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화면 캡처
사진=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화면 캡처

"나는 여전히 같은 꿈을 꾼다. 북한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권이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3대에 걸쳐 독재가 이어지는 비상식적 상황을 끝내고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들며 대동강의 기적을 통해 북한 사람들에게도 풍요로운 삶을 선물해주고 싶다. 더 나아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대한민국을 아시아의 패권을 가진 강대국으로 만드는 일에 일조하고 싶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에서는 분명 현실적인 꿈이니까"

김일성종합대 영문과 출신의 탈북민 김금혁 씨(30)가 북한에서 0.1%, 소위 엘리트 층인 자신이 탈북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김금혁 씨는 9일 자신의 SNS에 "한국에 온 후 가장 많이 들었던 말들 중 하나가 '나같으면 그냥 북한에서 편안하게 살았을 것 같아. 형 정도 스팩이면 상위 0.1퍼센트인데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이야?'라는 질문이었다"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본인의 탈북 스토리를 소개했다. 

우리는 그 답을 스스로 찾았다. 
북한의 독재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된 엘리트들에게만 특권을 부여하고 나머지 민중의 삶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감시와 통제의 대상일뿐이다. 선택받은 자는 그 혜택을 대대손손 누리기 위해 권력을 되물림하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모든 부패와 부조리의 피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힘이 강한자는 힘이 약한 자를 병탄하고 빼앗고 자신보다 힘이 더 강한 자에게 아부하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찾은 답이었다. 

북한 평양 출신인 김 씨는 중국 유학 시절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됐다면서 "체제의 모순에 대한 의문이 하나 둘 풀릴 때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고스란히 느꼈다"고 했다. 

바꾸고 싶었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토론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달걀로 바위치기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누군가 깃발을 들고 먼저 일어서지 않는다면 변화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새로운 세상을 먼저 경험한 우리가 나서 사람들을 계몽하고 일깨우고 하나로 뭉쳐 세력을 형성한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우리의 토론은 북경대의 학생식당에서, 어언대의 기숙사로 그리고 대동강의 어느 맥주집에서도 이어졌다. 철부지 20살들의 독서토론모임이었지만 우리는 그때 원대한 꿈을 가진 혁명가였다. 

김금혁 씨는 중국 베이징에서 유학 중이던 2012년 한국으로 망명을 선택, 그해 3월 말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현재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에서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난세일기’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종합편성채널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하고 있다. 또 지난달에는 국민의힘 대변인 선발 토론대회 ‘나는 국대다’에 참가해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김금혁 씨 페이스북 글

한국에 온 후 한동안 숨어 지내다싶이 했었다. 김일성대 출신이라는 점과 북한 유학생이었다는 점 때문에 많은 인터뷰 요청과 방송섭외가 있었지만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과 함께 유학했던 동료들때문에 쉽게 응할 수 없었다. 그러다 2019년부터 공개활동을 시작했으니 이제 2년이 조금 넘은셈이다. 

이미 나는 부모님앞에 큰 죄인이다. 북한 입장에서 본다면 자식 하나 잘못 키워 온 가족을 사지로 밀어 넣었으니 이보다 더한 불효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집안은 남들의 부러움을 받던 잘나가던 집안이었으니 그 타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남들처럼 편안하게 유학생활을 즐긴 후 북한으로 돌아갔다면 아버지,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김일성대를 졸업하고 지금쯤은 아마 북한 외교관이나 당 간부로 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같으면 그냥 북한에서 편안하게 살았을 것 같아. 형 정도 스팩이면 상위 0.1퍼센트인데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이야?" 한국에 온 후 가장 많이 들었던 말들 중 하나다. 

어찌보면 맞는 말이다. 솔직히 나는 북한에서 살면서 가난한 적도 없었고 배가 고파본 적도 없었다. 많은 탈북민들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그 모든 어려움과 고난은 나를 피해갔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충성이 가져다준 혜택 속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자기 자랑 같겠지만,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하니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고 북한 엘리트들의 필수코수라 할 수 있는 학교들을 어렵지 않게 입학했다. 운도 참 좋았다. 2009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학생들 특히 문과생들은 유학을 나갈 수 없었다. 그러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갑자기 등장하고 분위기가 바뀌면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우고 돌아오라는 요구와 함께 문과생들도 유학을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조건이 두 개가 붙었는데, 하나는 유학비용 전체를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학을 하는 현지에 보호자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북경에서 아버지가 사업을 하고 계셨고 비용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에 이 두가지 조건 모두를 충족했다. 

