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청 '추천도서' 중 「하류지향」·「교육을 바꾸는 힘 감성교육」 분석
교과서에서도 사라진 ‘종속이론’식「하류지향」 특히 강조
진로·진학 지도 경시하고 감성에만 치중한 교사 코칭

조윤희 부산 금성고 교사
조윤희 부산 금성고 교사

교육청이 교사들에게 하달한 '문제투성이' 추천도서목록 중에도 눈길을 끄는 책이 한권 있었다. 「하류지향」이라는 제목의 책은 우치다 타츠로라는 일본 작가의 책. 발간 된지 몇 해 만에 별반 호평을 받지 못하고 절판됐다. 이후 재발간됐고, 저자는 지난해 11월6일 광주시교육청 초청으로 특강을 하기도 했다.

● 21세기판 종속이론, ‘하류지향’에 이분법적 사고를 가르쳐라?

이 책의 저자는 사회화 과정에서 학생들이 노동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배우는 것부터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서 먼저 ‘소비주체’로서 사회화 과정을 익히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돈 가진 구매자로 세상을 만난 아이들이 학교에서도 ‘구매자’처럼 행동하며, “이걸 배우면 뭐가 좋아요?”라고 묻고, 그렇게 묻는 아이들에게 교사와 부모들은 어떻게든 그 이유를 설명하려 하면서, 마치 잘 팔리지 않는 물건을 어떻게든 소비자 마음에 들게 해서 팔아치우려는 상인처럼 행동한다고 지적한다. 마치 ‘장사꾼’처럼 행동하는 교육현장이 몹시 못마땅하다는 투다.

당연히 글로벌 인재로서 커가야 하는 인재를 ‘능력 있고, 체력도 있고, 권리의식이 희박하고 비판정신이 결여되어 상사의 말에 순종하고, 어떠한 공동체에도 귀속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 회사 전근 명령 하나로 곧바로 해외 지점과 공장에 부임할 수 있고, 임금이 높지 않은, 글로벌 기업들이 요구하는 이상적인 인재상’에 굴종하는 존재로 비하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재는 ‘공동체’를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상이라고 못 박는다. 바람직한 인재는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며 그러한 교육이 시급함을 역설한다.

교육청의 추천도서목록 중 일부
교육청의 추천도서목록 중 일부

그는 또한 국경이 있고 관료제도와 상비군이 있고 국적과 귀속의식을 가진 ‘국민’을 구성원으로 하는 공동체로서의 ‘국민국가’를 강조하고 이런 국민국가에 가격(加擊)을 한 것이 바로 ‘글로벌 자본주의’라고, 글로벌 자본주의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이러한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와 단절되어 영속적인 국민국가로 회귀할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자본주의로 생성되는 양극화 사회는 ‘리스크의 사회’이고 이 사회에서 리스크를 더 많이 떠안는 계층은 의지할 곳 없는 하류 계층이 되므로 이들을 떠안는 ‘하류지향’을 권하는 것으로 이 책은 당부를 마친다.

책을 읽는 내내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이제는 화석이나 다를 바 없는 ‘종속이론’의 부활을 보는 것 같았다.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뉘어 중심부는 끊임없이 주변부를 착취하므로 중심부로 부터의 분리를 강조하던 이론. 1980년대 중반에 이미 그 실효를 상실한 논리가 다시 부활해서 세계 무역 10위 대국인 대한민국의 고교생들에게 필독서로 읽혀야 할 목록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다니, 대체 무엇을 읽혀 어떤 생각을 가지게 하겠다는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목록을 훑어가다 보면 추천도서 중 상당수의 도서들이 학생인권에 대한 도서임을 알 수 있다. ‘인권 교문을 넘다’라는 책은 ‘인권 없이 교육만 있는 학교’를 들어 비판한다. 두발 자유, 체벌, 휴대전화 사용, 교복 등 8가지 쟁점을 파헤치며 학생인권을 억압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못 박는다. ‘인권이 살면 규칙이 죽는가?’라고 질문하고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들은 학생인권을 강조하면서 학생인권을 강조해도 규칙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주장이다. 물론이다. 그러나 인권이 살아도 규칙은 죽지 않는다는 이들의 논리와 이러한 질문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인권이 살면 규칙이 죽는가?’에서 규칙과 인권의 관계를 잘못 설정해 놓았다.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규칙과 인권은 서로 ‘제로섬’이 아니다. 학생인권에 날개를 달아주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둘 사이를 억지로 끼워 맞추어 놓았을 뿐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상충되는 관계’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문제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인권조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학생 인권은 지켜지고 있었고, 학생인권의 침해 없이도 규칙은 지켜지며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학생인권 조례가 없는 지역에서도 학생인권의 침해 사례 없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규칙은 성실하게 잘 지켜지고 있음을, 이들은 설명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학생의 인권이 산다고 규칙이 죽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한 가지를 더 지적하자. 이들은 ‘학생’의 인권에만 강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은 짚고 넘어가자. 학생의 인권 뿐 아니라 교사의 인권 역시도 그것이 지켜진다 해서 규칙이 죽지 않는다는 점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인권을 수호함이 규칙과 무관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유독 학생인권 만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일관성 없는 억지에 불과하다.

이렇게 학생인권과 교사의 인권을 분리하고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만이 인권 수호의 정당성 확보인양 강조하는 것은 형평의 원칙에도 맞지 않고 교육의 현장을 이분법적인 갈등적 사로고 파악하려는 편협한 시각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의 이러한 논리가 일관성과 정당성을 가지려면 학생인권 조례가 없는 지역보다 시행지역의 인권침해 사례나 학교 폭력 사례 등의 학교 내 문제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거나 인권침해 사례가 줄어서 인권조례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할 객관적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인권조례 없는 지역이 있는 지역에 비해 인권침해 사례가 더 많이 있어났다는 보고를 아직 읽지 못했다. 우리사회는 갈등적 구도에 의한 이분법적 사고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좀 더 세상을 외눈박이가 아닌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도록 가르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 ‘교육을 바꾸는 힘 감성교육’, 감성만 남은 교육? 교육의 목표는 어디에 있나.

