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근래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보수가 바뀌어야 한다.”, “보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같은 얘기들이다. 나쁜 말도 틀린 말도 아니다. 듣기에도 그럴싸하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랍 속담에 이런 게 있다. “산이 움직였다면 믿으라. 그러나 사람이 바뀌었다면 믿지 말라.” 이것은 통찰인 동시에 인간 정신을 해부한 위대한 생물학적 성과다. 보수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보수다. 미국 보수주의의 중시조 격인 러셀 커크이 쓴 ‘보수의 정신’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러셀 커크는 보수는 인간과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라고 단정한다. 이념이 아니라는 얘기다(뭔가 거창한 것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럼 어떤 태도냐. 그것은 신중함과 겸손함이다. 보수주의자는 인간은 틀릴 수도 있다는(얼마든지 혹은 수시로 또는 습관적으로) 전제하에 대화와 타협을 통해 조금씩 개선을 도모한다. 보수의 기원인 버크도 비슷한 말을 했다. “관습을 급진적으로 타파하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해악을 감수하기보다는 실수하는 아이처럼 보일지라도 예전 관례를 유지하는 게 더 현명하다.” 그렇다. 인생은 짧고 실험은 위험하며 우리의 삶은 모두 소중하다. 그래서 발상으로 그칠 일을 절대 현실에 옮겨서는 안 된다. 발상을 현실화하는 바람에 벌어진 히틀러와 스탈린과 크메르루즈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피의 복수극으로 치닫다가 기어이 나폴레옹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프랑스 혁명 역시 빼놓을 수 없겠다.

싸우지 않는다면 보수가 아니다

그렇다고 보수가 관조의 철학이란 얘기는 아니다. 보수는 싸우기 때문이다. 보수는 인간 사회를 완벽하게 개조 할 수 있다는 무모한 발상과 싸운다. 보수는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고 단언하는 지적 야만과 맞서 싸운다. 세상은 레고 블록이 아니다. 한번 박살나면 아무리 명료한 설명서가 있어도 절대 원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한다. 하드웨어만 복구 불가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영혼과 정서가 함께 망가진다. 그래서 러셀 커크는 이렇게 선동한다. “보수주의자는 무장한 교리와 이념의 통제에 저항해야 한다. 질서ㆍ정의ㆍ자유를 훼손하려는 자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이 선동은 중요하다. 훼손의 위협에 대해 저항하고 싸우지 않는 자는 보수가 아니다. 그런 종자들을 무임승차자 또는 기득권이라고 부른다. 싸우지 않고 보수를 칭하는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탐욕과 탐욕과 탐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것이다. 이런 자들이 보수를 사칭하게 놔두는 일은 보수주의자들에게 범죄행위다. 이들과도 가차 없이 싸워야 한다. 성경에도 나온다. “나와 함께 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로다.(누가복음 11:23)” 내성적인 성격의 러셀 커크였지만 그러나 보수주의를 망치려는 각종 주의자들과 싸울 때만큼은 맹렬한 투견 같았다.

세대의 문제는 그 세대가 해결해야 한다

그럼 이대로 그냥 가자는 말이냐, 물으실 수 있겠다. 당연히 아니다. 사람은 바뀌지 않게 때문에 대신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보수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진 것을 내려놓고 그것을 젊은 세대에게 기꺼이 양도해야 한다. 가령 ‘청년 정당 스타트 업’같은 것이다. 보수가 젊은 세대의 고민을 해결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국회의원 300명을 붙잡고 물어보라. 혼자 힘으로 비트 코인 살 수 있는 사람, 코딩 할 줄 아는 사람 있느냐 물어보면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무슨 재주로 젊은 세대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반대로 몸 쌩쌩한 애들이 관절염 관련한 법안을 만드는 것과 같다. 사람은 체험한 것 이상을 알기 힘들다. 지금이 그들 말대로 ‘헬 조선’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도 그들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줘야 한다. 그러다보면 그들도 알 것이다. 일자리 만들겠다고 무작정 자금 투입하는 것이 얼마나 ‘뻘짓’인지 알 것이다. 공무원 숫자 늘이는 것이 나중에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오는지 알 게 될 것이다. 문명의 생존과 성장을 알게 되면 자칭 진보를 부르짖는 자들이 얼마나 허황되고 가식적인 인간들인지 알 게 될 것이다. 사람은 지킬 것이 없을 때는 싸우지 않는다. 젊은 세대에게도 지킬 것을 만들어줘야 한다.

이 땅에 마크롱이 나오는 날이 올까

바꿀 수 있는 것은 청년의 신선함뿐이다. 이를 위해 기득권 일부를 기꺼이 양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청년 정당 창당을 지원해주고 공천권 20%를 넘겨주면 전대미문의 정치 실험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래야 한국에서도 마크롱이 나온다. 마크롱은 혼자 힘으로 세상을 바꾼 인물 아니냐고? 외국이라고 그게 쉬울 리 없다. 마크롱은 프랑스 사회당이 다듬어서 세상에 내 보낸 인물이다. 사회당이 만든 인물이 시장경제 정책을 펼치고 있다. 현재 4선인 자유 한국당 김모 의원의 나이는 51세다. 그 아래 나이로 겨우 네 명의 의원이 있다.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 되는 게 아니라 아예 솥을 태우게 된다. 보수가 할 일은 새로운 세대에게 실패의 경험담을 충분히 들려주어 시행착오를 줄이도록 해주는 일 뿐이다. 우리는 종종 “이 땅은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땅”이라는 표현을 쓴다. 참으로 심각하게 기성세대 오리엔티드된 발언이다. 인디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땅은 우리가 후손에게 빌려 쓰고 있는 땅” 발상의 전환 없이는 대한민국 보수는 생물학적 연령이 끝나는 순간 사회에서도 끝난다. ‘보수의 정신’을 번역한 이재학은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역자로서 이렇게 대답한다. “보수주의는 독재나 재벌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상이 아니다. 어떤 일관된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는 이념도 아니다. 보수주의를 몇 마디로 요약한다면 인간은 대단히 불완전한 존재여서 지상낙원이나 천국을 지구에 구현할 방법이 없으니 조금씩 노력해서 더 나은 사회를 이루도록 하자는 생각이다.” 이 ‘조금씩 노력’을 지금 한국의 보수는 다른 데다 하고 있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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