이 두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매우 소수의 인원이 선발되었고 지원자 2000여명 중 300명 정도의 인원이 1차 파견명단에 들었다. 나도 그 중 한명이었다. 

2010년 1월 고려항공을 타고 순안공항을 출발해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고려항공 비행기가 그렇게 작은줄 몰랐다. 하필 바로 옆에 대한항공 비행기가 있었는데 너무 비교되는 것 아닌가. 북한에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큰 특권이다. 19살의 어린 나이에 그 특권을 누리며 한껏 들떠 있었는데 그 설렘과 자만은 딱 두 시간만에 깨져버렸다. 서우두 공항을 뒤덮은 세계 각국의 비행기를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함을 느꼈다. 부끄러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북한 유학생임을 한껏 티내기 위해 모두 단체복을 입고 있었고 가슴에는 김일성 초상화와 학교뱃지를 달고 있었다. 그러나 서우두 공항을 통과하는 내내 그런 복장을 한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었다. 

부끄러웠다. 북한 내 최고 엘리트들이라고 자부하던 우리가 이 세상에 오니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고 발전하는 세상과 너무 동떨어진 곳에서 왔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또한 서우두 공항에서의 경험은 북한 체제에 대한 유학생들의 회의감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유학생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대사관에 모여 총화를 진행한다. 일주일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하며 만났던 사람에 대해서도 보고를 요구하기도 했다. 대사관에 올 때는 왼쪽 가슴에 김일성 초상화를 반드시 달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지키지 않았다. 대사관 후문에 도착했을 때에야 서둘러 초상화를 달았다. 북한 유학생들은 자신들이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 했다. 택시를 타도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뒤 조선족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이 부끄러웠다. 그것도 아주 많이.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비슷한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인터넷을 처음 사용하고 별다른 통제 없이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온 많은 친구들과 처음으로 교류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런 경험을 북한에서는 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북한에서는 절대로 알아서는 안되는 여러가지 정보를 접하게 된다. 예컨데, 김정일에게 아내가 4명이 있다는 것, 김씨일가 대부분은 해외유학을 한다는 것, 수백만이 굶어죽었던 고난의 행군시기 김정일이 소비한 코냑과 와인이 수백만불이 넘는 다는 것 등등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실들을 접하게 된다. 다들 처음은 이러한 정보를 믿지 않거나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나도 그랬다. 우리 사회주의 공화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제국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치부했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수 십년을 교육받은 사람들 아닌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록 더 큰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범수용소, 탈북민, 대규모 숙청 등등의 것들. 너무 혼란스러웠고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 두려웠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어떤 것인지, 인권은 무엇이고 자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갈 수록 새로운 지식에 대한 흥분과 공포는 늘 공존했다. 

이 지점에서 유학생들은 둘로 나뉜다.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몰랐던 척 과거로 돌아가는 집단, 새로운 진실 앞에 분노하고 절망하며 북한체제를 향해 울분을 토해내는 집단. 나는 후자를 택했다. 

사실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조금만 눈 감으면 아무일이 없이 모든 것이 지나간다. 북경대, 칭화대 유학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가면 훨씬 좋은 미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정권의 비위만 잘 맞춘다면 영원히 고위층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후자를 택한다면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한다.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두려움, 가족에 대한 걱정,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총살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럼에도 후자를 택한 이유는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알고도 그냥 넘어갈 자신이 없었다. 체제의 모순에 대한 의문이 하나 둘 풀릴 때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고스란히 느꼈다. 친한 친구와 북한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도중 "김정일 그 XX놈!" 이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김씨일가에 대한 분노가 쌓여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다. 나도 놀랐고 친구는 더 놀랐다. 다행히 그 친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우리는 10시간 가까이 토론했다. 끝내 설득에 성공했고 그 친구를 시작으로 10여명의 다른 유학생들도 모임에 동참시켰다. 첫 모임에서 했던 말을 기억한다.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지금의 이 호사를 누리고 있어?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생이라서? 집안이 좋아서? 우리가 누려온 모든 부와 행복, 기회는 과연 정당한걸까?"

