백해무익한 행위”라며 “안보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대해서 정부가 단호히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국방부도 대북전단 살포는 접경 지역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현 민주당 대표)은 작년 6월 30일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을 자신의 1호 법안으로 대표발의했다. 그리고 민주당은 그해 12월 14일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료시킨 뒤 대북전단금지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 당시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필리버스터에 돌입해 무려 10시간 이상을 혼자 발언을 이어갔다. 당시 태 의원은 “이건 대북전단지법이 아니라 김정은과 손잡고 북한주민을 영원히 노예의 처지에서 헤매게 하는 법”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4월 15일(현지시간) 미 하원의 초당적 기구인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는 대북전단금지법 제정을 계기로 ‘한국인권’을 주제로 한 청문회를 사상 처음으로 개최했다. 청문회에서는 문재인 정권이 대북전단금지법 등을 통해 시민의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쇠퇴를 불러왔다는 증언자들의 비판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유엔의 아이린 칸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지난 4월 19일 문 정부에 서한을 보내 대북전단금지법이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 19조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 등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정부에 입장을 요청했다. 그러나 문 정부는 “한국정부의 반복적인 권고와 행정 조치에도 대북전단·물품 살포가 접경지역 주민의 생명과 신체에 지속적인 위협을 초래하고 있어 법을 통한 제한이 필요하다” “개정법은 접경지역 주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제한을 두는 것으로 표현의 자유의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라 구체적인 표현 방식에 최소한의 제약을 두는 것”이라며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양연희 기자 yeonh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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