교육 목표는 인지적, 정의적, 운동기능적 영역으로 구분된다고 교육학 원리에 적시되어 있다.

그러나 추천 도서 목록 중 눈에 띄는 책들은 정의적 목표 중 그것도 주로 감정 혹은 감성과 관련 도서였다. 정의적 목표란 인간의 흥미·태도·감상·가치관·감정·신념 등에 관련되는 교육목표의 영역을 일컬음에도 유독 ‘감성’교육에 치우친 부분의 도서목록을 보면서 교육이란 것이, 아이들이 징징거릴 때마다 품고 안아주고 오냐오냐 공감만 해주면 되는 것일까 하는 염려가 앞서는 것도 사실이었다. 상담공부를 한 필자의 경우 학생들과의 소통과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는 있다. 그러나 교육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 단지 공감과 감성교육이기만 해서 될 것인지 심각하게 묻고 싶다.
학교상담 공부를 하면서 교실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 수업 태도가 몹시 산만하고 집중하지 못하여 급우들의 학습을 방해하고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들을 보면 제일 먼저 실시하야 하는 것이 ‘지능검사’라는 사실을 배우고 굉장히 놀라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지능검사는 자신이 속해야 할 학급의 수준과 맞지 않아 수학능력이 되지 않는 학생이 학급에 적응하지 못해서 말썽을 부리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시하는 단계적 접근 같은 것이라 했다. 이를 고교 교실에 적용한다면, 학생들이 교실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 학생들의 수학 능력, 혹은 학교급 별로 그 학교나 학급이 자신과 맞지 않는 진로 설계의 불일치 탓일 가능성도 있을 수 있으므로 먼저 점검하도록 돕는 그런 류의 독서가 더 권장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진로, 진학과 관련된, 학생들의 문제를 찾아주기 위한 독서가 좀 더 비중 있게 권장되어야 할 것 같은데, 도리어 아이들의 감성, 감정 코칭, 교육 그리고 인권, 갈등해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프로그램과 수많은 활동이 있다 하더라도 그 중심에 ‘사람’이 없다면 그야말로 공허한 것임을 가슴 깊이 새겨 봅니다. 올 한 해, 아이들도 저도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성장’의 밑바탕에 참통(참여와 소통)이 있어 참 든든하고 행복합니다.”(‘교육을 바꾸는 힘, 감성교육’, p.41)

이 문구야 말로 이런 감정관련 독서를 권장하는 목적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아이들과 소통해서 든든하고 행복하니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뭐니 뭐니 해도 감정관련 추천도서의 백미는 『강신주의 감정수업』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스피노자에서 출발,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 48가지의 인간의 감정을 따라가며 문학작품 속에서 감정들을 끌어내고 충고를 덧붙인다. 저자 자신이 누구보다도 ‘감정’의 중요성을 절감한 탓인지 감정을 충실히 따라간다. 인간이 감정에 충실 하는 것이 큰 과가 될 리는 없지만 이런 부분에서 불편해진다.

“...감정을 순간적이라고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음(good)과 나쁨(bad)’이다. 돌아보면 경제적인 여러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아니라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여러 가지로 무능력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부모나 친구들에게서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자신의 주관과 가치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나약한 인간의 선택이 마치 자본주의에 굴복한 인간들 눈에는 악으로 보일 것이라고 자본주의를 사악하다고 폄훼한다. 경제적인 등의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악한 선택을 한 것이라 한다. 이 책 팔아 자본을 좀 모았을 강신주씨 역시 ‘사악한’ 자본주의에 편승하신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어진다. 자본주의 혹은 경제관념을 투철하게 고려하는 인간의 사고가 어째서 사악한 것인지, 인간의 의리를 우습게 아는 인간의 의지박약과 천박한 배신감이 왜 느닷없이 자본주의의 사악함으로 치부되어야 하는지 거듭 읽어도 답을 찾기 어렵기만 하다.

아이들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미성숙하다. 그리고 아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주변인(marginal man)이다. 그런 불안하고 미숙한 존재들을 먼저 이끌어 주는 선생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까. 무엇을 읽고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교육은 현재의 잘못과 질곡을 뚫고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방향타가 되고 길잡이가 되어야 하기에 교사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교육청의 지정 도서가 아니어도 교사라면 늘 상 읽고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육청이 권장하는 도서는 교육청이란 기관이 가지는 무게 때문에 더더욱 중심이 잡혀야 하고 신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평등이 중요한 것이면 그 평등을 고루 지켜주기 위한 자유의 중요성도 가르쳐야 하고, 갈등적 사고를 가르치려면 기능적 사고도 가르쳐야 한다. 감정의 중요성을 가르치려면 이성과 지성이 가지는 무게도 균형있게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평등과 자율이 동시에 강조되는 교육도 우리나라에 건너오면 평등만 강조되니 이런 걱정들이 결국 기우는 아닐 것이다. 귤도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던가. 이념의 대립이 아이들의 교육을 망칠까 두려운 세상이다. 외눈박이로 키울 심산이 아니라면 적어도 교육은 좌우 양팔을 가진, 두 눈을 똑바로 뜬 ‘인간’으로 기를 수 있도록 제대로 읽히고 길러져야 한다. 그렇게 아이들을 기르기 위한 교사의 독서야 말로 균형이 제대로 잡힌 양 날개를 장착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조윤희(부산 금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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