나와 친구들은 그날 많이 울었다. 탈북민 꽃제비를 다룬 다큐를 보면서 펑펑 울었고 정치범수용소의 현실을 다룬 다큐를 보며 분노했다. 우리는 비싼 파스타를 먹고 한 끼에 200위안이 넘는 생일파티를 할 때 다큐의 그 어린 친구들은 먹을 것이 없어 시장바닥을 헤매고 다녔다. 정권에 충성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부모님들 덕에 우리는 특권을 누리고 살았지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은 권력이 없었기에, 좋은 부모가 없었기에 죽지 못해 살았다. 꽃제비는 평양에도 있었다. 아주 어렸을 적 엄마 몰래 동년배의 꽃제비를 집에 데리고 와 밥을 준 적이 있었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구걸하던 친구였는데 남은 게 없어 그냥 집에 가서 새 것을 주겠다 하고 데리고 갔었다. 그리고는 남아있던 밥과 감자반찬을 비닐봉지에 싸 그 친구에게 주었다. 너무 행복해하는 그를 보내고 난 뒤 문뒤에 숨어서 엄청 울었다. 그 반찬은 어머니가 상했다며 버리려고 했던 반찬이었다. 그것도 괜찮다고 받아가는 친구를 보면서 너무 불쌍해서 울음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그 친구는 신발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물었다. 다 똑같은 사람인데 왜 저들은 저렇게 살아야 하냐고. 어머니는 답을 하지 못하셨다. 

우리는 그 답을 스스로 찾았다. 

북한의 독재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된 엘리트들에게만 특권을 부여하고 나머지 민중의 삶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감시와 통제의 대상일뿐이다. 선택받은 자는 그 혜택을 대대손손 누리기 위해 권력을 되물림하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모든 부패와 부조리의 피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힘이 강한자는 힘이 약한 자를 병탄하고 빼앗고 자신보다 힘이 더 강한 자에게 아부하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찾은 답이었다. 
바꾸고 싶었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토론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달걀로 바위치기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누군가 깃발을 들고 먼저 일어서지 않는다면 변화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새로운 세상을 먼저 경험한 우리가 나서 사람들을 계몽하고 일깨우고 하나로 뭉쳐 세력을 형성한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우리의 토론은 북경대의 학생식당에서, 어언대의 기숙사로 그리고 대동강의 어느 맥주집에서도 이어졌다. 철부지 20살들의 독서토론모임이었지만 우리는 그때 원대한 꿈을 가진 혁명가였다. 

2011년 12월 19일. 김정일이 급작스레 사망했다는 뉴스가 온 세계를 강타했다. 수업을 듣던 모두에게 그 소식이 전해졌고 우리는 대사관에서 이뤄진 추모행사에 참석한 후 바로 한자리에 모였다. 너나 할 것 없이 흥분된 상태였고 그렇게 축하파티를 했다. 

2012년 1월이 되자 북경에 음산한 기운이 맴돌았다. 평양에서 많은 수의 보위부 요원들이 급파되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단둥에서는 나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갑자기 연락을 피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우리 멤버 중 한 명이 갑자기 소환되는 일이 발생했고 나중에 들었지만 플라톤의 국가론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고 한다. 한국어 번역본이었던지라 더 문제가 심각했다. 2월 초에 이르러 드디어 나도 감시를 받게 되었다. 누군가 미행하는 것을 자주 느꼈고 핸드폰도 도청되는 듯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멤버들에게 위험상황임을 알리고 당분간 숨 죽이고 지내자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러던 중 2월 8일 대사관으로부터 호출을 받았고 나는 그것이 나를 북송하기 위한 작전임을 눈치챘다. 이미 한 두차례 보위부 요원들이 내 방을 수색한 것을 알고 있었고 기숙사를 옮긴 후에도 지속적으로 위협을 느끼던 터라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그 길로 기숙사를 빠져나와 한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3월 말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탈북 스토리다. 이미 다른 영상매체를 통해 여러번 소개가 된 적 있지만 글을 통해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덧붙인 것도 없고 과장한 것도 없다. 

"나같으면 그냥 북한에서 편안하게 살았을 것 같아. 형 정도 스팩이면 상위 0.1퍼센트인데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이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을까? 

나는 여전히 같은 꿈을 꾼다. 북한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권이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3대에 걸쳐 독재가 이어지는 비상식적 상황을 끝내고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들며 대동강의 기적을 통해 북한 사람들에게도 풍요로운 삶을 선물해주고 싶다. 더 나아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대한민국을 아시아의 패권을 가진 강대국으로 만드는 일에 일조하고 싶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에서는 분명 현실적인 꿈이니까. 

꿈은 꾸는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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