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의 유별난 공무원 길들이기...세계 유래없는 괴이한 '적폐지수' 평가
세계 최고의 자질을 갖춘 우리나라 중고위직 공무원을 복지부동으로 만드는 진짜 범인은 누구?
"관료들이여, 홍수는 반드시 온다. 인내하며 바른 기술로 네 방주를 계속 지어가라"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건국의 몇몇 기적 중 하나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메이지 유신 후 입헌민주제를 택한 일본의 초대 총리는 이토 히로부미였다. 일본 체제에 맞는 정치체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군주가 권력을 장악하는 체제를 이토에게 가르쳐 준 것은 프러시아 국법학자 로렌츠 폰 쉬타인이다. 천황을 옹위하는 체제를 찾던 이토는 여기에 정착했다. 그 후 이를 가르쳐 준 독일이나 그걸 배운 일본은 절대 제국을 지향하다 몰락한 후에야 자유민주국가로 정착했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가르쳐 심어준 것은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프린스턴 대학의 정치학자 토마스 우드로 윌슨이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해방 후 건국 때 대한제국이나 조선 왕조로 회귀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일 삼대 왕조로 이어졌음을 보여준 북한이 ‘조선’ 체제를 취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경험이 전무했던 우리로선 애초부터 가장 올바른 민주 질서를 교수받은 셈이다. 그것은 기막힌 행운 아니면 섭리였다. 물론 그 내재화에 힘든 과정이 당연히 수반되었지만, 적어도 국가주의로 빠져 수십년 역사 시행착오 뒤에야 자유민주제로 회귀할 뻔한 위험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자유 민주국가는 관료 없이는 유지할 수 없다. 윌슨은 대통령 이전에 위대한 정치학자였다. 그 정치학자가 자기 전공 분야인 정치 작용이 행정 관료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집권 권력에 대한 추종 여부로 행정 관료를 관리하면 행정 능률성은 없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발전한 전문화된 관료제를 취하고 정치 외풍으로 관료를 관리하는 비효율성 곧 엽관제를 배격하고 오늘날의 실적주의 공무원제를 채택하자는 것이다. 그 후 현대국가들은 전문성을 갖춘 행정 관료를 권력의 외압으로부터 보호하고 공직 봉사에 전념하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80대 이후 모든 체제는 다 임시정부(interim government)일 뿐이었다. 권력 잡으면 상대방을 다 때려잡으며, 몇 년 후 자신도 그 다음 정권 밑에서 때려 잡히거나 그 전에 먼저 죽는 모습을 반복해 왔다. 정책 심지어 장기적 일관성이 요구되는 국방정책마저 두 정권을 일관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실질적으로 임시적인 정권들 하에서, 유능한 관료들의 안정적인 정책 수행은 임시 정권들의 진퇴 와중에서도 국정을 일관되게 만드는 남모르는 공헌을 해 왔다. 관료들이 정권만 바뀌면 두들겨대는 동네북이 아니라 충분히 존중받아야 함은 이 때문이다.

정권마다 초기에 관료 길들이기로 공무원을 두들기지만 이 정부는 아주 유별나다. 과거 정부의 정책에 ‘부역’한 정도를 잡아내는 ‘부처별 적폐청산TF(태스크포스)’를 운용하며 이른바 ‘JP(적폐)지수’로 공무원을 평정한단다. 이 상황에서 공무원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빤하다. 바람직한 정책대안을 탐색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집행하기 보다는 나중에 정권 바뀌면 책임 뒤집어 쓸 것 미리 겁을 내고 차라리 주변부 직위에 머무르기를 선택한다.

행정 관료는 자신의 임기보다 더 오래 가는 정권을 본 적이 없고, 이 정부가 현재까지 저질러 놓은 일들 역시 나중에 다시 문제될 수 있다고 예상한다. 짐짓 바보 시늉을 하고, 느리게 반응하며, 특유의 피동적 유기체로 복귀하여 그 유명한 ‘복지부동’ 혹은 ‘복지안동’ 전략을 꺼내는 것이다. 관료가 가진 무사안일주의, 귀속주의, 할거주의, 문서주의, 형식주의.....들의 역기능은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런데 현재 정부가 이런 식으로 관료를 몰아붙이면 구석에 몰린 관료로선 그게 필연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극히 일부는 적극적 동참-승진-정무관 및 정치인-마침내 감옥으로 이어지는 단계의 확률들도 계산한다.

복지부동은 의도하지 않은 ‘좋은’ 결과도 가져온다. 과거 정부에 대한 부역 기록으로 관료를 옥죄이면 관료의 비효율성이 불가피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동시에 좌파 정책의 나쁜 결과들도 효과적으로 저지한다는 역설이다. 나쁜 일을 도모하는 주인 밑에서는 오히려 게으르고 무능한 종이 더 칭송받아야 하듯이 말이다. 능력있는 관료들을 이 기형적 상황에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중, 고위직 공무원의 자질만은 세계 최고이다.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공직으로만 몰리는 게 문제될 정도이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자질이 못되던 대학 동료들이 정치, 사회단체 및 운동권 주변을 이리저리 맴돌며 기레기와 정치 똘마니가 되더니 어느 날 정권을 잡고 정무관으로 부임한다. 그게 우리 수준이다. 그가 호통치며 하달하는 좌파 구호와 적폐 기록부의 위협 앞에서 공무원은 달력, 가족 및 연금을 떠 올린다. 이 귀한 자원들을 복지부동의 집산체로 만드는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마오쩌뚱은 인민혁명으로 타도할 대상으로 관료와 자본가를 동일시했다. 레닌은 관료를 사회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치혁명을 통해 타파해야 할 카스트(caste)의 하나로 보았다. 혁명 후의 관료들은 인민과 괴리되거나 인민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고, 정책의 효과성과 능률성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할 행정공무원들마저 적폐라는 세계 유래가 없는 괴이한 지표로 정권에 줄 세우기를 강요하는 모습이 깊은 불길함을 주었다.

이런 일까지 도모하는 그 과도한 아드레날린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답은 이것이다: 제 권력의 임시성을 잘 알수록 그 시한 안에서는 더 광포하다. 좌파 권력이여, 네 청춘을 즐거워하라. 5년 임기 중 1년, 백세 인생으로 치면 이제 20대를 겨우 지났을 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교대할 날이 아직 몇 년이나 더 남아 있으니 더 광분하라.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몰락 전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최고 권세를 구가하던 퐁파두르 부인이 했다는 말은 여기에 꼭 맞다: ‘홍수는 나중에나 닥칠 것이다.’ 관료들이여, 홍수는 반드시 온다. 나쁜 좌파 정책 앞에서는 복지부동하라. 역적으로 몰리더라도 인내하며 바른 대안, 기술로 네 방주를 계속 지어가라. 보람되게 헌신할 때가 꼭 온다.

김행범 객원 칼럼니스트(부산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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